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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헤세의 책이라는 세계

독서의 기술은 공들여 배울 가치가 있다

by 효문

오래전 호주에 보름 정도 여행을 갔을 때, 책을 딱 한 권만 들고 갔다. 단테의 신곡. 꼭 읽고 싶었지만, 읽다가 포기하기를 수없이 하다가 나름 극약처방을 했다. '여행길에 책이 한 권뿐이라면 어떻게든 읽겠지' 생각했다. 읽었다. 그리고 호주의 어느 게스트하우스에 두고 왔다. 나와 같은 여행자가 있다면 그가 읽기를 바라면서. 그런데 나는 왜 그렇게 단테의 신곡을 읽으려고 애를 썼던 것일까?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독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며, 왜 책을 읽는지조차 정확히 모른다." <헤르만 헤세의 책이라는 세계>의 첫 구절이다. 이 구절을 읽는 순간, 호주의 어느 게스트하우스에 두고 왔던 단테의 신곡이 생각났다. 그리고 깨달았다. 그때의 나는 왜 책을 읽는지조차 정확히 모르고 있었다는 것을.


헤르만 헤세는 작가인 동시에 서평가였고, 성실한 독자였고, 욕심 많은 장서가였다고 한다. 이 책 <헤르만 헤세의 책이라는 세계>는 제목 그대로 그가 읽어온 책에서부터 책을 읽는 방법, 장서를 선별하는 기준, 서재를 정리법 등등 책에 대한 모든 것을 이야기하는 에세이이다.


이 세상 모든 책들이

그대에게 행복을 가져다주지는 않아

하지만 가만히 알려주지

그대 자신 속으로 돌아가는 길


그대에게 필요한 건 모두 거기에 있지

해와 달과 별

그대가 찾던 빛은

그대 자신 속에 깃들어 있으니


그대가 오랫동안 책 속에 파묻혀

구하던 지혜

펼치는 곳마다 환히 빛나니

이제는 그대의 것이리


- 헤르만 헤세




평생을 까막눈으로 살다가 말년에 한글을 배운 어느 할머니가 이런 말을 했다. 글을 배우고 나니 세상이 다르게 보인다고. 한글을 배우기 전까지 할머니는 건물에 붙어 있는 간판도, 버스에 적혀 있는 목적지도, 식당 메뉴판도 읽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 모든 걸 읽을 수 있게 됐으니 얼마나 경이로웠을까. 스스로가 대견하기 그지없었을 것이다. 헤세의 표현에 따르면 '강력한 보물'을 손에 넣은 것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그 능력을 그저 신문기사를 읽는데 활용할 뿐이라고 안타까워한다. 지금의 우리 모습을 본다면 '그 시절에는 신문기사라도 읽었구나'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헤세는 이 책을 통해서 '독서의 기술'은 다른 여러 가지 삶의 기술과 마찬가지로 공들여 제대로 배울 가치가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왜냐하면 책을 제대로 읽는다면 우리 삶을 더 행복해지고 풍족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더 의식적으로, 더 성숙하게 우리의 삶을 단단히 부여잡기 위해 책을 읽어야 한다. (...) 마치 알프스를 오르는 산악인의 또는 전쟁터에 나가는 군인이 병기고 안으로 들어설 때의 마음가짐을 가져야 하리라. 살 의지를 상실한 도망자로서가 아니라, 굳은 의지를 품고 친구와 조력자들에게 나아가듯이 말이다. 만약에 이럴 수가 있다면 지금 읽는 것의 10분의 1 가량만 읽는다고 해도, 우리 모두 열 배는 더 행복하고 풍족해지리라. - 15p



독서는 홍어다


독서는 '홍어'와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진입장벽이 꽤나 높지만, 일단 넘어서고 나면 그 세계가 얼마나 광활하고 즐거운지 깨닫게 된다. 헤세는 우리가 만나게 되는 독서의 세계를 이렇게 표현한다. "처음에는 이 세계가 자그마한 금붕어 연못과 튤립 화단이 달린 아담하고 예쁜 유치원 뜰인 줄 알았는데, 뜰은 이내 공원이 되고 더 넓은 풍경이 되고 대륙이 되고 세계가 되고 낙원이 되고 코트디부아르 해안이 된다. 그리하여 늘 새로운 마법에 홀리고 늘 처음 보는 색색의 꽃이 만발한다. 또한 어제까지는 정원이나 공원 혹은 울창한 숲으로 보였던 것이 오늘이나 내일쯤은 경건한 신전으로 다가온다." 대단하지 않은가? 책 외에 또 무엇이 우리에게 이런 놀라운 세계를 선물할 수 있을까? 물론 책을 잘 읽기 위해서는 반드시 갖춰야 할 덕목도 있다. 헤세가 꼽는 '독자가 꼭 갖추어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은 '편견이나 선입견에 얽매이지 않는 것'이다.


기본 덕목을 갖췄다 하더라도 독서를 하는 방법은 제각각이다. 헤세는 독서에 '3가지 유형'이 있다고 말한다.

첫째, 순진한 독자. 마치 음식을 먹듯이 책을 대하는 독자로 배불리 먹고 마시듯 그대로 받아들인다.

둘째, 천진난만함과 탁월한 유희 본능을 보여주는 독자. 마부를 따르는 말이 아니라 마치 사냥꾼이 짐승이 자취를 더듬듯 작가를 추적한다.

셋째, 무엇을 읽든 완전히 자유로운 태도로 대하는 독자. 그에게는 괴테가 없어도 아쉬울 게 없고, 셰익스피어가 꼭 필요하지도 않다고 말한다. 온 세계가 자기 내면에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헤세는 지속적으로 세 번째 단계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은 없다고 말한다. 우리 모두는 어느 때에는 이쪽에, 또 어느 때에는 저쪽에 속한다는 것이다. 다만 일생에 단 한 번만이라도, 단 하루 단 한 시간만이라도 세 번째 단계를 경험해 본다면 더 훌륭한 독자가 될 수 있고, 글로 쓰인 모든 것들을 더 훌륭하게 해석하게 될 것이라며 이런 말을 덧붙였다. "그대는 괴테와 톨스토이와 다른 모든 시인들에게서 그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더욱 무궁무진한 가치를, 풍성한 젖과 꿀을, 자신과 인생에 대한 더 큰 긍정을 이끌어내게 될 것이다." 아, 진심으로 한 번쯤 이 단계에 머물러 보고 싶다.



책을 읽는 것은
'그를 친구로 삼는 것'


나는 e북으로 책을 읽는 것이 아직도 어렵다. 종이책을 한 장 한 장 넘겨가면서 읽을 때 더 집중이 잘 되고, 원하는 곳에 마음대로 밑줄을 그을 수 있어야 마음이 편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책을 사는 수밖에 없다. 실제로 많은 독서가들은 장서가이다. 좋은 책은 언제든지 다시 꺼내 보고 싶은 욕심이 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책들의 내용이 더 오래 기억에 남는다. 휘리릭 읽고 반납한 책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내용이 기억에서 사라져 버린다.


흔히 책 읽기를 '콩나물 키우기'에 비유한다. 콩나물을 키울 때 물이 밑으로 빠져도 콩나물은 쑥쑥 자라듯이 책의 내용을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정신이, 마음이 성장한다는 것이다. 나도 그렇게 믿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읽고 나서 다 잊어버린다면, 읽기 전이나 후나 무엇이 달라질까? 읽은 것이 흘러가지 않고 내 곁에 남아서 내 삶의 일부가 될 때 비로소 가치 있는 것이 되지 않을까? 헤세는 '읽는 글에 대한 경의, 이해하고자 하는 인내, 수용하고 경청하려는 겸손함'을 가지고 독서를 한다면 그 책은 진정한 영향력을 발휘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올바른 독자들에게 한 권의 책을 읽는다는 것은 타인의 존재와 사고방식을 접해 그것을 이해하고자 노력하고 그를 친구로 삼는 것을 뜻한다. 특히나 문학작품을 읽노라면 비단 몇몇 인물과 사건들만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작가의 방식과 기질, 내면의 풍경, 나아가 작풍이나 예술적 기법, 사고와 언어의 리듬까지 접하게 된다. 한 권의 책에 사로잡힐 때, 작가를 알고 이해하기 시작해 그와 모종의 관계를 맺을 때, 비로소 그 책은 진정한 영향력을 발휘하게 된다. 그런 사람이라면 책을 내던지고 잊어버리는 대신 간직하고자 한다. 즉 필요할 때마다 독서와 경험을 거듭할 수 있도록 값을 치르고 산다. - 129



책을 두 번 읽어야 하는 이유


책은 읽을 때마다 다르게 다가올 때가 많다. 20대에 읽는 '어린 왕자'와 4, 50대에 읽는 '어린 왕자'는 분명 다르다. 나이뿐만 아니라 기분이나 장소에 따라 다르게 느껴지기도 하고, 또 올라갈 때 보이지 않았던 꽃이 내려올 때 보이는 것처럼 처음 볼 때는 보이지 않았던 것이 두 번째 볼 때는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헤세는 이렇게 당부한다.


어떤 책을 처음 읽으면서 깊은 인상을 받았거든 얼마쯤 지난 후에 꼭 다시 읽어보라. 두 번째 읽을 때 비로소 그 책의 진수를 발견하게 되고, 표면적인 것에 불과했던 긴장감이 사라지면서 글 고유의 힘과 아름다움이라 할 내면의 가치가 모습을 드러내는데 얼마나 경이로운 경험인지 모른다. 그리고 이렇게 두 번을 즐겁게 읽은 책이라면 비록 책값이 만만치 않을지라도 반드시 구입하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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