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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찬집 Jul 17. 2019

생사의  경계선

생과사의 나무

사거리로 내려가는 길의 한쪽 코너에 공터가 있다. 그 곳에는 버려진 문짝과 의자와 그것들과 마찬가지로 누군가로부터 버려진  것 같은, 별 특징도 볼품도 없이 앙상한 마무 한 그루가 있다. 원래는 누군가의 집 정원에 심어졌던 것이 그 집 식구들이 떠나고 주택마저 철거되어 공터에 버려진 듯 혼자 둥그런 이 서있다.

겨우내 그 나무를 지나치면서 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산으로부터도 밀려나고 인간으로 부터도 버림받은 그 나무는 내가 보는 관점은 낡아빠진 문짝이나 의지와 똑같이, 그저 공터에 방치된 하나의 고물이자 우충중한 정물일 뿐이다. 

    어느 날 아침, 출근길에 멀리 공터위로 낮선 것이 걸려 있는 것을 보였다. 깨끗하게 빨아 넌 흰 손수건 같기도 하고, 환하게 불 밝혀진  알전구 같이 한 것들이 공터 뒷집 먹색 슬러브 지붕을 배경으로 점점이 떠있다.

공터 가까이 다가간 나는 순간 탄성을 지르며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방세가 밀린 세입자처럼 늘 어딘가 불편한 자세로  서이던  그 나무가 전날 내린 비에 부풀어 오른 무수한 꽃송이를 가지에 매달고 있었던 것이다.

눈부신 순백의 꽃을 보고서야 그 나무의 신원을 알 수 있었다. 그 나무의 정체가 ‘목련’임을 알게 되었다. 마치 몇 년간 데면데면하게 지내온 동네 슈퍼 주인이 사실은 잃어버린 친동생임을 알게 되었을 때의 기분, 그런 황당함 같은 걸 나무 앞에서 느꼈다. 

목련이라면 항상 우리 곁에  있어서 친숙한 마무다. 오랜 세월동안 수없이 보아왔기에, 누누가 나에게 목련나무를 아느냐고 물었다면, 물론 잘 안다고 대답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목련을 몰랐다. 내가 알고 있었던 것은 단지 목련나무가 피워 올린 희고 탐스런 꽃에 불과 했다. 

    나무의 둥치나 껍질이나 잎사귀에는 제대로 눈길을 주지 않았었다. 비가내리거나 찬바람이 불적에 목련나무가 그것 들을 견디어 내는 모습을 지켜본 적도 없이, 그저 봄날 짧은 며칠, 발화(發火)하듯 피는 꽃송이들에게만  열광 했을 뿐이다. 이지러진 양초 덩어리처럼 뚝뚝 꽃들이 떨어지고 그 자리 새살 차듯 자잘한 잎이 돋아나면 나무는 차츰 시선 밖으로 물러  났다가, 다른 신록들 속에 묻히게 되는 여름이 오게 되면  그만 ‘ 이름을 알 수없는 나무’ 가 되어버리곤  했다. 목련나무의 본래의 모습보다 한순간의 꽃단장에만 미혹되었던 나의 부박함이 느껴져 씁쓸했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저 공터의 나무처럼 목련이라는 나무는 다른 나무들에 비해 꽃이 피는 것이 너무도 적극적이다. 겨울동안 메마른 가지를 치켜들고 숨도 쉬지 않은 것처럼 조용히 서 있다가 다른 꽃나무들이 겨울과 봄의 모호한 날씨를 탐색하는 사이에 기습적으로 꽃을 확 피워버린다. 선수를 빼앗길까봐 두려운 듯 잎사귀도 내기 전에 꽃부터 피우고 본다. 도발적인 일만큼 당찬 개화에 정작 그것을 생산해 낸 회색의 나무 등치와 가지들은 한날 꽃을 위한 버팀목처럼 내 눈의 초점 밖으로 밀려났는지도 모르겠다. 

열정도 의지도 없이 다만 생장 할 뿐이라고 여겼던 나무의 내부에 응축 되어 있던 욕망을 본다. 자신이 있음을 당당히 밝히고자 인고하며 때를 기다려온 뜨겁고 뜨거운 욕망이 그 나무를 돌아보게 한다. 공터한 쪽에서, 돌멩이를 던지고 발로차도 구부정한 자세 그대로 묵묵히 서있을 뿐이던 나무는 별 보잘 것 없다가 난데없이 일등을 한 아이처럼, 오늘 찬란하다. 일 년 중 며칠간 온 몸에 명찰을 달고 세상에 제 이름을 외치는 목련나무를 떠나오면서, 그것과는 또 다른 방식으로 제 존재를 알리는 참나무를 생각해 보았다.

    한 알의 도토리에서 시작되는 상수리, 떡갈, 굴참 등 우리 산양에 흔하디흔한 참 나무들이 이렇다 항 특징도 없이, 산속 군집해서 살아생전 누군가의 눈길 한 번 끌지 못했을 한 그루의 참나무는 톱으로 베어져 제 살 속에 지닌 향을 드러내고서야 나로 하여금 제 존재를 돌아보게 한다.

고개 그리스 신들의 맨처음으로 만든 나무라하여 ‘어머니 남무’로 불리는 나에게는 그런 참나누로 만든 적은 밥통이 있다. 

갗 지은 뜨거운 밥을 그 밥 동안에 넣으면 둥글게 맞물려진 참나무 널조각들은 시골 방 아랫목에 놋주발을 묻어두는 어머니처럼 제 가슴에 흰쌀밥을 품고서 오래도록 온기를 보존 시켜준다. 온기도 온기지만 밥알마다에 은은하게 스며든 참나무 향기는 또 어떤가, 무심코 밥통의 뚜껑을 열었을 때 밥의 훈기에 우러나 있던 나무의 향기가 코끝에 물씬 와 닿으면, 바호의 무반주첼로를 들었을 때처럼 마음의 갈피마다 아늑한 울림이 운다. 

향이 좋은 까닭에 옛날부터 청어나 연어를 훈연시킬 때, 질 좋은 와인을 숙성시킬 때, 수많은 나무들 중에서 참나무를 골라 사용했다. 물론 편백나무나 향나무처럼 생살 속에 고아한 향을 가진 다른 나무도 있기는 하다. 

그러나 자신은 한 번도 가 본적이 없는 세상에서, 낮선 방식으로, 낮선 추억을 쌓으며, 자라난 연어와 포도, 그 이질적인 것들이 가진 본래의 향을 거스르지 않으면서 오히려 깊고 그윽한 풍미까지 더 해주는 나무는 오르지 참나무뿐인 것을 옛사람들은 알았던 모양이다. 

한겨울 늙은 군 고구마장수가 끌고 다니는 수레의 양철화덕 속에서 타닥타닥 타오르는 참나무 냄새는 고충 건물로 빽빽한 도심거리에 일순, 이른 저녁나절의 시골정취를 풀어 놓는다. 

장작 몇 개일 뿐이나, 그 향이 너무도 길고 깊어서 양철화덕 속에는 해 묵은 참나무 숲 하나가 통에 타고 있는 듯하다. 스님들의 독경처럼, 수사들의 그레고리한 성가처럼, 긴 여운을 남기며 대기 속으로 사라지는 향기가 아까워, 주린 듯 그 향을 맡는다. 무엇을 태운들 저리 맑고 그윽한  향기를 풍길까, 태워도 결코 정갈한 향을 풍기지 못할 내 몸, 내 삶을 알기에 참나무 향기를 맡을 때마다 한 없이 부끄러워진다. 

열매를 겹겹의 껍질로 싸고도 가시까지 촘촘하게 세우는 밤나무와 달리, 산짐승들에게 순하게 도토리를 내어주고 외부 적들을 제거하기위해 독소를 만들어내는 은행나무와 달리, 제 속, 그이 영양분을 둥치에 달라붙은 버섯들과 나누어지지는 욕심 많은 나무, 소나무처럼 그악스럽게 햇빛을 긁어모으지도 않고, 꽃송이마저 잎사귀 아래로 드리우는 가식 없는 나무,

    남보다 많은 겸손의 덕을 몸 안 에 지니고,  남보다 적게 탐하는 일생을 살아왔기에 불길에 겨루어지는 향기는 고결할 수밖에 없는 것인가. 

지난 가을, 갑작스럽게 이모님이 돌아가셨다. 세상 사람들 속에 묻혀 눈에 띠지 않게 평범하게 살아온 그분의 삶이었건만, 나흘간의 장례식 동안만큼은 일생에 받지 못한 주목을 받았다. 묵묵히 살다 느닷없이 활짝 꽃피워 세상에 제가 있었음을 알리는 목련나무처럼, 이모님은 남아서 고인을 추모하는 자들의 기억 속에서

한결같이 아름다웠다. 모두들 천사 같은 사라이었다고 했다. 사람들은 사고로 망가진 고인의 싸늘한 얼굴에 뺨은 부비며 눈물을 흘렸다. 그렇게 모두들 울면서 고인의 자취를 아린 마음으로 더듬었다. 관 속에 누운 이모님에게서는 양철화덕 속의 참나무같은 향기가 장례식 내내 풍기었다. 내 삶도 사람들에게 조상되는 때가 올 것이다. 죽음을 들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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