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이 댓 발 나왔다.
해가 바뀌었다. 나이를 먹었고 조금 더 어른이 되었다. '어른'이 '성장'과 동격인지 나는 모른다. 나이테가 전보다 늘었다는 기분은 확실히 든다.
한 시가 넘었다. 이 시간에 글을 쓰는 이유는 명징하다. 고민이란 것은 대게 수면 시간 너머에 둥지를 튼다. 이 글도 같은 맥락을 탄다.
(해야) 할 일을 제쳐놓고 쓴다. 어째서인지 생에 같은 문제가 반복되는 감이 있다. 답답함은 쉬지도 않고 찾아온다. 누군들 다를까.
먼 옛날 흰 눈썹이 나던 때가 생각난다. 과도한 스트레스를 받았다. 기자님 소리를 들으면서 (부당한) 상명하복을 강요받는 게 싫었다. 등과 배가 다른 자신을 마주했다.
특정 조직의 문제는 아니었다. 어디에나 있고 누구나 겪는 일이다. 뺨을 맞고도 견디는 이가 있나 하면, 어떤 이는 대우를 받으면서도 서글프다. 부른 배를 두드리는 소리가 아니다.
고민이 반복되자 이런 생각도 해봤다. '나는 인간을 싫어하는 걸까'. 딱히 부정할 수 있는 명제는 아니었다. 부대끼지 않고 고요한 인연을 즐긴다. 그게 돈벌이에 적용되면 오죽 좋을까.
쓰는 일은 이런 욕심을 어느 정도 충족한다. 결과물을 개인의 노력으로 평가받는다. 그래서 연어처럼 근처를 기웃거렸다. 평가가 나쁘지 않으면서도 만족감은 바닥을 친다.
기분이 널을 뛰었다. 직업도 함께 널을 뛰었다. 그럼에도 쓰거나 찍는 일을 계속해왔고 어떤 이유로 다시 쓰고 있다. 요즘은 (비공개) 자료도 종종 받는다.
얼마 전엔 뜻하지 않은 칭찬을 받았다. 주요 취재원이 평소 취재 모습을 거론하며 속내를 보여줬다. 고마웠다. 하지만 그런 일면들이 쌓여 회의감이 성장했다. 성장판은 닫히지도 않았다.
문제는 주체성의 부재다. 쓰는 입장에서 누군가의 신뢰는 더할 나위 없는 상찬이다. 그게 오롯이 글쓰기에 반영되면 상찬은 나의 몫이 된다. 고민은 바로 이 지점에 있다.
발제나 기사의 방향이 전혀 먹혀들지 않는다. 무력감이 형태를 띠고 발현될 정도로 수동적인 글을 쓰는 요즘이다. 데스크의 권한을 존중하지만 그게 곧 독이 됐다.
글의 성질 변화도 도드라진다. 기사에서 단문을 배제한 적이 없었다. 단문은 사실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효과적 형태이다. 사실 위주의 기사는 언제나 보도의 종착지였다. 요즘은 그마저 무리다.
해설 위주의 기사를 주로 쓴다. 맥락과 의미를 짚는다. 예컨대 '교수님의 휴강 공지는 이 시점에 어떤 상징성이 있나' 하는 식. 기존과 다른 토양이 자존을 침범한다. 이게 맞나 싶다.
해석이 들어가니 기사는 그 자체로 에디토리얼의 색채가 짙다. 이런 기사는 평균보다 위험하다. 그러니 데스크의 개입 범위가 넓어진다. 그것이 시스템으로 굳어졌다. 바이라인은 내 것일까.
데스크는 잘 쓴다. 잘 본다. 잘 평가한다. 그런 만큼 기준이 확고하다. 저만치 높이를 드러낸 연차의 그림자 속에 가라앉는 기분이다. 노의 효용은 내 팔이 작동할 때나 확인할 수 있다.
두 시가 넘었는데 잘 생각이 들지 않는다. 부유하는 생각들이 가라앉지 않아서다. 녹지 않는 알약이 식도에 걸린 것 같다. 이질감이 일상을 때린다. 쓰는 법을 잃어간다.
글에 묻은 내 지문이 부쩍 옅어졌다.
어쩐지 니글니글(=네 글 네 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