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서 Jun 07. 2018

생각날 때마다 울었다

하얗게 밝아 온 유리창에 썼다 지운다, 널 사랑해

생각날 때마다 울었다

                                            박형준


그 젊은이는 맨방바닥에서 잠을 잤다

창문으로 사과나무의 꼭대기만 보였다


가을에 간신히 작은 열매가 맺혔다

그 젊은이에게 그렇게 사랑이 찾아왔다


그녀가 지나가는 말로 허리가 아프다고 했다

그는 그때까지 맨방바닥에서 사랑을 나눴다


지하 방의 창문으로 때 이른 낙과가 지나갔다

하지만 그 젊은이는 여자를 기다렸다


그녀의 옷에 묻은 찬 냄새를 기억하며

그 젊은이는 가을밤에 맨방바닥에서 잠을 잤다


서리가 입속에서 부서지는 날들이 지나갔다

창틀에 낙과가 쌓인 어느 날


물론 그 여자가 왔다 그 젊은이는 그때까지

사두고 한 번도 깔지 않은 요를 깔았다


지하 방을 가득 채우는 요의 끝을 만지며

그 젊은이는 천진하게 여자에게 웃었다


맨방바닥에 꽃무늬 요가 펴졌다 생생한 요의 그림자가

여자는 그 젊은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사과나무의 꼭대기

생각날 때마다 울었다



가난 때문에 사랑을 잃은 남자의 이야기

뻔해서 더 슬프다

작은 열매가 맺히듯 겨우 찾아온 사랑은

상처만 남기고 남자의 곁을 떠난다


'물론'여자는 돌아왔지만

천진하게 웃는 남자와 달리

여자는 웃지 않는다


결기에 찬 눈으로 이별을 통보할 뿐인 여자에게

남자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무슨 말이나 할 수 있었을까


사랑은 원래 힘들고 아프다지만

가난한 사랑은 배로 아프고 힘들다


시집을 덮고 한껏 울고 싶었지만

나의 눈은 이미 오래전에 우는 법을 잊어

대신 속으로 울었다.





작가의 이전글 윤동주와 채식주의자의 영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