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다닥 외출을 위해 옷가지를 꺼내 드는 나를 보고 남편이 말을 건넸다. 내 왼손엔 베이지색 목 폴라티가 들려있었다.
"아니야! 스티브 잡스는 까만 목폴라지!"
이야기를 하는데 남편이 대꾸 없이 돌아섰다.
'왜 말이 없는 거지?'
영 찜찜한 기분이 들어 한번 더 곱씹어보니, 남편은 내 옷이 목폴라 임을 꼬집은 게 아니라 요즘 매일 그 옷만 입는 걸 꼬집은 거였다. 아, 또 한 박자 늦어서 정색할 타이밍을 놓쳤다. 억울하다.
요즘 내가 내내 이 베이지색 목폴라티에 청바지만 입고 다녔던 건 사실이다. 구강기가 시작되면서부터 열심히 옷을 빨고, 토해놓는 아기 때문에 자주 옷을 빨게 되는데, 매번 빨아둔 옷이 옷장으로 돌아오면 곧장 이 편안한 옷에 손이 또 가고 또 가곤 했다.
물론 할 말은 많다.
우선 엄마의 외출이라는 건 대부분 누군가를 만나기 위한 게 아니다. 강아지, 두부를 산책시키기 위해 공원을 한 바퀴 돌고 오거나 집 앞 시장으로 마감세일 시간에 맞춰 장을 보러 가는 게 고작이다. 이따금씩 친구들과 약속을 잡기도 했지만, 변화무쌍한 아이의 컨디션 때문에 약속은 취소되기 일쑤였다. 이젠 그냥 편하게 집으로 올 친구들이 아니면 선뜻 약속을 잡기가 쉽지가 않다. 꾸미고 다닐 필요가 없다.
여기에 아이의 다채로운 옷도 내 이 교복 같은 패션에 일조를 했다. 우리 아이는 운 좋게 세 살 많은 사촌 언니로부터 옷들을 잔뜩 선물 받았다. 그냥 한두 벌 받은 정도가 아니라 잘 모아뒀던 언니의 옷을 산타할아버지의 선물꾸러미처럼 한아름 물려받았다. 중고 옷이라고 해도 몇 번 입지 않은 갓난아이 옷은 마냥 귀엽고 알록달록하니 예뻤다. 거기에 선물 받은 옷까지 아쉽지 않게 충분했기에, 내가 사준 아이 옷이라고는 가족사진에 색을 맞추기 위해 인터넷으로 주문했던 딱 한 번이 전부였다.
게다가 이번에 잠시 우리나라에 들어간 동안, 딸 둘을 키우는 친구가 또 한 상자 아이 옷을 물려줬다. 맙소사. 우리 아이와 딱 6개월 차이가 나는 둘째의 여름옷들이었는데, 호주는 마침 계절도 반대이니 넣고 빼고 할 것도 없이 그냥 옷장을 바로 옮긴 것처럼 한아름의 여름옷이 늘어났다.
아이 옷이기에 부피는 작지만 가짓수만 세면, 대충 봐도 녀석의 옷이 내 옷보다 많을 것 같았다. 아이는 또 어찌나 쑥쑥 크던지. 잠깐만 시기를 놓쳐도 못 입게 되는 옷이 태반이어서 종이인형 옷 갈아 입히듯 부지런히 아이 코디를 하고 사진을 남기는 일에 바빠졌다.
문제는 아이 옷, 겉옷, 양말, 그리고 딸임을 증명하는 머리 장식까지 코디를 완료해 입혀내고 나면 외출시간이 임박해져 내 옷을 챙겨 입을 시간이 없어진다는 점이다. 그리고 늘 바빠지면 손이 가는 데로 젤 위에 있는 베이지색 목폴라를 꺼내 입게 된다. 새로 빨아 옷장으로 돌아오면 제일 위에 있고, 그럼 또 제일 위에 있는 그 옷으로 손이 가고 하는 무한 반복이었다.
별거 아니긴 해도, 남편에게 그런 소리를 듣자 자존심이 상했다.
남녀 학생 비율이 1:1 정도인 과였기에 공대 아름이까지는 아니었지만, '공대 여자가 치마도 입냐'는 구시대적인 선배, 동기들의 구박속에서도 치마를 꿋꿋이 고집했던 나였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는 내 자존심은 하이힐이라고 말하고 다닐 정도로 365일 중에 350일 정도는 구두만을 신었다. 지금은 신지도 않는 신발들은 곧잘 짐짝 취급을 당하지만, 어쩐지 미처 모두 보내지 못한 내 20대에 대한 미련 같아 녀석들을 신발장 구석에 잘 모셔두었다.
그래, 오늘 내가 뭔가 보여주지! 싶어 졌다.
퇴근시간 즈음 회사와 집 중간쯤에 있는 쇼핑몰에서 만나자고 남편과 약속을 잡고, 부지런을 떨어봤다. 우선 가장 먼저 옷장 깊숙이 넣어둬 있는 줄도 몰랐던 원피스를 새삼 꺼내 입어봤다. 왜 몸무게는 임신 전으로 돌아왔는데 뱃살은 남아있는지 모르겠지만, 거울을 보며 옆으로 서 배에 힘을 줘 보니 그런대로 나쁘지만은 않은 것 같았다. 어울리는 재킷을 꺼내고 양말을 꺼내신는데 아차, '이 옷은 모유수유가 불가능하구나. 갈아입을까?'싶었다. 잠시 고민했지만, 에이~ 밖에 그리 오래 있을 것도 아닌데 싶어 계속 준비를 서둘렀다.
보채는 아이는 딸랑이로 달래며, 이번에 우리나라에서 사 와 아직 포장도 안 뜯은 화장품을 꺼내 부지런히 얼굴에 바르고 있는데 남편에게 전화가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