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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맨디 Jun 21. 2023

직업의 멸종을 지켜보고 있다.

부업을 시작한 건 아이를 임신했을 무렵이었다.

아무리 계산기를 두드리고 두드려도, 내 수입이 뚝 끊기는 육아휴직 기간 동안의 삶이 잘 그려지지 않았다.

저축이 없는 건 고사하고, 마이너스의 삶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가는 게 보였다.

"부업이라도 해야 하나?"

한숨 섞인 농담을 말하곤 했지만, 그 말이 정말이 될 줄은 몰랐다.


배가 뚱뚱해진 만삭이 되었을 무렵 운 좋게 '번역가'라는 새 직업을 부여받았다.


툭 까놓고 말해, 제대로 된 번역은 아니었다.

본격적으로 학위를 딴 것도 수업을 들은 것도 아니었다. 그저 10년간 공사판을 뒹굴며 매일 듣고 익힌 기술적인 문장들을 그대로 직역해 내는 수준이었다.

문장 하나하나가 가지는 어감과 글의 생명력까지 멋들어지게 살려내는 "진짜" 번역가분들께는 송구스러울 만큼 간단하고 초라한 실력이었다.


그렇게 매일 저녁 일을 마치는 오후 다섯 시가 되면, 두 번째 직업이 시작됐다.

화면 가득 워드와 사전과 구글등을 어지럽게 펼쳤다.

덕분에 수학의 정석을 푼다거나, 경제 신문의 사설을 읽는 따위의 태교는 필요하지 않았다. 매일 분야가 다른 논문이나 시방서 따위를 한국어로 읽어내 영어로 옮겨 담기 바빴다.

"똑똑한 아이가 태어난다면 분명 이 두 번째 직업이 차지하는 지분이 있으리라!"확신했다.


프리랜서라는 타이틀은 그때 처음으로 갖게 됐다.  


이전까진 프리랜서란 직업에 로망이 있었다. '원할 때 원하는 만큼 원하는 곳에서 일한다'는게 얼마나 근사해 보였던지. 최소 8시간은 회사에 묶여 규격 된 삶을 살아야 했던 내게 프리랜서는 담백한 자유로움이 연상되는 단어였다.

하지만 막상 프리랜서가 되어보고 나니, 이 로망이 얼마나 담대한 마음가짐을 필요로 하는지 무섭게 깨닫게 됐다. 일희일비가 전문인 나는 매번 속을 태웠다.

일이 없으면 없는 데로 '지난 번역이 뭔가 잘못된 건 아닌가' 전전긍긍했다.

또 일이 많은 것도 문제였다. 본업을 따로 둔 상황에서 다 감당하지 못할 만큼의 요청임을 마음속 깊숙이 알고 있었지만 쳐내지 못했다. 당장 "이거 끝내시면 50만 원을 드립니다." 하는 식의 주문에 심장이 먼저 반응했다.

두근두근. "50만... 50만 원 이라고요?"

결국 감당하지 못할 만큼의 번역 일로 정작 회사에는 병가(sick leave)를 써야만 했던 웃지 못할 일도 있었다.

난 그저 자본주의의 노예였다.    


그렇게 내 안의 욕심과 줄다리기하며 근근이 이어온 이 두 번째 직업은 벌써 경력 5년 차에 접어들었다.

난 경력만 '조금' 있는 실력도 근본도 없는 번역가가 되었다.


짧지 않은 시간이었다. 

5년이란 꽤 오랜 기간 동안 한결같이 꾸준했던 이 부업에 변화가 생긴 건 최근 일이다.


요즘 들어 이 직업이 멸종되어 감을 피부로 실감하고 있다.  

일 자체의 절대 양이 줄었다.

내가 맡게 되는 일이 줄었을 뿐 아니라, 이와 상관없이 "이거 끝내면 30만 원을 드립니다. 해보시렵니까?" 하는 식의 질문마저 줄었다. 직업의 규모 자체가 줄어들고 있다는 반증이었다.


터미네이터나 매트릭스에서나 보던 AI란 녀석이 드디어 일상의 영역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Chat GPT의 등장은 '너처럼 단순 직역이나 하는 초벌 번역가 따위는 필요치 않다'는 걸 뼈 구석구석 새겨 일러주는 듯했다.

녀석은 정말 똑똑했다.

언제부턴가 나부터도 Chat GPT가 없이는 일하기 힘들어졌다.


서너 권의 사전처럼 된 스펙을 굳이 열어보지 않아도, 몇 가지 간단한 조건만으로 내가 찾는 건축법이 어느 페이지에 있는지 알려줬다. 그 스펙을 응용할 때 주의해야 할 조건들도 함께 당부했다. 수식이 필요하면, 수식과 함께 계산을 마친 숫자들을 함께 제공했다. 기가 찰 정도로 일이 쉬워졌다.


가끔은 내 머릿속도 정리해 줬다. 허공을 두서없이 둥둥 떠도는 것 같은 하찮은 생각들을 줄글처럼 쏟아내면, 녀석은 일목요연하게 닷 포인트로 정리해 알려줬다. '내가 하던 생각이 이거였구나!' 싶어 당황스러웠다. 이 복잡한 생각을 영어로 바꾸라면 또 몇 초만에 바꿔냈다. 입이 떡 벌어졌다.


우리는 이미 미래 속에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 만큼 매일매일이 변화하고 있다.  

'막연히 언젠가'로 그려지던 그 일들이 현실이 되는 그 시점의 입구에 서있는 듯하다.

 

아직은 그 다음장이 어떤 그림일지 누구도 정확히 점치지 못하고 있는 느낌이다.

터미네이터를 떠올리면 좀 무섭기도 하고,

헐(Her)이나 아이언맨의 자비스 같은 말동무를 둘 생각을 하면 좀 설레기도 하고.


확실한 건, 내 소소한 부업 인생은 곧 끝날 예정이다.

그 옛날, 소중했던 사촌언니의 주판이 '장난감 스케이트'가 되던 그 어느 날처럼 내 금쪽같은 부업은 고요히 내게 멸종을 고하고 있다.

 

흐름을 거스를 수가 있나.

그저 번역으로 모아둔 푼돈으로 AI 주식이나 좀 사두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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