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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찬집 May 22. 2019

신작로 풍경

늦가을 오후 신작로 풍경

문뜩 그럴 때가 있다. 무심결에 어딘가를 봤을 때 그 장면이 화면처럼 뇌리에 박히는 순간이 있다. 

또는 길을 걷다 어떤 소리를 들었는데 의미 없는 그음이 아주 오래 머리에 남아 있는 기억이 있다. 이처럼

살다보면 그런 경험이 종종 있다. 당시에는 대부분 무엇 때문인지 모르지만 없던 듯 잊고 살다보면 먼 훗날 불현듯  그 이유를 깨닫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런 현상은 보통 가족이나 연인, 가까운 친구처럼 나의 소중한 사람과 관련되는 경우가 많다. 길을 걷다 혼자 밥을 먹는 누군가의 등이 유난히 신경 쓰일 때, 말할 때 습관적으로 입술을 삐죽이는 상대방의 습관에 왠지 친근감이 들 때, 나중에 알고 보면 집에서 자주 보던 어머니 뒷모습이었거나, 예전에 사귀었던 연인의 버릇이었음을 기억해 낸다.    

전차 쌀쌀해지는 어느 날이었다 나는 단골 카페에서 세 시간째 머무르고 있었다. 카페는 2층이었고 건물 외벽이 온통 외벽이 통유리여서 창가 자리에서는 바로 아래 길가뿐만 아니라 저 멀리 신작로 삼거리와 버스정류장 까지 내려다 보였다. 그 자리에서 글을 쓰던 중에 집중이 풀어졌다.  자연스럽지 않은 끊김이었다. 

왠지 그래야 할 것처럼 고개를 들었다. 옮겨가는 시선을 무작정 따라 가보니 저 말리 삼거리에  소싯적에 돌라가신 아버지가 서 계셨다. 아버지가 황색 코드와 검은색 머플러, 왼손에 요즘의 노트북 손가방을 들고  아침에 일 나갈 때 배웅 받던 그 모습으로, 누군가를 기다리시는 것 같았는데 여기에 다녔던 십여 년 동안 이런 식의 허성은 전혀 없었다. 

처음이었다. 대뜸 소리쳐 불러 질 것 만 같았다. 하지만 벌어지던 입이 문득 도로 닫혔다. 그리고 물끄러미, 한동안 그분의 옆모습을 바라보는데 어느새 주르륵 눈물을 참을 길이 없다. 입술에 닿기 전까지는 흐르는 줄도 모르게  조용히, 사람들이 오가는 거리에 우두커니 서 계신 아버지의 모습은 사진처럼 눈이 아닌 가슴에 박혔다. (왜 이 장면이 눈에 박혔는지는 훗날 이글을 쓰다가 알게 된다. 아버지도 더 예전 돌아가신 할아버지께선 우리가 아버지와 내가 같이 걸어오는 모습을 늘 집 앞 넓은 마당에서 지켜보고 계셨다,)    

쉬운 차이가 있는 아버지와 아들, 이제는 서로에게 남은 시간이 없고 여생을 달리한 지금, 지나간 시간뿐이다. 그럼에도 했던 것 보다 하지 못해 아쉽고 서글픈 것들이 훨씬 많이 남아있다. 생시에 함께 먹은 것보다 함께 하지 못한 음식이 많아 졌고, 같이 갔던 곳보다 같이 가지 못한 곳이 점점 더 많아 졌다. 

언젠가는 더 이상 낙지볶음에 소주 한잔을 하지 못한 것이 한이 되었다. 다음날 일찍 일어나서 함께 산에 올랐다가 뜨거운  증기 사우나를 같이 여유 있게 못한 것에 억장이 무너진다. 휴가 중에 일출봉 앞에서 무릎을 매만지며 고민하는 모습에 한방에 같이 다니지 못한 것 역시 가슴이 아프다.    

나는 이때가 되면 하지 못한 것이 이렇게 한이 맺을 줄을 모르고 덤벙덤벙 살아온 것이다. 나는 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하지 않았음에 너무 서러워 눈물 짖고 있다. 그, 걸 알고 있다. 하지만 알면서도 명심 하지 않았던 일이 가자기 서러워서 억장이 무너진다. 지금의 허상인 그분은 어떠셨을까 

자식이 서장하면 함께 무엇을 하고 싶으셨을까, 내가 처음 어머니의 배 속에 자리 잡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무사히 태어났다는  의사의 목소리를 들으셨을 때, 잠든 어머니와 나를 두고 대문 밖에서 하늘을 보며 담배를 태우셨을 때, 무슨 생각과 결심을 했을까,

그 아기였던 내게 바라는 점이 있었을 것이다. 분명 언젠가 함께 이루고자 하는 바도 있었을 터, 과연 얼마만큼 이루셨을까? 그분께서 들어 올린 손을 보며 나는 몇 번이나 마주 손바닥을 내밀었나, 나 역시 자라기에 바빴고 자리 잡고 사는 일에 쫓겼다지만 효도 할 궁리를 하면서 어찌 사랑받을 준비는 안했냐 말이냐, 드려야 하는 것을 해드리는 것이 자의적 효라면, 반대로 자식을 원활히 사랑 할 수 있게 돕는 게 타의적 효가 될 텐데, 나는 결국 효도도, 사랑받음도, 반 푼의 자식으로 한평생을 넘겨 버렸다. 

스스로 큰 효는 못했어도 불효도 없는 자식 이었다고 여긴다고 하지만 내 역할은 자식으로서 효, 과연 그것 뿐 이었을까.  나는 이분에게 자식을 떠나 한 사람으로써 괜찮은 인간이었는지. 같은 지붕을 이고 살만한 괜찮은 가족이었는지, 또는 인생의 삼분의 이를 함께 할 괜찮은 동반자였는지, 당신께서 원하신 바가 내가 말하는 것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어쩌면 과한 생각일 수도 있다. 하지만 자식은 늘 누군가의 불효자일  수밖에 없어서, 이런 할 일 없는 상념들이 계속 입안을 적셨다.     

그렇게 몇 분을 말없이  허상(눈에 비침)을 바라보던  나는 끝내 휴대전화를 들었다. 문자 아이콘을 클릭 했다. 비어 있는 까만 네모 안을 무슨 말로 채울까  잠시 고민하다가 “아버지! 아무도 보는 이 없는 이 시공에서 눈물과 기도로 용서를 빕니다.” 라는 말밖에 쓰지 못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더는 적지를 못하고 전송을 눌렀다. 휴대폰 문자는 유명을 초월해서 배달 될 태지 하고 나의 죄를 감 할여는 야속하고 속 좁은 나의 스트레스를 조금이나 덜기 위해서 말이다.     

잠시 후 망상의 정신에서 현실을 찾은 후, 꺾어진 코너에서 차가 나왔다. 잠시 비상을 켜고 아버지 영상은 찻잔을 받는 순간시야 밖으로 빠르게 사라졌다. 그 짧은 10초의 장면이 내게는 마치 남은여생을 압축시켜 놓은 동영상 같았다. 늘 가까워지고 싶었으나 일정이상 다가지 못했던 이 한 사람을, 나와 참 많이 닮았지만 그래서 숱한 평행선을 그렸던  당신을 그저 바라보고 생각 하는 것뿐,  할 것이나 드릴 것이 없는 유한한 삶을 어떻게 생각해야 되나, 그렇다. 모두가 그리 왔다가, 그리 살다가, 그리 가겠지, 지금 내 뒷모습이 그 허상을 바라보던 당신의 뒷모습과 닮았듯이, 나 역시도 언젠가 그렇게 ..... 어느 날 저녁 신작로의 풍경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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