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과연 지식인일까?
세상에 종말이 찾아왔는데, 나는 살아남았다면 도대체 뭘 해야 할까? 대형할인마트 안에 둥지를 틀면 한동안 그럭저럭 버틸 수도 있을 것이다. 대형할인마트에는 인간이 필요로 하는 웬만한 것들을 다 있으니까. 문제는 그다음이다. 가진 것들을 다 소비한 후에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답은 간단하다. 문명을 재건해야 한다. 문제는 '재건할 수 있는 방법을 모른다'는 사실이다.
우주생물학 분야를 연구하는 과학자이자 유명한 과학저술가인 루이스 다트넬은 이 책 <사피엔스가 알아야 할 최소한의 과학지식>에서 핵전쟁이나 천재지변으로 인해 대재앙을 맞이한 인류를 가정하고,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무엇이 제일 필요한지 살펴보면서 인류의 지식 발전 과정을 흥미롭게 정리하고 있다. 의식주에서부터 의약품, 전력, 운송, 커뮤니케이션, 시간과 공간 등 사회 재건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핵심 지식과 과학 기술을 서술한다.
한마디로 이 책은 살아남은 인류를 위한 '문명 리부팅을 위한 안내서'인 동시에 무엇이 인류의 문명을 지탱하고 있는지를 말해주는 '설명서'이다. 예를 들어, 내연기관이나 시계 혹은 현미경이 인류 문명에서 갑자기 사라진다면 그것들을 만드는 방법을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더 기본적인 차원으로 내려가 농사를 짓고 옷을 짓는 방법은? 이 책은 바로 그 방법들을 알려주면서 인류가 과학과 기술의 지식을 쌓아온 역사를 돌아볼 수 있도록 한다.
종말적 재앙이 일어난 다음에도 당신이 두 발로 서 있다면 생존자겠지요.
하지만 그 후로 얼마동안 살아남느냐는
당신이 무엇을 알고,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 영국 공수특전단의 생존 전문가 '존 로프티 와이즈먼' -
종말 후의 과학자들이
응용되는 원리를 완전히 이해하고,
그에 따른 설계를 이론적으로
완벽하게 그려내더라도
실제로 작동되는 원형을
만들어내지는 못할 수 있다.
나는 이런 현상을 '다빈치 효과'라 칭한다.
르네상스 시대의 위대한 발명가,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머릿속으로 상상한
비행기를 비롯해
수많은 기계장치의 설계도를 그렸지만
실질적으로 제작된 기계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다빈치가 시대를 지나치게 앞서갔다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다시 말하면 정확한 과학적 이해와
독창적인 설계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뜻이다.
그런 기계를 제작하는데 필요한 재료와
그 기계를 움직일 수 있는 동력원도
그에 걸맞은 수준으로 있어야 한다.
그런데 내가 이 책을 읽으면 제일 먼저 든 생각 하나는 '아, 나는 살아남지 못하겠구나'하는 거였다. 그리고 동시에 이런 생각도 들었다. '나는 공짜로 세상을 사고 있구나.' 이 세상을 위해 아무런 기여도 하지 못한 채 문명의 이기를 누리고만 사는 느낌.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누리며 살고 있지만, 그것이 어떻게 당연할 수 있겠는가. 누군가의 치열한 노력의 결과인데 말이다.
물론 그 과정에는 저마다의 욕심과 욕망도 얽혀 있다. 저자는 말한다. 역사가 지긋지긋한 사건의 반복이라면, 테크놀로지의 역사는 발명의 반복에 불과하다고. 유용한 도구들이 연이어 발명되면서 우수한 것만 살아남고 열등한 것은 사라졌을 것이라고 우리는 쉽게 생각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고 말한다.
발명의 성공을 결정하는 요인은 기능의 우월성만은 아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압축식 냉동기와 흡수식 냉동기는 거의 같은 시기에 개발되었지만,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고 지금까지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압축식 냉동기이다. 당시 갓 태동해서 수요의 확대를 간절히 바랐던 전기회사들이 압축식 냉동기를 적극적으로 지원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오늘날 흡수식 냉동기가 거의 사라진 이유는 설계의 본질적인 한계 때문이 아니라, 사회적이고 경제적인 요인 때문이다. 널리 사용되는 제품은 제조업자들의 판단에 가장 큰 이윤을 보고 판매할 수 있는 제품이며, 이윤의 폭은 당시에 갖추어진 기반 시설에 크게 소음이 없는 흡수식 설계보다 전기 압축기를 사용하고, 압축식 냉동기의 테크놀로지적 우월성보다 미리 선택 방향이 결정된 것이나 다를 바 없었던 1900년대 초의 이상한 사회경제적인 환경과 관련이 깊다. 따라서 종말 후에 회복을 시도하는 사회는 현재의 냉동기와 다른 길을 택하는 편이 좋다.
문명을 재건해야 하는 상황이 온다면, 우리는 보다 나은 선택을 할 수 있을까? 확신할 수 없다. 그때도 똑같이 특정 집단의 이기심, 욕심이 큰 작용을 할 테니 말이다.
저자는 이 책의 도입부에서 1058년 레너드 리드가 쓴 <나는 연필입니다(I, pencil)>라는 논문의 충격적인 결론을 언급한다. "원료를 제공하는 곳과 생산수단이 따로따로 흩어져 있기 때문에, 연필이라는 지극히 단순한 도구를 만들어 낼 수 있는 능력과 자원을 동시에 보유한 사람은 지상에 단 한 명도 없다는 것이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묘한 안도감 느껴졌다. 각자 아는 것이 다르고, 가진 것이 다르다는 건 모두가 쓸모있는 존재가 된다는 뜻이니 말이다.
그렇다면 지극히 문과적인 정신세계를 가진 나는 문명재건을 위해서 뭘 할 수 있을까? '잘하고 있다'라고, '포기하지 말라'라고 선동하고 응원하고 칭찬하는 건 잘할 수 있을 것 같다. 칭찬은 고래만 춤추게 하는 게 아니라 문명재건에도 큰 역할을 하게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