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은 감정과 지능을 가진 존재
'아이들은 동물을 좋아하고, 청년들은 사람을 좋아하고, 노인들은 식물을 좋아한다'고 한다. 동의한다. 나를 포함한 내 주변의 사람들은 십중팔구 이 수순을 밟아가니까. 물론 이유는 모르겠다.
언제부터였을까? 나무에 자꾸 눈길이 간다. 그들의 삶이 궁금하다. 벚꽃이 피지 않아도 벚나무를 알아보고, 개나리가 피지 않아도 개나리를 알아볼 수 있는 안목을 갖추고 싶다. 그리고 수령이 오래된 나무를 만나면 '긴긴 세월 이 자리에 무엇을 지켜봤을까?' '제 안에 담고 있는 기억의 무게가 얼마나 될까?' 상상해 보게 된다. 그래서 식물에 관한 책도 관심을 갖고 읽게 된다.
스테파노 만쿠소와 알렉산드라 비올라의 <매혹하는 식물의 뇌>는 우리가 가진 식물에 대한 잘못된 고정관념, 편견을 깨뜨려주고 새로운 안목을 열어준다. 다만 저널리스트이자 방송작가가 함께 쓴 책이어서 그런지 단편적인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지만, 부담없이 읽으면서 식물의 세계에 대한 작은 문을 하나 열 수 있다.
본격적인 이야기를 하기 전에, 이 책의 추천사에 이정모 서울시립과학관장은 이렇게 적었다. "나무와 상어 중에 어느 것이 먼저 생겼느냐고 물으면, 열에 아홉은 나무라고 대답한다. 사실은 반대다. 상어는 4억 년 전에 생겼지만 나무는 3억 5천만 년 전에야 생겨났다."
'엥? 이게 무슨 말이지? 식물이 지구에 먼저 오지 않았다고? 상어가 먼저 왔다면, 상어는 어떻게 숨을 쉬었지?' 챗GPT에게 물었더니 친절하게 설명해 준다. 우리가 마시는 산소의 기원은 풀이나 나무가 아니라 '시아노박테리아'라는 미생물이라는 것이다. 20억 년 전, 그들은 이 땅에 와서 지구의 ‘숨’을 틔웠다. 현미경으로 봐야 겨우 볼 수 있는 그 작은 생명체는 식물처럼 광합성하여 산소를 만들어내는 능력을 지녔던 것이다. 인류의 모든 생명체는 이 작디작은 미생물에게 빚을 진 셈이다.
물론 계산을 제대로 하면, 인류는 식물에게 엄청난 빚을 지고 있다. 사람이 없어도 식물은 아무 문제 없이 살아갈 수 있지만, 지구 생명체의 99.7%를 차지하는 식물이 없다면 인류는 생존하기 힘들다. 식량에서부터 의약품, 에너지, 설비 등 식물에 의존하지 않는 것이 없다. 심지어 우리가 사용하는 화석연료는 '태양에너지가 지하에 축적된 것에 불과하며, 그 에너지는 다양한 지질 시대 동안 식물이 광합성을 통해 생물권으로 옮겨 놓은 것'이라고 한다. 한마디로 화석연료는 '유기 퇴적물'이라는 것이다. 결국 인류는 숨쉬기에서부터 생활 전반을 식물에 의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모듈 구성체로 진화한 식물
고착생활을 택한 식물은 살기 위해 땅, 공기, 태양으로부터 모든 것을 얻어내는 능력을 진화시켰다. 이에 반해 동물은 식물이나 다른 동물을 잡아먹어야 했으므로 달리기, 날기, 수영 등과 같은 다양한 운동능력을 발달시켰다.
고착생활을 하는 식물은 동물의 먹이가 될 수밖에 없어 외부의 공격에 소극적으로 저항하는 방법을 개발해 냈다. 그것은 바로 모듈성이다. 식물의 몸은 여러 개의 모듈로 구성되어 있다. 그중에서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건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필수불가결한 것도 없다. 이러한 모듈 구조는 동물이 흉내 낼 수 없는 장점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듈화 된 조직의 첫 번째 이점은 몸의 일부분을 초식동물에게 뜯어 먹혀도 생명에 지장이 없을 뿐 아니라,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개인을 뜻하는 'individual'은 라틴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나눌 수 없는 존재'라는 뜻이다. 부정의 접두어 in과 '나눌 수 있다'는 뜻의 'dividuus'가 결합된 말이다. in + dividuus = individuum. 개인은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철학적으로 보자면 '사람은 누구나 독립성과 완전성을 가진 존재'라는 의미이겠지만, 생물학적으로 보자면 '특정 장기가 손상되면 죽을 수도 있는 존재'라는 의미가 된다. 하지만 식물은 다르다. 모듈화 구조를 갖춘 덕분에 신체 일부를 잃어도 치명적인 손상을 받지 않는다. 집에서 키우는 상추를 뜯어먹으면 며칠 후에 또다시 파릇파릇 잎이 자라날 뿐이다.
뿐만 아니라 식물은 보고, 듣고, 느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의사소통도 할 수 있고, 곤충의 공격을 받으면 화학적 억제물질을 분비하여 쫓아내기도 한다. 문제가 생겼을 때 대처하고 해결할 수 있는 지능이 있다는 뜻이다. 심지어 친척도 알아본다.
식물은 모든 침입자들로부터 자신의 공간을 지키기 위해 지속적으로 투쟁한다. 식물은 영토방어를 위해 에너지의 상당 부분을 지하부에 투자한다. 식물은 무수한 뿌리를 뻗어 마치 군대와 같이 토양을 점령하고 이웃 식물들에게 영유권을 주장한다. (...) 그러나 모계가 같은 식물들이 한 화분에서 자라는 경우에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그들은 뿌리를 덜 뻗으며 제한된 공간에서 공존하고, 남는 에너지를 지상부에 투자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난초 같은 사람
정직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거짓말쟁이인 사람도 있듯이, 식물 세상에도 정직한 식물이 있는가 하면 사기꾼 같은 식물도 이다. 한 꽃을 두 번 방문하는 것은 꽃과 벌에게 모두 낭비다. 두 번째 방문한 꽃에는 꽃가루가 없을뿐더러, 벌에게 대접할 꿀도 없기 때문이다. 이런 불상사를 막기 위해서 '루핀'이라는 꽃은 효과적인 전략을 개발했다. 벌이 한 번 방문하고 나면 꽃잎 색깔이 파란색으로 변한다. 벌이 헛수고하지 않도록 도와주면서 수정을 효과적으로 하는 것이다.
그런데 난초류의 약 3분의 1은 벌에게 사기를 친다고 한다. 난초에게 사기당한 벌들은 아무런 대가도 얻지 못한 채 꽃가루만 운반하게 된다. 난초의 일종인 오프리스 꽃은 벌의 암컷을 완벽하게 모방해서 수벌을 유혹한다. 결국 수벌은 진짜 암벌을 두고 오프리스와 교미를 시도하게 된다. 그때 오프리스는 수벌의 머리에 꽃가루를 붙여서 수분을 한다. 이럴 수가. 은은한 향기와 고아한 모습으로 선비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난초의 배신이다.
등잔 밑이 어두운 것인지 인류는 늘 식물 속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묘하게 식물에 대한 연구는 많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다윈 부자를 빼고 나면 유명한 학자도 그리 많지 않다. (물론 나만 모르는 것일 수도 있다.) 근래에 식물에 대한 연구가 많이 이루어지는지 관련 도서들이 많이 쏟아진다. 그리고 접하면 접할수록 '식물이 동물보다 더 고등생물은 아닐까?'하는 생각마저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