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얗게 밝아 온 유리창에 썼다 지운다, 널 사랑해
생각날 때마다 울었다
박형준
그 젊은이는 맨방바닥에서 잠을 잤다
창문으로 사과나무의 꼭대기만 보였다
가을에 간신히 작은 열매가 맺혔다
그 젊은이에게 그렇게 사랑이 찾아왔다
그녀가 지나가는 말로 허리가 아프다고 했다
그는 그때까지 맨방바닥에서 사랑을 나눴다
지하 방의 창문으로 때 이른 낙과가 지나갔다
하지만 그 젊은이는 여자를 기다렸다
그녀의 옷에 묻은 찬 냄새를 기억하며
그 젊은이는 가을밤에 맨방바닥에서 잠을 잤다
서리가 입속에서 부서지는 날들이 지나갔다
창틀에 낙과가 쌓인 어느 날
물론 그 여자가 왔다 그 젊은이는 그때까지
사두고 한 번도 깔지 않은 요를 깔았다
지하 방을 가득 채우는 요의 끝을 만지며
그 젊은이는 천진하게 여자에게 웃었다
맨방바닥에 꽃무늬 요가 펴졌다 생생한 요의 그림자가
여자는 그 젊은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사과나무의 꼭대기
생각날 때마다 울었다
가난 때문에 사랑을 잃은 남자의 이야기
뻔해서 더 슬프다
작은 열매가 맺히듯 겨우 찾아온 사랑은
상처만 남기고 남자의 곁을 떠난다
'물론'여자는 돌아왔지만
천진하게 웃는 남자와 달리
여자는 웃지 않는다
결기에 찬 눈으로 이별을 통보할 뿐인 여자에게
남자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무슨 말이나 할 수 있었을까
사랑은 원래 힘들고 아프다지만
가난한 사랑은 배로 아프고 힘들다
시집을 덮고 한껏 울고 싶었지만
나의 눈은 이미 오래전에 우는 법을 잊어
대신 속으로 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