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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혜 Jan 15. 2024

무계획의 여행 계획

긴급 여권과 비자가 필요한 상황


나는 순수하게 여행을 목적으로 해외에 나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해외 출장은 좋아한다.

그 차이는 뭘까?

이번 첫째 아이와 함께한 대만 여행의 수난을 통해 그 이유를 명확하게 알게 되었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해외여행에 대한 욕구들을 표현한다. 최근 첫째 아이의 불만은 점점 커져갔다.

고등학생인 아이는 해외 다녀온 친구들이 조그만 기념품이나 먹을 것을 사서 나눠 줄 때마다 집에 와서는 ‘나도 가고 싶다’며 나에게 압력을 가했다.

마음의 숙제처럼, 언젠가 시간이 되면 가야지 하며 나의 미루고 미루었다. 이제 고 2가 되면 더욱 바빠지고 그러면 어떻게든 한번 다녀와야, 불평이 잦아들 것이다.  그래서 타이베이 여행을 결정했다.

업무로 바쁜 상황에서 비행기를 대충 검색해서 예약했다. 연말이라 호텔 가격도 거의 3배나 비쌌다. 겨우 검색해서 26만 원 원대를 찾아 예약했다. 혼자 출장 가면 로밍 서비스를 받는데 아이와 같이 사용해야 하기에 와이파이 도시락을 예약했다. 그게 전부였다. 내가 준비하는 여행의 계획.

이 세 가지를 준비하면서도, 검색과 예약과 결제를 해야 하는 일이 너무나 귀찮았다.

내가 여행을 싫어하는 이유가 명확해졌다. 무엇을 해야 할지 계획하고, 검색하고 구매해야 하는 제반의 일들이 나는 너무나 하기 싫다.

반면 출장은 어디에 가야 하고, 대략 어느 곳에 머물러야 할지, 며칠을 머무를지 알 수 있다. 업무를 마치고 나면 반나절 정도 주위를 둘러보거나, 동네를 다니며 커피 한잔 하는 것으로 난 행복감을 느낀다.

이렇게 오롯이 내가 책임지고, 무언가 검색하고 예약하고, 결정하는 것은 참 귀찮다.  

그렇게 출발 일날 저녁 먹고 느지막이 공항으로 출발했다. 저가 항공이라 거의 저녁 12시 비행기였다. 공항에 9시 50분에 도착해 10시에 문을 닫는 와이파이 도시락을 가장 먼저 찾고, 체크인을 위해 카운터 앞에 긴 줄을 기다렸다. 오랜 기다림 끝에 드디어 도달한 체크인 카운터, 우리 순서가 되었다.  

항공사 직원이 여권을 보더니 대만은 6개월 이상 여권 유효 기간이 남아야 수속이 가능하다면서 체크인을 해줄 수 없다고 한다. 나의 여권 만료일은 2024년 6월 20일이다. 지금이 12월 28일이니 6개월 넘게 남은 거 아닌가? 계산해 보면, 6개월에서 8일이 모자란다. 6월이 나까 쉽게 1월 부터해서 6개월 남았겠구나 생각했다. 결국 아이와 나는 비행기를 타지 못했다. 아이는 울먹이고, 나는 그 순간 비행기 일정이 변경 가능하고 환불 가능한지 알아보기 바빴다. 저가 항공이라 환불이나 변경이 안된다. 빠르게 정리고 있는 상황에 아이가, 공항에서 긴급 여권을 발급할 수 있다는 것을 인터넷 검색하여 알려주었다.

찾아보니  인천공항에 외교부 긴급 여권 발급 카운터가 있었다. 10시가 넘어 카운터를 닫았다. 대기 번호표는 아침 8시부터 발급하고 시작은 9시부터 한다고 적혀 있다.   

결국 아이와 인천 공항 지하, 찜질방에서 하루를 묵고, 다음날 비행기 표를 검색해서 다시 대한항공으로 구매하였다.

 아침 7: 30 분에 외교부 카운터에 대기표를 빨리 받기 위해 줄을 섰다. 이미 한 명이 대기 중이다.

신청서를 쓰고, 바로 뒤, 즉석 사진 찍는 부스가 있다. 자는 둥 마는 둥 찜질방에서 밤을 새운 몰골로 보정 안된 현실 나의 사진을 찍고, 9시까지 기다렸다가 문이 열리자마자 여권 신청을 했다. 새로 산 대한 항공에서 딸의 불만을 기내식과 영화로 어떻게든 위로하고 우리는 타이베이에 도착했다.

고난의 시간은 끝이 아니었다. 긴급 여권은 현지에서 비자를 발급받아야 했다.

또 돈을 내고 비자를 발급받는데 IT 인프라라고는 없는 듯한 대만 담당자는 엄청나게 왔다 갔다 하면서 1명 비자 처리에 거의 30분이 소요되었다. 또 1시간 이상 기다려 비자를 발급받고 지친 몸으로 택시를 탔다.

인터넷으로 그나마 초 성수기 때 26만 원 정도 하는 숙소를 겨우 잡았는데 역시나 아주 이상했다. 숙소가 한 칸 한 칸 독립적으로 지어져 있고, 차고를 통해서 방으로 갈 수 있었다. 그리고 각각 차고 문을 닫게 되어 있는 시스템이었다. 한마디로 드라이브스루 러브호텔이었다. 아이가 호텔이 정말 이상하다고 했다.

아이가 잠시 화장실에 가는 동안 피곤한 몸을 침대에 누이고, TV를 켰다. 채널을 돌리다 벌거벗은 두 분의 역동적인 장면이 나와서 깜짝 놀라 채널을 빠르게 돌렸다. 근데 계속 다른 버전의 역동적 장면들이 나오는 채널이 연속되었다. 아이가 보기 전에 얼른 TV를 끄고 리모컨을 안 보이는 곳에 치워뒀다. 그렇게 찜질방에서 제대로 못 잔 피곤한 몸은, 그 이상한 방에서, 잠이 아주 잘 왔다.

다음날의 여정도 뭐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나의 무계획 여행은 현지에서 무엇을 할지는 그날그날 정했다.

고등학생인 디지털 세대 아이는 엄청난 검색 실력으로 가야 할 곳과 가고 싶은 곳을 알려주었고, 그날그날 찾아가기만 하면 되었다. 한해의 마지막 날 타이베이 101 타워의 멋진 불꽃놀이를 봐야 한다고 했다. 어디로 가야 잘 보이는지를 찾아 고민하고 있었다.

야시장의 한 식당에서 밥을 먹는데 옆에 친절해 보이는 현지인 부부가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분들에게 타이베이 101 타워의 불꽃놀이가 잘 보이고, 지하철을 타고 숙소로 가기 좋은 곳은 어디인지 물었다.

'바로 여기요' 그 식당에서 밥 먹고 길가로 나가기만 하면 바로 보이는 곳이니 멀리 갈 필요가 없다고 했다. 그리고 끝나자마자 아니면 끝나기 조금 전에 바로 뛰어가서 지하철을 타라고 했다. 역시나 현지인이 알려준 대로, 그곳은 불꽃놀이를 보기에 명당이었고, 끝나자마자 빠르게 달려가 우리는 북적이지 않는 여유 있는 지하철을 타고 호텔로 돌아왔다.

타이베이 현지인들은 정말로 친절하다. 길을 물으면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알려주려 하고, 지하철에서 길을 물으면 제대로 타나 내리나 계속 모니터링을 해준다.

무계획적인 사람으로서, 한 가지 확실한 계획은 무조건 현지에서 물어본다였다.

타이베이까지 오는 여정은 힘들었지만, 현지인에게 그때그때 질문해서 해결하고, 찾아가고, 구경하는 것은 또 다른 즐거움이었다.  현지인들이 알려주는 이벤트나, 장소는 인터넷에 나오지 않은 정보다.

그런 예상치 못한 곳을 보는 재미는 미리 계획하면 절대로 느낄 수 없다.

그동안 해외에 다녀온 친구들에게 받기만 한 아이는 친구들에게 줄 먹거리를  한 아름 샀다. 그 친구들은 아이가 가져갈 작은 선물만 기다리는 게 아니라, 왜 첫날 출발을 못하고 공항 찜질방에서 노숙을 했는지 스토리도 기다린다.

아이와 평생 동안 나눌 커다란 추억이 생겼다. 며칠이고, 친구들에게 엄마가 얼마나 무계획적이고 어이없는 상황이었는지 엄청나게 소문내고 다닐 것이다. 그럼에도 난 또 무계획의 여행을 계획할 것이다. 무계획의 여행은 예상하지 못한 고난도 있지만, 기대하지 않은 우연한 추억들로 넘쳐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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