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사람이 같이 길을 가면 반드시 내 스승이 있다
11-12월은 여러모로 참 시끄러운 시즌이다. 한 해가 마무리되는 시기라 그렇기도 하지만 회사생활하다 보면 조직개편이네 임원인사네 하는 굵직한 정기 인사 결과에 따라 내년 회사 생활이 가늠되기에 불안정한 내년을 점치고 예상하랴 바쁘다. 나 역시 조직 개편으로 사옥을 이동하게 되었다. 매년 새로운 조직 구조에 맞춰 레이아웃을 변경하고 이삿짐을 싸는 일은 일상이지만, 사옥을 이동하는 건 또 처음인지라 박스에 짐을 싸놓고 나오는데 퇴사도 아닌 것이 퇴사 같은 기분이 들더라. 짐 정리에 한 창일 때 동료가 대뜸 새로운 해로 바뀌는 1-2월이 싫다 한다. 이유인즉슨 12월 31일이든 1월 1일이든 평소와 다르지 않은 날인데 갑자기 다들 대단한 다짐을 하고 의욕에 차서 무엇이든 해야만 할 것 같은 상황이 만들어지는 기분이 싫다 했다. 특별한 날인 양 의미를 부여하고 여유로운 연말에서 급 긴장하고 계획 빡빡해지는 태세 전환이 싫은 것 같았다.
그리고 어제는 전 직장 정기인사가 발표되었다. 아직까진 현 직장보다 전 직장 사람들을 이야기와 내부 소식에 조금 더 빠삭하다. 퇴사한 지 3여 년이 지났지만 오히려 밖에 있으니 다양한 벨류 체인에 있는 사람들이 지금 상황과 본인의 처지를 가감 없이 이야기해주니 그렇다. 내부 발표와 동시에 릴리즈 된 기사로 내용을 확인했고, 좋아하는 이들의 승진 소식에 축하를 건넸다. 내가 승진했을 때만큼 기쁜 친한 언니의 임원 소식은 더더욱 그러했다. 굵직한 대기업 30대 여성 임원. 기쁜 소식을 전한 이가 있다면 안타까운 소식을 전한 이들도 있다. 제로섬 게임(Zero-sum game, 한쪽의 이득과 다른 쪽의 손실을 더하면 제로(0)가 되는 게임을 일컫는 말. 게임 이론으로부터 등장했지만 정치·경제·사회분야 등의 무한경쟁 상황에서 패자는 모든 것을 잃고 절대강자만 이득을 독식하는 현상을 설명할 때에도 종종 사용)은 회사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통보받고 집에 가는 분도 계시고, 원하는 자리가 아닌 곳으로 옮기는 이들도 있다. 조직에서 그러한 결정을 한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고 명분이 있겠지만 내가, 혹은 내 친한 지인들이 이번 게임에서 제로섬의 마이너스에 위치해있다면 속상한 게 당연하다. 물론 그게 진짜 마이너스였는지는 수년이 지나 봐야 안다. 인생사 새옹지마(塞翁之馬, 인생에 있어서 길흉화복은 항상 바뀌어 미리 헤아릴 수가 없다는 뜻)라 잠깐 웅크렸던 지금이 새로운 기회가 되기도 하니까.
조직이 정리되고 인사가 발표되면 이제 팀원 인선이다. 인사가 만사(人事萬事, 사람의 일이 곧 모든 일이라는 뜻으로, 알맞은 인재를 알맞은 자리에 써야 모든 일이 잘 풀림을 이르는 말)라고 했던가. 팀장도 좋은 팀원을 팀으로 데리고 오고 싶지만 팀원 역시 원하는 팀장과 일하고 싶은 건 당연지사다. 전 직장에서는 나 역시 리더 역할로 5명의 친구들을 케어하며 일하는 기회가 있었다. 내가 팀을 떠날 때 입바른 소리였는지는 몰라도 그 친구들에게 회사 생활하면서 가장 많이 배운 선배였다. 가장 핏이 잘 맞는 리더였다는 등 좋은 피드백을 들었고 나 역시 그들을 통해 리더의 역할에 대해 깨닫는 시간이었다.
그 3년 전에도 선배들에 비해 꼬꼬마인 내가 5명을 데리고 있었으니, 나에게 많은 가르침을 줬던 선배들은 지금 더 굵직한 자리에 있다. 조직 개편과 함께 인사이동이 발표되고 여러 생각들이 들었는지 몇몇 선배에게 연락이 왔다. 자랑을 조금 하자면 내가 회사 소식이 빠른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잘 들어주는 것. 공감해주는 것. 직언도 서슴치 않는 것. 들어온 이야기는 밖으로 내보내지 않는 것. 혹자는 피곤하지 않냐고 하는데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 나를 돌아보고 나라면 어땠을까라는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가 되어 오히려 좋다. 내 성격상 싫었다면 연락을 피했을 텐데 그렇지 않은 것 보면 오히려 나에게 고민을 나눠주고 생각을 털어놔주어 고맙다. 나랑 이야기하다 보면 털어놓게 된다나 뭐라나? 정작 나 본인은 혼자 생각을 정리하는 스타일이라 그들이 서운해한다는 점이 있지. 각설하고 다시 돌아가서, 통화를 하다 보면 대화의 주제가 참 다양한데 어제는 커리어 목표, 리더의 역할과 의사 결정, 함께 일할 동료를 선택하는 기준 등에 대해 이야기 나눴다. 각기 다른 조직에 있는 선배 세 명과 이야기를 나눴는데 시기가 시기인지라 내용은 짠 듯 비슷했다.
질문은 같았는데 그 질문을 해석하고 내놓는 대답이 달랐다. 다들 면접관 경험이 있어서 비슷한 질문을 신입 사원들에게도 종종 했을 텐데 이십 년 가까이 일하고 있는 선배들도 그것에 쉬이 답하지 못했다. 잠시 고민을 하더니 지금 하고 있는 산업이 좋아서 이 산업에서 어떠한 역할을 하고 싶다, 오래 일하고 싶다, 특정 직책을 맡고 싶다 등 다양한 대답이 오갔다. 왜 오래 일하고 싶은데요? 왜 그 자리에 올라가고 싶을까요?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을 하며 나 스스로에게도 질문을 던졌다. 내 커리어 목표는 무엇일까?
어떤 리더가 되고 싶냐는 질문의 다른 버전이다. 5년 전인가 승진자 교육과정 중 하나였던 '내 마음 보고서' 결과를 동기들과 이야기 나누다 깨달은 사실이었다. 심리상담 결과와 유사한 형식으로 진단해서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줬는데 내용이 퍽 잘 맞아서 친한 친구들도 테스트받게 하고 같이 바꿔 읽어봤었다. 그때 내 마음 보고서 결과에 대해서는 나중에 글로 남겨보도록 하겠다. 그 내용 중 하나가 윗사람을 평가할 때 기준이 대한 이야기였는데 나는 '상대방이 힘을 낼 수 있도록 격려하고 이끄는 사람'인가가 중요한 요소라 이야기하고 있었다. 지금 하나 더 덧붙이면 게다가 배울 것 많은 능력도 있는 리더가 좋다. (안다. 욕심이다.) 그런 질문을 해 본 적이 없어 그렇지 나와 비슷하겠거니 했는데 동기들의 대답은 모두 달랐다. 성과 잘 내는 리더, 믿어주는 리더, 똑똑한 리더 등등 사람마다 본인이 생각하는 좋은 리더의 기준이 확연히 달랐다. 그 워크숍을 통해 리더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에 나의 생각과 나의 기준에 맞는 리더가 아닌, 상대에 따라 다른 리더의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는 것도 깨달았다. 그래서 꼭 하나의 기준으로 훌륭한 리더상을 그릴 수는 없겠지만 선배들은 어떤 평가의 기준을 가지고 있는지 궁금했다. 역시나 그들도 자유도를 주는 리더, 우산이 되어주는 리더, 기댈 수 있는 리더 등 다른 기준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앞으로 어떤 리더의 모습이고 싶을까?
그리고 대화의 말미에 물었다. 나는 어떤 후배였냐고. 나랑 같은 팀에 있던 선배도 있었는데 내가 주니어 시절 선배들이 서로 나를 달라고 했던 시절에 대해 이야기했다. 너무나 감사한 기억인데 연차를 더 먹은 현재 생각해보면 내가 뛰어나서가 아니라는 걸 잘 안다. 보통 팀이나 파트를 꾸릴 때 연차를 균형 있게 분배하게 되는데, 동 연차들 대비 엄청 뛰어났다기보다 경험이 넓었다. 에이젼시 경험은 물론이고, 제조사에서 제조사로 이직을 해왔던 터라 업무의 롤과 스콥이 유사했기에 A, B, C 영역에 대해 다 경험이 있었던 나에 비해 둘은 아니었기에 처음엔 조금 더 나아 보였을지도 모른다. 감사하게도 그 경험이 새로운 경험을 제공하고 또 쌓이고 누적되어 더 빨리 승진하고 리더가 되었으니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 경험이라는 것이 참 중요하다는 생각을 한다. 살다 보니 경험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철저한 경험주의자가 된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러다 한 선배가 대뜸 '너랑 일하면 편하지.'란다. 또 꼬리를 물어 묻는다. '편하다는 게 어떤 의미예요?' 나나 선배나 직업의 특성도 있거니와 성향상 '왜?'라는 질문이 잦은 인간들인 건 맞다. 그리고 그 대답도 정돈되어 온다.
"첫째, 말귀를 잘 알아들을 테지, 맥락을 잘 캐치할 테고 내가 무슨 말하고 싶은지 알아들을 테니까. 둘째 목적과 이슈를 바라보고 이해하는 바는 같을 텐데 생각하는 방법이 다를 테니까. 너랑 나랑 생각하는 방식이 다르잖아. 우리 둘 다 이해되지 않고 말이 되지 않으면 그건 문제가 잘못되었을 거야. 다르게 생각할 수 있으니 다양한 방법으로 접근해볼 수 있어 편할 것 같아. 마지막으로 재미있을 거 말해 뭣 해. 일도 일인데 회사 생활이 얼마나 재미있을까?"
힘들었던 과거는 미화되기 마련이고, 환경도 변하고 사람도 변한다. 나는 산업군을 바꿨고, 한 선배는 그 자리를 여전히 시키고 있고, 한 선배는 위치가, 다른 선배는 R&R이 바뀌었다. 우스갯소리로 지금 같이 일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서로 감정 상하지 않고 이런 이야길 허심탄회하게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사이가 된거라 이야기 했다. 일을 하다보면 항상 좋을 일만 있는 건 아니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절을 그리워하고, 그 시절이 재미있었노라 이야기 한다. 지금 각자가 처한 환경도, 그리는 미래도 다르지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을 서슴없이 할 수 있고 생각을 나눌 수 있는 인생 친구들이 있어 좋다. 그 질문들이 쌓여 나를 더 단단하게 만들어줄테니 그 또한 좋다. 대화를 통해 인생을 회사생활을, 리더의 역할을, 커리어를 되돌아보게 해준 오늘의 나의 스승님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