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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혜 Jan 31. 2024

상대의 언어로 대화하는 것, 최고의 공감법

 스스로를 표현하는 언어는 언제나 옳다.

1인 기업, 프리랜서로서 나는 필요에 따라 공유 사무실을 사용하기도 하고, 집에서 하기도 하고, 스터디 카페에서 일을 하기도 하고, 도서관에 가기도 한다.

집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무한’이라는 이름의 스터디 카페가 있다.   

아이들도 가끔 이용하고 나도 멀리 가기가 귀찮거나, 집에서 일하면 게을러질 것 같은 날이면 애용하는 곳이다.

나는 이 스터디 카페의 이름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해 아이들에게 ‘대박’ 스터디 카페 라고 했다.

 “엄마, ‘대박’이 아니라 ‘무한’ 스터디 카페라고!!”

이유는 모르겠지만 난 이상하게 ‘대박’이라는 단어에 막혀 그 카페 이름이 매번 빨리 떠오르지 않는다.

아이들이 몇 번이나 정정해 줬지만 여전히 ‘무한’이라는 단어 보다 ‘대박’이라는 단어가 먼저 떠오른다. 몇 번이나 대박스터디 카페라고 하자 이제 아이들은 ‘대박스터디카페’라고 하면 그곳은 ‘무한 스터디카페’를 말하는 거구나 이해한다.

그렇게 되기까지 아이들은 몇 번의 지적을 했지만 나는 고쳐지지 않았고, 아이들은 그냥 나의 단어를 인정하고 이해하기 시작했다.

내가 말하는 스터디 카페의 이름이, ‘대박’이 아니라 ‘무한’이라고 아이가 끝까지 나에게 정확하고 올바른 단어를 요구했다면 어땠을까?

그럼 나는 그 정확한 단어를 위해 애를 쓰고, 실수할 때마다 약간의 눈치를 보거나 입에 붙지 않는 단어를 찾아내야 하는 에너지 소모를 해야 한다. 하지만 엄마의 실수 단어를 그들은 이해하고 “엄마는 맨날 거기를 대박이래!” 하며 웃어넘긴다. 나를 이해한 아이들의 배려다.  


하지만 나의 대화 방식에는 이러한 배려심이 부족하다.

통역일을 오랫동안 하며 직업병처럼 더 정확한 단어, 더 맥락에 맞는 단어를 더 멋있게 표현하기 위해 노력하고 그렇게 해야 고객이 만족한다고 생각했다. 상대가 제대로 찾지 못하는 그 단어를 알려주고 그 단어를 활용하여 쓰는 상대를 보며 흐뭇해했다.

예를 들어 “할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상태에서 어렵게 겨우 해냈어요”라는 표현하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

"I did not know that I could do that or not, but finally I could do that. " 이렇게 직역하여 표현한다면, 그렇게 표현하는 이들을 위해 manage라는 단어를 던져두듯 알려준다.  영어의 맥락에서  I managed it.으로 쓸 때 이런 의미들을 포함한다.

이런 나의 직업병은 한국어 커뮤니케이션에서도 나타난다. 상대의 언어에서 정확도를 추구하듯 상대가 뭔가 적정한 단어를 찾지 못하는 순간 기다려 주지 못하고 단어를 말해준다.

“ 내가 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한 것을 알아주지 않는 뭐, 그런 기분이 들어서 섭섭했습니다, 왜 그런 거 있잖아요. 내가 실컷 해놓고, 사람들은 그걸 내가 한 것인 줄도 모르고… “

이러한 대화를 들었다면

“나의 성과를 제대로 인정하지 않는 상황’이라는 말씀이시죠?” 이렇게 상대의 말을 더 나은 단어나 표현으로 정리했다. 그럼 상대는 “맞아요! 제 말이 그 말이에요”라고 한다. 그럼 나는 은근 성취감을 느꼈다.

나의 이러한 태도는 퍼실리테이션 초기, 시민들과의 토론에서 특히나 더 심하게 나타났다. 시민토론의 참여자들 중에는 일상의 바쁨 속에서 제대로 내 의견을 말해본 적 없는 분들이 참여하는 경우가 많다. 자기 생각을 표현하는데 익숙하지 않은 분들이다.  

그런 참여자의 언어를 더 정확하거나 소위 고급지게 정리해 주었다. 상대의 언어를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더 정확할 것이라 여기는 말이나 표현으로 바꾸어(rephrase) 정리해서 말하는 식이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상대에게 받는 칭찬을 좋아하고, 내가 옳다고 여겼다. 내가 바꾸어 표현한 언어는 더 고급지고, 더 정확할지는 몰라도 그 사람의 모든 맥락을 담고 있을지 알 수 없다.  

어설프게 표현한 것 같은 자신의 언어를 뭔가 정리하듯 더 고급지게 표현하는 퍼실리테이터 앞에서 인정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류재언 변호사의 책 [언어의 밀도]에서 한의사의 사례를 보면 찾아오는 환자들과의 신뢰를 쌓는 방법은 환자가 말하는 통증에 대한 설명을 환자의 표현을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었다. 이 한의사는 환자들의 언어를 관찰하고 이를 그대로 사용함으로써, 자신이 호감을 갖고 있다는 무언의 메시지를 상대방에게 전달한다.

그 한의사의 경우, 해석하지 않았다. 그 말을 그대로 차트에 정리했고 그 표현을 그대로 사용했다.  "무릎이 시큰거리는건 괜찮으세요, 송곳으로 찌르는 것 처럼 아픈 어깨~...."


내가 경단녀에 대한 스피치를 할 때 육아의 절박함이라는 말 만으로도 같은 상황을 겪은 상대는 무엇을 말하는지 공감한다. 나는 웃기게 이야기했지만 육아에 지친 엄마들은 이미 울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경험이 없는 이들에게 육아의 절박함은 ‘많이 바쁘구나’의 뜻으로 해석되기 쉽다. 우리는 쉽게 나의 해석으로 상대의 말을 기억하고 , 다시 만난 상대에서 내가 기억하고 있는 나의 해석 언어로 대화한다.  

‘육아로 많이 바쁘시죠?’ 하지만 내가 말한 육아의 절박함을 모두 담아내지 못한다.

한의사의 사례는 그 해석의 한계를 이해하고, 차트에 기록함으로써 상대가 표현하는 언어를 잊지 않고 그대로 사용했다.


상대가 표현하는 언어로 우리가 대화한다는 것은 상대의 맥락과 그 알 수 없는 미지의 의미조차 오롯이 그대로 수용하고 인정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누군가의 삶 속에서 나오는 그 언어는 그래서 언제나 옳다.

상대의 언어로 대화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가진 감정과, 경험과 맥락을 모두 인정하는 최고의 공감방법임에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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