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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혜 Aug 21. 2024

한국은 왜 세계 최저 출산율 국가가 되었을까?

나는 아이들에게 결혼과 출산을 권하고 싶지 않다.


나는 두 딸아이의 엄마다. 아이 임신과 출산, 육아를 위해 5년의 경력 단절의 시기가 있었으며 그 이후에도 종일 아이 돌봄을 도와줄 사람이 없어서 결국 프리랜서로 파트타임처럼 다시 일을 시작했다.

세계에서 합계출산율이 가장 낮은 한국은 2023년 말 현재 0.72명으로 인구 유지 수준의 3분의 1에 불과하다. 시간이 갈수록 급격한 인구 감소를 예고하는 수치다. 한국의 심각한 출생률은 이제 누구가 알고 있는 심각한 현실이다. 


아이들은 귀한 미래의 보물이 되어가지만, 그렇다고 내가 아이를 더 낳아서 이 문제를 해결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여성이나 부부는 없을 것이다. 한국의 미래 존폐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아이를 낳겠다는 애국심을 발휘하다가는 내 인생의 존폐가 흔들린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내가 태어날 1970년대만 해도 한국의 출산율을 상당히 높았다.

합계출산율은 1970년 4.53명이었다. 남아선호 사상을 가졌던 과거에는 남자아이를 낳기 위해서 딸을 낳으면 남자아이를 낳을 때까지 낳는 집안도 많았다. 당시 정부에서는 가족계획이라는 명목으로 출산율을 줄이기 위한 산아 제한 홍보 캠페인을 벌였다.


당시의 캠페인 포스터의 내용

 ‘덮어 놓고 낳다 보면 거지꼴을 못 면한다’(1960년대)

"딸, 아들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 (1970년대)  

축복 속에 자녀하나 사랑으로 든든하게(1980년대)

하나씩만 낳아도 삼천리는 초만원  (1980년대)

‘하나 낳아 알뜰살뜰’(1986) 

나의 부모세대 (전후 세대)들은 가난함에도 노동이 필요한 노동 중심의 사회와 의료 기술의 부족으로 인한 낮은 영아 생존율 등으로 당시 자녀를 많이 낳았었다. 나의 엄마도 본인의 나이보다 2년이나 늦게 출생신고가 되어 서류상의 나이는 실제 나이보다 2살이 어리다. 이렇게 늦게 출생 신고를 하는 이유는 영유아 사망률이 높았기 때문에 어느 정도 아이를 키우고 나서 출생 신고를 한 것이다. 

배고픔을 겪은 나의 어머니 세대 바로 다음인 X 세대인 나는 한 번도 배고픔을 겪어 본 적이 없으며, 개발 도상국에서 자라서 선진국인 된 한국의 여정을 고스란히 경험하였다. 

 X 세대(965년~ 1980년 출생)라 불리는  지금의 내가 속한 세대는 결혼과 출산을 당연히 해야 하는 것으로 여겼다.

우리의 부모 세대처럼 중매결혼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 것은 당연하고, 결혼을 하지 않고 나이가 들면 사람들은 당연히 결혼을 안 했다가 아니라 결혼을 못했다는 시선으로 바라봤었다. 

우리 부모 세대(전후 세대)는 아직도 출산은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만, 지금의 나는 더 이상 출산은 당연한 것으로 생각되지 않는다. 내 아이들이 결혼을 하든 말든, 출산을 하든 말든 그들의 선택이지만, 아이들은 대부분 결혼에 대한 꿈이나, 출산에 대한 긍정적인 생각은 별로 없는 것 같다.  

엄마가 가정 주부인 엄마의 아이들과 워킹맘의 아이들의 초등학교 시절의 기억은 완전히 다르다. 대게 한국은 집에서 걸어가는 가까운 거리의 학교에 진학을 한다. 대부분이 아파트에 사는 도시의 아이들은 가끔 아파트 단지 안에 학교가 있기도 한다. 

가정 주부인 엄마들은 초등학교 저학년 때는 아이가 하교할 때면 아이들을 데리러 학교에 간다. 그럼 그런 엄마들과 함께 아이들을 기다리고 자연스럽게 그런 아이들은 이 친구 저 친구 집에서 놀았던 추억을 가진다. 

반면에 아이들을 데리러 갈 수 없는 워킹맘들은 마치면 바로 학원차가 아이를 데리고 학원에 가거나 아니면 가장 가까운 학교 앞 학원에 간다. 그렇게 엄마가 퇴근할 때까지 아이들은 학원 뺑뺑이를 돌린다.   


워킹맘은 언제나 아이에게 미안하고, 야근이 많은 한국의 직장 문화 속에서도 칼 퇴근은 눈치 봐야 할 일이다. 어느 날 출장이라도 가게 되면 친정 엄마나, 시부모님께 SOS를 구하게 되고, 부모님에게도 또 미안하다. 

한국에서 워킹맘은 언제나 죄인이다.   

일을 하며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마치 내가 나의 커리어를 위해 내 주위의 모두에게 피해 주는 상황이 되어버린다. 매번 미안함, 죄책감을 가지고 일을 해야 하는 워킹맘은 결국 그 죄잭 감을 이겨내지 못하면 일을 그만두고 육아에만 전념하게 된다. 

한국에는 어린이집 비용을 보조해주고 있지만, 결국 어린이집에 끝나면 엄마가 올 때까지 어딘가에 또 가야 하고 어린이집이 오픈하는 시간도 출근시간 보다 늦다. 그 말은 어린이집이 문을 여는 그 시간까지 누군가가 또 아이를 돌봐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아이의 하루 여정을 생각하면 엄마는 회사에 조금 일찍 가려면 오전에 돌보미 고용, 어린이집, 아이 픽업부터 퇴근까지 고용, 이런 복잡한 상황을 제대로 맞추고 확인하고 문제없이 이루어 내야 한다.  


그럼 집에서 오롯이 돌봐주는 돌보미를 고용한다면 어떨까, 그 비용이 만만치가 않다. 아이를 낳을 나이정도의 여성이라면 아직 높은 급여를 받을 수 있는 관리직도 아니다. 그렇지만 종일 아이를 봐주거나 함께 거주하며 아이를 봐주는 사람을 고용하기 위해서는 거의 내 월급의 반 이상을 줘야 할 것이다.  

이런 상황에 결국 내게 남는 돈은 얼마 되지도 않다고 느끼게 되고 회사를 그만두고 육아에 전념하는 경력 단절을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남편이 있다 하더라도 한국의 가부장적 사회 인식은 여전히 남성이 집의 가장이라는 인식이 주도적이다. 이런 상황에서 남편은 일이 우선이 되는 것이 더 쉽게 정당화된다.  


그렇게 육아와 일로 고군분투하며 이제 아이들은 중학생 고등학생이 되었다.

이제는 아이들이 알아서 학교, 학원을 다녀오고, 알아서 밥도 챙겨 먹을 나이가 되어서 더 이상 누군가 돌봄을 필요하지 않을 시기가 되었다. 


이제 내가 부모로서 당면한 문제는 아이의 교육과 교육 비용이다.  

나는 공부를 열심히 하고 내성적인 첫째와 공부하기를 싫어하고 외향적인 둘째를 키우고 있다. 

한국의 초중고는 사립학교를 가지 않고 공립 하교를 보낸다면 학교에서 드는 비용은 별로 없다.

급식도, 교복도 국가에서 지원해 준다. 문제는 학원이다. 


한국의 교육열은 세계에서 알아준다. 한국사회는 공식적인 신분은 없지만 대학교와 직장이 거의 암묵적 신분이 되는 사회이다. 대입 시험이라는 인생의 중대사를 위해 초등부터 고등까지 12년을 달려온다. 모두가 같은 시스템 속에서 견뎌내는 그 누군가는 결국 성취하게 되는 구조이다. 이 시험에 실패하면 다시 일 년을 더 열심히 해서 그다음 해에 도전해야 한다.  


공부를 열심히 하는 고등학생 첫째는 시험 기간이면 학교를 마치고 학원에 가고, 학원을 마치면 독서실에 가서 새벽 1시에 집에 돌아온다. 내가 학교 다닐 때 공부를 열심히 안 한 건 아니지만 첫째 아이만큼은 아니었다. 그 정도 하면 일등 할 것 같은데 그렇지 못하다. 머리가 나쁜 것인가?라는 의문을 가진 적이 있다. 선생님과의 상담에서 “아이가 열심히 하는데 비해서 등수가 좋지 않은 것 같아요”라고 말하자 선생님의 답변에 그 이유를 알았다. 선생님의 대답은 “다른 친구들도 그렇게 하니까요.” 그런 환경 속에서 아이는 지속적으로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더욱 열심히 해야 한다고 느낀다. 하지만 상대평가등급 체계인 학교에서는 결국 모두가 열심히 하기에 나의 결과가 좋기 위해서는 다른 아이들보다 더 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공부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중학생 둘째는 어떨까? 

여전히 이 아이도 학교를 마치면 학원에 간다. 공부를 하기 싫어한다고 해서 다른 무언가 할게 딱히 없다. 결국 똑같이 영어학원 수학학원을 다니고 어떻게든 애써본다. 하지만 아이는 지속적으로 열등감에 시달려야 한다. 외향적인 아이의 성향은 친구도 많고, 사람들과 공감도 잘해줘서 짠돌이 아빠를 잘 구슬려 원하는 먹거리, 용돈, 사고 싶은 것을 잘도 얻어내는 능력을 지녔다. 하지만 이러한 능력을 인정받을 수 있는 교육 시스템은 어디에도 없다. 

한국에서 학생이라는 상태는 공부를 해야 하는 역할을 가졌고, 그 역할의 결과가 좋지 않으면 인정받을 수 없다. 한국에서도 특성화고등학교라고 졸업하고 바로 직업을 가지는 특정 전공과 기술 학습을 하는 고등학교들이 있다. 하지만 이 학교를 선택하는 학생들은 이미 성적에서 뒤처져 그곳으로 갈 수밖에 없다는 패배 의식과 타인의 비슷한 시선을 안고 학교를 다녀야 한다.  


엄마로서 이런 두 아이를 키우며 이젠 돌봄이 아니라 금전적 지원을 끊임없이 해야 한다. 한때는 나에게 작은 돈을 벌기 위해 밖에서 고생하지 말고 아이를 키우라고 했던 남편도 이젠 내가 벌지 않으면 두 명의 학원비를 감당할 수 없다. 남편은 한국에서 어느 정도 연봉을 받는 회사에 다니고 있지만, 두 명을 키우고 교육비를 감당하기에는 부족하다. 결국 내가 일을 하지 않았다면 아이가 원하는 학원을 다 보내줄 수 없게 된다.  

과연 이런 현실을 보고 자란 나의 아이들은 스스로의 미래를 어떻게 그려갈까?


나는 아이들에게 결혼을 권하고 싶지 않다. 

한국의 가부장적 문화는 아직도 며느리라는 위치가 어떤 이유와 질문도 없이 한 순간 시댁에서 노동자로 전락해도 따지고 묻지 않기를 바란다. 시어머니의 아들은 정작 자기가 자라온 집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데, 남의 자식인 나는 그 낯선 곳에서 끊임없이 일을 해야 한다.  

나는 시댁에 가는 게 조금도 행복하지 않았고, 내 딸들이 이런 전통문화 속에서 노동을 감내하기를 바라지 않는다.   


엄청난 입시 경쟁 속에서 자란 아이들은 행복감을 느낄 기회가 없다. 세상은 치열하고, 경쟁적이며, 이겨야 하는 곳이다. 과연 내가 아이들에게 이런 세상의 경험을 줄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나는 아이는 낳지 않았을 것이다. 


한국의 출산율 문제는 정부에서 엄청난 돈을 쏟아부었지만, 여전히 전혀 해결되지 않고 계속해서 떨어지기만 한다.  여성의 결혼 생활은 수많은 것들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상상도 못 할 육아에 대한 책임감을 오롯이 가지며, 아이를 낳았다는 이유로 회사와 아이와 부모님께 피해를 주는 인물로 살아야 한다는 것, 한국 드라마 오징어 게임처럼 치열한 경쟁 속에서 친구를 경쟁자로 인식하며 살아야 하는 교육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결코 나아지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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