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영원한 베스트셀러 우화(동화)
류시화 작가의 인터뷰에서 이런 내용을 본 적이 있다. 인도 여행 중에 힌디어를 배우는데, 새로운 단어를 하나 배우고 나니까 그 단어가 일상 대화에서 자주 들리더란다. 그동안 없었던 단어가 새로 생겨난 건 아니다. 늘 거기에 있었는데, 자신의 귀가 듣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다가 마침내 알아듣게 된 것뿐이다. 그는 이 경험담을 말하면서 여행이란 ‘세상에 대한 이해의 원, 인식의 원, 정신의 원을 넓히는 일’이라고 표현했다. 새로운 세상을 보기 위해 여행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보는 새로운 눈을 뜨기 위해 떠나는 것이 여행이라는 것이다.
독서도 일종의 여행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그 여행을 통해서 ‘내 세상, 내 정신의 원’을 좀 더 크게 만들면서 새로운 안목에 눈을 뜬다. 오늘 소개할 책은 류시화 작가의 인도 우화집 <신이 쉼표를 넣은 곳에 마침표를 찍지 말라>이다. 그는 ‘작가의 말’ 첫 구절에서 ‘프랑스 소설가 마리암 마지디’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나는 이야기를 수집하며 살고 싶었다. 멋진 이야기들을. 수집한 이야기들을 가방에 넣고 다니다가 적당한 순간이 오면 주의 깊게 듣는 귀에게 선사하게 싶었다. 마법에 홀린 듯 빠져드는 눈을 보고 싶었다. 모든 이의 귓가에 이야기의 씨를 뿌리고 싶었다.
그러면서 자신도 이야기를 지어내는 작가가 아니라 이야기를 모으는 작가가 되고 싶었다고 말한다. 소박한 문체로 삶에 대한 통찰을 전하는 이야기들을 모으고 싶었다고. 사실 이와 같은 작업을 먼저 한 유명한 사람이 있다. 바로 독일의 '그림형제'다. 당시 그림형제가 펴낸 동화집은 성경과 함께 독일의 거의 모든 가정에서 다 가지고 있을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고 한다. 생각해 보면 우화나 전래동화가 없는 나라는 없다. 오래전에 동화를 주제로 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한 적이 있었다. 그때 독일과 일본으로 취재를 가서 유명 작가들에게 이런 질문을 했었다.
인류는 왜 이야기를 만들었을까요?
그때 들었던 대답 중에 2가지가 기억난다. 첫 번째는 '이야기는 생존의 수단이었을 것’이라는 대답이었다. 삶을 먼저 살아본 사람들이 그들의 경험을 다음 세대로 전달하는 하나의 수단으로써 이야기를 선택했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실제로 대부분의 전래동화나 우화에는 교훈과 지혜를 때로는 노골적으로 때로는 은근슬쩍 담아 놓고 있다. 그렇다면 왜 음악이나 미술이 아닌 이야기였을까? 도구가 없어도 되니까. 긴긴밤 어둠 속에서도 가능하니까 훨씬 효율적이었을 것이다.
두 번째는 '답을 알기 위해서가 아니라 느끼고 싶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라는 답변이었다. 우리가 음악을 듣는 건 알기 위해서가 아니라 느끼기 위해서다.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울림, 감동, 공감... 뭔가를 느끼고 싶어서 이야기를 만들고 나누었을 것이다.
어느 작가가 이런 말을 했다. ‘어려운 것을 쉽게. 쉬운 것을 깊게. 깊은 것을 재미있게. 재미있는 것을 진지하게’ 쓴 것이 동화고 우화라고. 이 책 <신이 쉼표를 넣은 곳에 마침표를 찍지 말라>를 읽어보면 이 말이 실감 난다. 이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많은 이야기는 대부분 ‘판차탄트라’와 ‘마하바라타’에서 가져온 것들이라고 한다. 판차탄트라는 고대 인도의 설화집이다. 원본은 없어져서 현존하지 않고, 원작자도 연대도 불명이다. 다만 현자 ‘비슈누샤르만’이 3명의 왕자를 교육하기 위해서 기원전 1500년부터 전해져 온 우화들을 모은 책이라고 알려져 있다. 이 책이 아랍과 그리스어로 번역되고, 집시들에 의해 서양으로 전파되면서 이솝우화의 모태가 됐다고 한다. 때로는 탈무드에 비견되기도 한다. 그리고 <마하바라타>는 <라마야나>와 <바가바탐>과 함께 인도의 3대 고대 서사시 가운데 하나이다. “인생의 모든 질문에 대한 해답이 마하바라타에 있다”라고 할 만큼 방대한 분량이다. 인간과 신, 삶과 죽음, 선과 악에 관한 내용이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를 합친 것의 10배가 넘는 분량으로 기록돼 있다고 한다.
어느 마을에 두 여인이 살았다. 한 여인은 아름다운 데다가 옷을 잘 입어서 가는 곳마다 관심을 집중시켰다. 모두가 그녀와 얘기하고 싶어 하고, 그녀에게 질문을 던지고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또 다른 여인 역시 매력적인 면이 있었지만 사람들은 그녀의 존재를 알아차라지 못했다. 아무도 가난한 그녀에게는 관심이 없었다.
"하루만 당신의 옷을 빌려 입고 당신과 함께 거리를 걸으면 안 될까요? 그러면 당신에게 관심을 갖고 다가온 사람들이 나에게도 관심을 가질 것이고 나도 사람들에게 내가 가진 것을 나눠줄 수 있거든요."
아름다운 여인은 그녀의 청을 기꺼이 들어주었고 다음 날 두 여인은 매력적인 옷을 입고 함께 거리고 나섰다.
그날 이후 두 여인은 가장 친한 친구가 되었으며 떨어질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 오늘날까지도 그 둘은 함께 세상을 걸어가고 있다.
초라한 옷을 입은 여자의 이름은 '진리'이다. 그리고 모두가 좋아하는 매력적인 옷을 입은 여자는 '이야기'이다. 내용물의 질이 떨어지지만 않는다면, 매력적인 이야기의 옷을 입히게 되면 관심을 모으기 쉽다. 그래서 마케팅에서도 홍보에서도 '스토리'에 열을 올리게 된다.
이 책에는 모두 100편의 이야기가 수록돼 있다. 그 가운데 몇 가지만 소개하자면 <원숭이가 공을 떨어뜨린 곳에서 다시 시작하라>는 이 책의 제목과 관계있는 이야기다. 영국인들이 인도를 식민 통치할 때, 콜카타 외곽에 인도 최초의 골프장을 만들었다. 너무나 멋진 골프장이었지만 원숭이가 문제였다. 사람들이 골프를 칠 때마다 원숭이가 나타나서 골프공을 집어가서 마음대로 여기저기 던져놨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원숭이를 통제하기 위해서 울타리도 쳐보고, 총도 쏴보고... 별별 시도를 다 했지만 소용없었다.
고민 끝에 새로운 규칙을 만들었다. 원숭이가 공을 떨어뜨린 자리에서 경기를 다시 시작한다! 애써 그린 위에 올려둔 공을 원숭이가 집어가서 풀숲에 던질 수도 있고, 벙커에 빠진 공을 원숭이가 집어 와서 홀컵에 떨어뜨릴 수도 있다. 불평 금지. 그 상황을 받아들이고 거기서 다시 경기를 시작하기로 했다. 그 덕분에 사람들은 훨씬 재밌게 경기를 즐기게 됐다고 한다. 삶에서 일어나는 일이 그 골프장에서 일어나는 일과 별반 다를 바 없다. 어느 날은 운이 좋았다가, 어느 날은 나빴다가 한다. 저자는 이 이야기를 들려주며 말미에 이런 글을 덧붙였다. “삶은 우리의 계획을 따르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더 놀라운 일이 가능하다. 어느 소설가가 썼듯이 지금보다 더 나빠질 수는 없다고 생각할 때 더 나빠지고, 더 좋아질 수 없다고 생각할 때 더 좋아지는 것이 인생이다. 신이 쉼표를 넣은 곳에 마침표를 찍지 말아야 한다.”
하나만 더 소개하자면 <마음의 독>이라는 제목을 가진 이야기다. 고대 어느 왕국에 '갸노다야'라는 왕이 있었다. 그는 태평성대를 열어가는 성군으로 칭송을 받고 있는 어진 왕이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복통으로 고통을 받기 시작했다.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지 싫어 남들에게 알리지 않고 인도 전통의 의학서인 ‘아유르베다’의 처방전으로 치료하고자 했다. 하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화를 참을 수 없었던 왕은 아유르베다에 속하는 모든 책을 모아 모조리 불살라 버리려고 했다. 그때 의학의 신 '단반타리'가 늙은 성직자로 변신해서 그를 치료해 준다. 그리고는 이런 말을 해준다. “완벽한 의학과 약 못지않게 그것을 받아들이는 환자 자신의 상태가 중요합니다. 지금 당신의 입안에는 세균으로 가득한 충치가 몇 개 있습니다. 따라서 약을 먹어도 세균에 오염되어 독으로 변하기 때문에 아무 효과가 없었던 것입니다.”
자기 입안의 세균이 약을 독으로 바꾼 것이다. 같은 물도 소가 물을 마시면 우유가 되지만, 뱀이 물을 마시면 독이 되는 것처럼 원인이 나에게 있을 때가 훨씬 더 많다. 세상을 탓하기 전에 또 남을 탓하기 전에 먼저 나를 돌아볼 일이다.
이런 우화를 읽다 보면 ‘속담’이 생각난다. <바위>는 “손은 부지런하고 눈은 게으르다”는 옛말이 생각나고 <너의 아들과 내 염소의 차이>는 “남의 염병이 내 고뿔만 못하다”는 말이 생각난다. 또 <붓다와 마라의 은퇴 선언>이나 <힘든 직업>은 “남의 신발을 신고 걸어보기 전에는 그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는 말이, <꿈풀이>는 “아 다르고 어 다르다” 는 말이 떠오른다. 어쩌면 우화나 동화를 한 줄로 축약해서 가르침의 핵심만 담아낸 것이 ‘속담’이 아닌다 깊다.
우화 속에 등장하는 다양한 사람들을 보면 ‘시대는 변해도 사람은 안 변한다’는 게 실감 난다. 그리고 아주 쉬운 이야기지만 그 속에 우리 삶에 필요한 모든 가르침이 다 담겨 있다는 생각도 든다. 이 책은 한 번에 휘리릭 읽지 말고, 가지고 있다가 스트레스 쌓일 때, 세상일이 내 뜻대로 안 될 때, 인생이 뭔가 싶을 때, 잠이 안 올 때... 하나씩 펼쳐서 읽어도 좋다. 어린 자녀가 있으면 아이 재우면서 하나씩 읽어줘도 좋다.
마지막으로 '지혜를 파는 소년'이 하는 말을 전해주며 마무리하고자 한다. 힌디어 속담이다. “아비 나히 카비 나히. 지금이 아니면 언제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