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은 언제나 사회와 함께 진화하며, 문화와 잘 맞을 때 비로소 제대로
요즘 집 근처에 자주 가는 무인카페가 있다. 기계에 커피를 주문하고, 조용한 구석에 자리를 잡은 뒤 몇 시간씩 글을 쓰거나 책을 읽고 회의에 참여하기도 한다. 24시간 운영되기 때문에, 특히 여름밤처럼 집에 있으면 금세 침대로 향해버릴 시간이 필요할 때 생산적인 피난처가 되어준다.
무인매장이 이렇게 늘어나는 이유는 단순한 자동화의 결과가 아니다. 한국 사회만의 문화적 특성과 경제적 현실, 그리고 디지털 소통 방식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노동비용 상승과 운영 효율성
무인매장이 주목받는 가장 현실적인 이유 중 하나는 인건비 때문이다. 임금이 계속 오르고, 서비스 업종의 인력 부족이 지속되면서 소상공인 입장에서는 운영비를 줄일 방법이 필요하다. 무인 시스템은 직원 없이 24시간 매장을 열 수 있는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작은 카페든 편의점이든, 사람을 구하기 어려운 지금 같은 시기에는 오히려 기계가 더 안정적인 운영을 가능하게 해 준다.
빡빡한 문화와 자기 규제
문화심리학자 미셸 겔펀드는 ‘빡빡한 문화(tight culture)’를 규범이 강하고 일탈에 대한 관용이 적은 사회라고 설명한다. 한국은 조사 대상 국가 중에서도 다섯 번째로 ‘빡빡 한한’ 사회로 나타났다. 이는 한국 사회가 매우 강한 사회적 규범과 기대치를 가지고 있으며, 구성원들 역시 이를 내면화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횡단보도에 차가 하나도 없는데도 빨간불이면 기다리는 사람들을 자주 볼 수 있다. 유럽인이 나에게 차가 안 다니는데 왜 기다리고 있는지 물은 적이 있다. 누가 보지 않아도 규칙을 따르는 것은 사회적 기대와 살아오면서 배운 나의 기본 규칙과 잣대이기 때문이다. 이런 문화에서는 무인매장도 잘 작동한다. CCTV와 자동화 시스템만으로도 대부분의 사람은 정직하게 행동한다.
물론, 물건을 결제하지 않고 가져가거나 내부 시설을 파손하는 일도 있다. 많은 사람이 CCTV가 범죄를 줄인다고 생각하지만, 연구에 따르면 CCTV가 많다고 반드시 범죄율이 낮아지는 것은 아니다. 범죄 예방은 기술보다 사회적 규범과 개입이 함께 작동할 때 효과가 크다.
디지털에 익숙한 세대와 디지털 소외
한국은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디지털 강국이다. QR코드 결제, 키오스크 주문, 앱으로 출입하는 시스템은 이제 젊은 세대에겐 너무나 익숙하다. 하지만 모든 세대가 이 흐름을 쉽게 따라가는 것은 아니다.
노인복지관에서는 키오스크 사용법을 알려주는 수업이 이제 흔하다. 뉴스에서는 종종 어르신들이 햄버거 하나 주문하지 못해 돌아가는 장면이 보도되곤 한다.
중학생인 둘째는 이런 뉴스를 보고 할머니와 함께 패스트푸드점에 가서 키오스크 사용법을 하나하나 알려드렸다. 뉴스에 나오는 어르신들처럼 소외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그때는 익숙하지 않았던 친정어머니가 지금은 스스로 푸드코트에서 식사를 주문하신다. 이제는 대형 마트 푸드 코트에서도 직원이 아예 없는 경우가 흔하다.
한국은 65세 이상 인구가 전체의 20%를 넘으며 초고령 사회에 접어들었다. 인구의 5분의 1이 사용하기 어려운 시스템은 분명 개선이 필요하다. 어쩌면 이런 고령화로 인해 디지털화의 속도는 다소 늦춰졌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변화는 멈추지 않는다.
‘체면’과 감정노동의 감소
한국 사회에서 ‘체면’은 자존심이나 부끄러움 이상의 개념이다. 나의 행동이 타인에게 어떤 영향을 줄지 고려하는, 정서적인 배려가 포함된다. 괜히 누군가를 불편하게 하지 않기 위해, 또는 기대에 미치지 못할까 봐 걱정하는 마음이 행동을 결정짓기도 한다.
한국과 같이 간접적으로 의미를 전달하는 문화에서는 일상적인 대화조차도 신경을 많이 써야 한다. 무인매장은 이런 감정 노동을 줄여준다. 눈치 보지 않아도 되고, 불편한 대화도 없다. 버튼 몇 번으로 끝나는 소통은 오히려 더 편안하게 느껴진다.
딸아이는 항상 메뉴 고르는 걸 어려워한다. 이것저것 다 먹고 싶은데, 누군가가 옆에서 주문을 받기 위해 기다리면 부담이 커진다. 그래서 아예 사람에게 주문해야 하는 식당은 가고 싶어 하지 않는다. 키오스크가 있는 매장이 그녀에겐 더 자유롭고 편한 공간이 되는 셈이다.
단순한 편리함이 아닌, 한국 사회의 문화적 거울
결국 무인매장은 단지 기술적 혁신이나 비용 절감을 위한 수단만은 아니다. 한국 사회의 문화적 규범, 디지털 친화성, 집단적 자기 규제, 그리고 배려 중심의 커뮤니케이션이 녹아 있는 결과물이다.
이 변화는 단순히 ‘더 편리해서’가 아니라, ‘한국 사회와 잘 맞기 때문에’ 빠르게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기술은 언제나 사회와 함께 진화하며, 문화와 잘 맞을 때 비로소 제대로 작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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