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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람쥐 쌤 Feb 15. 2022

랍짱과 함께 첫 출근

드디어 오늘부터 학교 첫 출근이다!

아직 개강은 열흘 정도 남았지만, 개강 전 준비 작업도 많고, 계약서 상 오늘부터 일하게 되어 있기 때문에 아침부터 부지런을 떨었다. 태국 대학교는 교사의 복장에도 어느 정도의 제약이 있는 편인데, 그게 한국과 조금 다르다. 바로 치마를 입어야 한다는 것이다. 치마라면 항아리치마든, 정장 스커트든, 원피스든 상관없지만 바지는 곤란하다고 했다. 사실 직장을 그만둔 지가 5년이 다 되어가는 터라 정장치마는 고사하고 제대로 된 옷이 없었다. 대충 화장을 마치고, 그나마 깔끔한 원피스와 팔뚝을 가리는 카디건을 입고 주섬주섬 짐을 챙겨 나갈 준비를 했다. 학교에 가져다 놓을 노트북, 책, 교구, 텀블러 등을 챙기니 짐이 한가득이었다. 룰루랄라 현관을 나서는 순간 열대의 더운 공기가 훅 하고 느껴졌다.


‘아, 여기는 태국이지…’

마음을 단단히 먹고 총총히 걸어 콘도 건물을 나왔다. 모퉁이를 돈 지 2분도 되지 않았는데 이마와 등줄기에는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아니 이 정도로 덥다고? 학교까지는 걸어서 15분인데?’

내가 이 숙소를 계약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학교까지 걸어서 15분이면 갈 수 있다는 거였다. 그런데 나는 태국의 후텁지근한 날씨는 미처 계산에 넣지 않았던 것이다. 인중의 땀이 입술로 흘러내리기 직전, 세븐일레븐이 보였다.

 

‘안 되겠다. 물이라도 사 마시고 다시 걷자.’

그렇게 들어선 세븐일레븐은 마치 천국과도 같았다. 시원하고 청량하고 금방이라도 날아갈 것 같은 상쾌함까지…. 다시 나가기가 싫을 정도였다.

물 한 병을 계산대에 올려 놓으니, 아르바이트생은 익숙한 손놀림으로 작고 긴 봉지에 물과 빨대를 담아주었다. 그러고 보니 봉지에 든 물병에 빨대를 꽂아 달랑달랑 들고 다니면서 마시는 사람들을 본 것 같기도 했다. 나도 물병에 빨대를 꽂고 쭉 한 모금 들이키면서 지옥불로 나갈 준비를 했다.

그때 문 밖에 있던 학생 하나가 손짓으로 뭔가를 부르는 게 아닌가. 마치 택시를 부르는 것처럼 손을 흔드니 쏜살같이 달려온 오토바이 한 대가 학생 앞에 섰다. 오렌지 색에 숫자가 써진 조끼를 입은 오토바이 아저씨는 능숙하게 학생에게 헬멧을 건넸다.

 

‘아 나도 저걸 타고 가야겠다. 그런데 치마를 입고 탈 수 있을까? 아니, 목적지는 어떻게 말하지? 요금은 얼마를 내야 해?’

수많은 질문과 갈등 속에서도 이걸 타야겠다는 의지가 앞섰다. 더 이상 지옥불 속에서 걸을 수는 없었다.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의 도움을 받아 오토바이를 한 대 잡았고, 인문대 건물로 가 달라는 말과 요금 문의도 영어 반, 손짓 반으로 겨우 해결했다.

곁눈질로 다른 학생들이 오토바이 타는 자세를 훔쳐보고선 나도 엉덩이를 살짝 오토바이 뒷자리에 걸치고 올라탔다. 한 손으로는 짐을 끌어안고, 한 손으로는 뒷자리 안장의 손잡이를 잡고, 두 다리는 대롱대롱 매달린 채, 오토바이는 출발했다.


엄청난 속도로 달리는 와중에 드라이 한 머리는 수세미처럼 뒤집혀 흩날렸고, 살겠다고 움켜쥔 안장 손잡이에는 땀이 흥건했다. 몇 번의 턱을 넘을 때에는 엉덩이도 쿵쿵 털썩대고, 커브를 돌 때에는 마치 떨어질 것처럼 몸이 기울었다.

마침내 인문대 건물 앞에 오토바이가 섰을 땐 약간 정신이 나가 있는 상태였다고 나 할까. 연신 머리카락을 정리하고 옷매무새도 가다듬으면서 건물 입구 현관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데, 다리가 후들후들거렸다. 시계를 보니 딱 2분 걸렸다. 뒤를 돌아보니 어느새 오토바이 아저씨는 다른 학생을 태우고는 멀어지고 있었다. 지난주, 동료 선생님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선생님 어떻게 학교에 오실 거예요?”라고 물었을 때 “걸어서 오죠 뭐. 하하 "라고 쿨하게 대답한 내가 얼마나 바보 같았는지 깨닫게 된 하루였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곳에서 오토바이는 필수 교통수단이고, 오토바이 택시를 잡아서 타는 일은 교사에게나, 학생에게나 흔한 일이었다. 물론 태국인 교수들은 거의 차가 있지만 말이다. 그리고 오토바이 아저씨를 랍짱이라고 부른다는 것도 배웠다.

 

이제는 풀메에 정장을 입고 한 손에는 커피 텀블러를 든 채로 랍짱 아저씨를 향해 손을 흔들고 익숙하게 오토바이에 올라타는 법을 안다. 장애가 있으시거나 도로 턱에서 속도를 줄여 매너 운전을 하시는 랍짱 아저씨께는 5밧의 팁을 주는 여유도 생겼다.

 

오늘도 콘도를 나선 내 앞에 오토바이 아저씨가 쓰윽 서면서 ‘가나마눗(인문대)?’이라고 묻는다.

'아.. 나 제법 잘 적응하고 있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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