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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맨디 Nov 12. 2019

엄마도 여전히 여자이긴 합니다만

"자기 스티브 잡스 같아."

후다닥 외출을 위해 옷가지를 꺼내 드는 나를 보고 남편이 말을 건넸다. 내 왼손엔 베이지색 목 폴라티가 들려있었다.

"아니야! 스티브 잡스는 까만 목폴라지!"

이야기를 하는데 남편이 대꾸 없이 돌아섰다.


'왜 말이 없는 거지?'

영 찜찜한 기분이 들어 한번 더 곱씹어보니, 남편은 내 옷이 목폴라 임을 꼬집은 게 아니라 요즘 매일 그 옷만 입는 걸 꼬집은 거였다. 아, 또 한 박자 늦어서 정색할 타이밍을 놓쳤다. 억울하다.


요즘 내가 내내 이 베이지색 목폴라티에 청바지만 입고 다녔던 건 사실이다. 구강기가 시작되면서부터 열심히 옷을 빨고, 토해놓는 아기 때문에 자주 옷을 빨게 되는데, 매번 빨아둔 옷이 옷장으로 돌아오면 곧장 이 편안한 옷에 손이 또 가고 또 가곤 했다.


물론 할 말은 많다.

우선 엄마의 외출이라는  대부분 누군가를 만나기 위한 게 아니다. 강아지, 두부를 산책시키기 위해 공원을 한 바퀴 돌고 오거나 집 앞 시장으로 마감세일 시간에 맞춰 장을 보러 가는 게 고작이다. 이따금씩 친구들과 약속을 잡기도 했지만, 변화무쌍한 아이의 컨디션 때문에 약속은 취소되기 일쑤였다. 이젠 그냥 편하게 집으로 올 친구들이 아니면 선뜻 약속을 잡기가 쉽지가 않다. 꾸미고 다닐 필요가 없다.


여기에 아이의 다채로운 옷도 내 이 교복 같은 패션에 일조를 했다. 우리 아이는 운 좋게 세 살 많은 사촌 언니로부터 옷들을 잔뜩 선물 받았다. 그냥 한두 벌 받은 정도가 아니라 잘 모아뒀던 언니의 옷을 산타할아버지의 선물꾸러미처럼 한아름 물려받았다. 중고 옷이라고 해도 몇 번 입지 않은 갓난아이 옷은 마냥 귀엽고 알록달록하니 예뻤다. 거기에 선물 받은 옷까지 아쉽지 않게 충분했기에, 내가 사준 아이 옷이라고는 가족사진에 색을 맞추기 위해 인터넷으로 주문했던 딱 한 번이 전부였다.

게다가 이번에 잠시 우리나라에 들어간 동안, 딸 둘을 키우는 친구가 또 한 상자 아이 옷을 물려줬다. 맙소사. 우리 아이와 딱 6개월 차이가 나는 둘째의 여름옷들이었는데, 호주는 마침 계절도 반대이니 넣고 빼고 할 것도 없이 그냥 옷장을 바로 옮긴 것처럼 한아름의 여름옷이 늘어났다.

아이 옷이기에 부피는 작지만 가짓수만 세면, 대충 봐도 녀석의 옷이 내 옷보다 많을 것 같았다. 아이는 또 어찌나 쑥쑥 크던지. 잠깐만 시기를 놓쳐도 못 입게 되는 옷이 태반이어서 종이인형 옷 갈아 입히듯 부지런히 아이 코디를 하고 사진을 남기는 일에 바빠졌다.


문제는 아이 옷, 겉옷, 양말, 그리고 딸임을 증명하는 머리 장식까지 코디를 완료해 입혀내고 나면 외출시간이 임박해져 내 옷을 챙겨 입을 시간이 없어진다는 점이다. 그리고 늘 바빠지면 손이 가는 데로 젤 위에 있는 베이지색 목폴라를 꺼내 입게 된다. 새로 빨아 옷장으로 돌아오면 제일 위에 있고, 그럼 또 제일 위에 있는 그 옷으로 손이 가고 하는 무한 반복이었다.  




별거 아니긴 해도, 남편에게 그런 소리를 듣자 자존심이 상했다.

남녀 학생 비율이 1:1 정도인 과였기에 공대 아름이까지는 아니었지만, '공대 여자가 치마도 입냐'는 구시대적인 선배, 동기들의 구박속에서도 치마를 꿋꿋이 고집했던 나였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는 내 자존심은 하이힐이라고 말하고 다닐 정도로 365일 중에 350일 정도는 구두만을 신었다. 지금은 신지도 않는 신발들은 곧잘 짐짝 취급을 당하지만, 어쩐지 미처 모두 보내지 못한 내 20대에 대한 미련 같아 녀석들을 신발장 구석에 잘 모셔두었다.


그래, 오늘 내가 뭔가 보여주지! 싶어 졌다.

퇴근시간 즈음 회사와 집 중간쯤에 있는 쇼핑몰에서 만나자고 남편과 약속을 잡고, 부지런을 떨어봤다. 우선 가장 먼저 옷장 깊숙이 넣어둬 있는 줄도 몰랐던 원피스를 새삼 꺼내 입어봤다. 왜 몸무게는 임신 전으로 돌아왔는데 뱃살은 남아있는지 모르겠지만, 거울을 보며 옆으로 서 배에 힘을 줘 보니 그런대로 나쁘지만은 않은 것 같았다. 어울리는 재킷을 꺼내고 양말을 꺼내신는데 아차, '이 옷은 모유수유가 불가능하구나. 갈아입을까?'싶었다. 잠시 고민했지만, 에이~ 밖에 그리 오래 있을 것도 아닌데 싶어 계속 준비를 서둘렀다.


보채는 아이는 딸랑이로 달래며, 이번에 우리나라에서 사 와 아직 포장도 안 뜯은 화장품을 꺼내 부지런히 얼굴에 바르고 있는데 남편에게 전화가 왔다.


"자기야, 밖에 우박 내려"

"응? 무슨 소리야?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분명 해가 쨍..."

하고 밖을 보는데 후드득후드득 우박 쏟아지는 소리가 거실 안까지 들쳐왔다.


김이 푹 빠졌다.


칭얼대는 아이를 품에 안은 채로 옷도 갈아입지 않고 풀썩 침대에 누워버렸다.

'빌어먹을 멜버른 날씨'

15분 뒤도 예측할 수 없는 변화무쌍한 날씨를 탓해보지만 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 오늘 딱 하루만 더 남편에게 스티브 잡스로 남자. 에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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