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을 위한 동화
맵고 자극적인 음식이 당기는 날이 있는가 하면 심심한 음식이 생각날 때가 있다. 미친 듯이 달리고 때려 부수는 물질문명의 정수 같은 블록버스터가 보고 싶은 날이 있는가 하면, 조용하고 잔잔한 영화가 보고 싶은 날도 있다. 책도 그렇다. 도서관에서 읽고 있으면 혹은 카페에서 커피 마시며 읽고 있으면 그 자체로 휴식이 되는 것 같은 착한 책을 읽고 싶을 때가 있다. 베아트릭스 포터의 '피터래빗 시리즈'가 그런 책이다. 게다가 이 책은 예쁘다. 컬러 삽화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진다.
베아트릭스 포터는 1893년, 가정교사의 5살짜리 아들 '노엘무어'가 아팠을 때, 노엘을 위로해 주고자 그림 편지를 썼는데 그 편지에 처음으로 피터래빗이 등장했다고 한다. 이후 베아트릭스를 이를 출판하기 위해서 열심히 알아봤지만, 모두 거절당했다. 그리고 1902년 프레더릭 원 출판사에서 삽화를 컬러로 바꾸는 조건으로 출판을 했고, 나오자마자 대박을 기록했다.
이 책에는 베아트릭스 포터가 생전에 출판했던 23편의 ‘피터 래빗 시리즈’와 함께 미출간작 4편이 모두 담겨 있다. 의인화된 동물들이 펼치는 스토리는 단순하지만, 어른을 위한 동화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현실을 많이 반영하고 있다. 등장인물들은 동물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우리 주변 어디에선가 본 사람들의 모습과 묘하게 오버랩된다. 생쥐 티틀 마우스 아줌마는 결벽증 있고, 가난한 글로스터의 재봉사는 성실하지만 찢어지게 가난하다. 또 오리 제미마는 어리석고, 여우 신사는 음흉하다. 올빼미 브라운 할아버지는 불로 소득으로 살아가고, 약삭빠른 고양이 타비타 드위칫은 다른 가게가 없어지자 슬쩍 물건 값을 올린다. 그래서 아이뿐만 아니라 어른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사납고 못된 토끼 이야기
이 토끼는 사납고 못된 토끼예요
야만적인 수염 좀 보세요
발톱과 치켜 올라간 꼬리는 또 어떻고요.
이 토끼는 아주 순한 토끼랍니다.
엄마토끼가 당근을 주었네요.
못된 토끼가 당근을 먹고 싶어 해요.
하지만 "나도 좀 줘"라는 말도 없이
빼앗아 가 버리네요.
그리고 착한 토끼를 아주 사납게 할퀴네요.
착한 토끼는
슬금슬금 도망가서 구멍 속에 숨어요.
슬퍼하면서.
이 사람은 총을 가진 아저씨예요.
아저씨는 벤치 위에 뭔가 앉아 있는 것을 보아요. 아주 재미있게 생긴 새라고 생각하지요.
아저씨는 살금살금 나무 뒤로 다가와요.
그리고 총을 쏘지요. 탕!
총을 들고 급히 달려간 아저씨가
벤치에 발견한 것은 바로 이거예요.
(벤치 위에는 당근과 꼬리만 놓여 있다.)
착한 토끼가 구멍에서 나와 밖을 내다봤을 때, 못된 토끼가 혼이 나간 상태로 도망가는 모습을 보게 된다. 꼬리도 수염도 없이.
길고 짧은 27편의 이야기를 읽는 동안 피식 웃음이 나오기도 하고, 내 주변에 있는 누군가가 생각나기도 하고, 가슴이 몽글몽글해지기도 한다. 스트레스 지수 치솟거나 사는 일이 팍팍하게 느껴질 때 피터 래빗과 함께 잠시 동화 속으로 여행을 떠나도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