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버펑크를 왜 게임에서 찾나 현실에 있는데. 아무튼 삶은 이어진다.
2020년은, 인생이 언제나 그렇듯 슬프지만 유쾌하게 시작했다. 몇 개월째 백수생활은 처음에는 약간의 열패감을 안겨주었지만 이내 돈 있는 백수(그렇게 넉넉하지 않지만 그래도 있긴 있었다.)는 거의 지구 안에서 적수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신나는 직업이란 걸 깨닫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2020의 신년은 백수 된 김에 잉글랜드에서 맞이했다.
사실 출국하기 이전에 이미 연봉협상만을 앞두고 있는 회사가 있어서 영국에 계신 이모님 집에서 오랜만에 가족적인 휴식을 보내면서 천천히 연협을 진행하면 될 거란 계산을 가지고 출국하기도 했었다. 잉글랜드에서 연협이라니 생각만 해도 뽕이 차오른다.
나름 즐거운 여행이었으나 여행기가 아니니 이쯤 접어두고 결과적으로 입사 예정인 곳에는 가지 않았고, 코로나가 한국에도 찾아왔다. 귀국길에 홍콩을 경유하는 루트에 반나절 정도 시간이 있어 시내 관광을 조금 할 참이었는데 영국에서부터 tv에 조금씩 나오기 시작한 '정체를 알 수 없는 우한발 폐렴 바이러스'가 불안감을 고조시켰다. 그리고 홍콩에 도착한 당일 뉴스에서 [중국 우한에서 입국한 뒤 호흡기 증상이 있어 격리된 여성이 격리조치를 무시하고 무단 퇴원, 홍콩 거리를 활보 중이나 당국에서 아직 잡아내지 못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정체불명의 바이러스 한국 1호 환자가 되기 싫어 공항의 후미진 구석에서 낮잠을 잤다.
애석하게도 팬데믹이 오던 말던 삶은 이어지고 당면한 과제들은 많았다. 1월 중순에 귀국 이후 다시 회사를 알아보고, 몇 번의 인터뷰를 거쳐 3월에 어니스트펀드라는 핀테크 스타트업에 합류하게 되었다. 이즈음에는 한국에도 코로나가 창궐하기 시작했다.
팀은 나를 포함한 신규 입사자가 많은 팀이었고 많은 고민 끝에 합류한 보람이 있을 정도로 좋은 사람들이 많았다. 본래 마케터로 일했지만 영상제작에 치중한 포지션으로 옮긴 첫 직장. 많은 도움을 받아 브랜딩에 관련된 영상 작업들을 이어나갔다. 마케팅을 하면서 조금은 소홀히 생각하던 브랜드와 브랜딩 그리고 커뮤니케이션이라는 요소들에 대해 집중적으로 고민하는 시간들은 분명 배울 것이 많았고, 다시 말해 성장할 수 있는 시간을 보냈다. 시간이 흐르면서 마케팅에 관련된 작업도 조금 늘어갔지만... 원래 인생은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또 그리 싫지도 않기도 하고.
코로나로 인한 투자자산들의 폭락과 반등 그리고 무한한 유동성 공급으로 현재 시장에서 P2P 모델을 가지고 있는 업체들의 상황은 그리 좋은 편이 아니다. 거기에 2020년에 예정된 제도화가 금감원의 옥석 가리기로 예정보다 훨씬 늦게 진행되고 있고, 필터링도 강도 높게 진행되고 있다. 업계 전체에 험난한 한 해였고 어니스트펀드도 항상 유쾌하기만은 힘든 시기였다. 그래도 아직 누군가 이 회사에 합류한 것을 후회하냐고 묻는다면? 아뇨, 후회하지 않습니다 라고 대답할 수 있다.
사이클링은 내 20대에서 가장 큰 부분 중 하나였다. 이미 고인물 반열에 올랐긴 했지만 2년 주기로 휴식기를 길게 가져 다시 새로운 열정을 불러일으키곤 했는데 19년이 마침 그 쉬는 해였다. 19년도 말에 처음으로 사이클링 팀에 들어갔다. 1년의 공백기 동안 음주와 문화생활 음식들을 즐기고 망가진 몸을 다시 담금질 하기 시작했다. 주식은 채소로 바뀌었고 식단과 생활습관을 과격하다 싶을 정도로 통제하는 생활로 돌아간 것.(나중에 다른 글을 통해 다루겠지만 사이클링은 생각보다 엄청난 절제를 요구하는 스포츠이다.)
겨울의 오프시즌에도 주당 10시간 이상, 본격적인 시즌에는 12-15시간의 트레이닝을 소화하며 혹시나 열릴지 모를 대회를 준비했었다.(국내 아마추어 레벨에도 MCT라는 리그가 존재한다.) 동호인으로서 오래 활동했지만 팀에 들어간 경험은 또 처음이라 생소하기도 하고 기시감을 느끼기도 하며 꽤 높은 레벨에서 달릴 수 있는 몸을 만들었다. 하지만 코로나는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고 방역단계가 낮을 때에도 위험부담을 감수하고 싶지 않은 지자체와 연맹은 대회를 연기하거나 열지 않는 것을 원했다. 그들을 비난할 생각은 없다. 할 일을 하는 사람들이니. 덕분에 20년은 그 많은 운동량이 무색하게 조금 이른 시즌오프로 마무리되었고 내 몸에 아직 남아있던 가능성을 확인하는 정도로 만족해야했다.
오랜만에 다시 직장인으로 돌아간지 얼마 안 된 4월, 집안 사정상 어머니와 아버지는 평택으로 내려가시고 갑작스레 독립을 하게 되었다. 주변 지인들에게 농담으로 '방출'되었다 할 정도로 갑작스럽지만 아직 혼자 살아본 경험이 없는지라 또 그렇게 싫지만도 않았다. 서울로 갈까 싶었지만 살인적인 월세와 협소한 공간에 학을 떼며 원래 살던 곳 근처지만 역에 최대한 가까운 방을 얻었다.
독립한 이후 나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된 사실들도 몇 가지 있다. 놀러 온 몇 친구들이 의외라고 생각할 정도로 집은 심플하게 잘 구성되어 있고 나 자신은 집안일을 사실 잘하고 은근히 즐기기까지 한다. 함께 살 때 어머니를 좀 더 도와드릴걸 하는 생각도 들긴 했지만 원래 떨어져 살아야 효자가 된다고 하지 않는가. 생전 안 하던 전화를 부모님께 일주일에 적어도 한 번은 드리고, 30분을 넘게 통화하기도 한다. 역시 깨달음은 결핍에서 오는가. 그리고 조금 우습게도 이 부지런함은 내가 운동을 얼마나 열심히 하냐 와 매우 강력하게 연동되어 있음도 알게 되었다.
재작년쯤 구도와 색상에 대한 공부를 위해 시작한 사진을 업무에서도 조금씩 활용하기 시작하면서 포토그래피라는 장르를 대하는 태도가 조금은 달라졌다. 아직 이걸 메인 작업으로 가져가야 하는지에 대한 확신은 없으나, 분명 아직 즐거운 취미고 개인작업을 하기에는 영상보다 훨씬 가볍게 많은 사이클을 가져갈 수 있어 선호한다. 조금의 부작용으로는 영상 개인작업을 하기가 점점 귀찮아진다는 것인데 일단 어쩔 수 없다. 하기 싫은 작업 억지로 해봤자 맘에 안 드는 결과물만 나오더라. 아, 폰으로 해도 충분하지만 새해는 풀프레임 카메라를 사버렸다.
지겨운 코로나 얘기는 건너뛰려 했지만 마지막으로라도 언급을 하자면, 사이버펑크는 지금의 이 세계가 아닐까 싶다. 마스크 없이는 바깥출입을 할 수 없고, 개인은 고립되며, 관계는 해체된다. 경제는 무너져가고 미친 유동성으로 머니게임에 몰두하는 사람들. 이전과는 상상할 수 없는 새로운 문화들이 계속 발생하는 곳. 하루하루 개박살 나고 있지만 '이미 늦음 ㅋㅋ'이 정설이 되어버린 지구 환경. 반쯤 미친 기업인이 대통령이 되더니 의회에 지지자들이 총을 들고 난입하는 초강대국. 사실 우리는 이미 사이버펑크 안에 살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사이버펑크 장르에서 가장 근본이 되는 주제 중 하나는 '인간성'이기도 하다. 인간성에 대한 물음과 그 가치들이 지속되는 이유는 그저 삶이 계속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 인간답다고 믿는 것을 찾기 위해 일을 하고, 몸을 움직이고, 새로운 사람과 장소를 찾아가는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