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진학한 대학이 유토피아였냐고 물으면. 난 Yes다.
머리띠를 끼고 벚꽃 날리는 배경의 우아한 모습은 아니었지만, 유토피아는 확실했다.
난 서울로 유학해, 공대에 왔다. 그 화려한 도시의 새로운 배경아래 펼쳐진 학교생활은 신기했다.
여중, 여고를 졸업한 내게 공대에 득실대는 서울, 남자 동기들은 외계인이나 외국인보다는 조금만 친근한 새로운 생명체 같았다.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싱긋 웃으면서
"그럼, 너는 지방에서 온 거야?"
따위의 소리를 뱉어냈다. 까르르 꺅꺅 - 쟈 지금 머라카노!!
어색해서 팔 한쪽이 쭈뼛한 느낌이었다.
"한수레! 두 수레! 원 투 쓰리 포!"
아마도 한 백 명쯤?
강의실을 채운 선배들이 만들어내는 함성으로 쥐어짜는 강압적인 장기자랑은 지금 생각하면 너무너무 촌스러웠다. 하지만 간신히 실삔만 뽑고 갓 상경한 나는 더더욱 촌스러웠다.
'내가 지목당하면, 어쩌지? 뭐 부르지?' 속으로 수선을 떨며 푸닥거리다가,
'그래, 장나라 노래를 불러야지. 나라언니 싫어하는 사람은 없으니까' 하고 다짐했다. 다른 플랜 B는 없었다. 나는 내 앞에 누군가가 내 노래를 뺏어가지 않을까 초조하게 기도했다.
그리고 이윽고 내 차례가 되었다.
"나도 여자랍니다 - 그대 곁에 있을 때면, 부드럽고 약해지는 마음"
다행히 노래는 뺏기지는 않았다. 하지만 필살의 무기였던 내 노래는 한마디로 노잼이었다. 격려도 야유도 아닌 어중간하게 쏟아지는 박수. '그래 그만하면 됐으니까 내려가 -' 하는 듯한 사람들의 텁텁한 반응이 못내 서러웠다. 그날,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아무도 내 기억 몬한다. 괘안타' 하는 까슬까슬한 위로로 스스로를 달랬다.
OT 숙소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도 이 촌스러운 장기자랑의 순간은 어김없이 돌아왔다.
그리고 여전히 난 세련된 대안이 없었다.
얼마나 세련되지 못했는지, 나조차도 내가 불렀던 노래가 기억나지 않는다. 대충 또 기억에서 지워질 만한 흔한 노래를 그냥저냥 한 실력으로 불렀던 것 같다.
하지만 난 이날 내 친구가 불렀던 노래만큼은 아직도 선명히 기억난다.
'카페'에서 미리 친목을 다지고, '신입생 간담회'에서 얼굴을 텄다는 남녀 동기 둘이 나와 자두의 '김밥'을 듀엣으로 불렀더랬다. 그들은 무반주에 생목으로 노래해야 하는 수치심을 비웃듯 훌쩍 뛰어넘어, 김밥 마는 안무까지 야무지게 좌우로 맞춰왔다.
"잘 - 말아줘! 잘 눌러줘. 김밥이 김에 달라붙는 것처럼 너에게 붙어 있을래"
버스 안은 이미 노래를 잘하고 못하고는 관심사가 아니었다. 뜨거운 반응이 폭발했다. 듀엣으로 무대에 섰다는 사실 만으로 '재네 무슨 사이야?' 하는 수군거림이 퍼졌고, 오티 내내 분홍분홍한 연애설을 몰고 다녔다.
안타깝게도 이 둘은 끝끝내 사귀지 않았다.
하지만, 2박 3일의 짧은 오티 끝 무렵, 다른 방에서는 우리 과 커플 1호가 탄생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청춘. 어감마저 푸르른 그 청춘이란 단어에 폭 쌓인 그들의 속도전을 겉돌며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흥이 돋았다.
봄. 봄 그 차제였고, 새로운 경험의 연속이었다.
술이란 걸, 마시기 시작했다. 취하는 건, 전무후무한 충격적인 경험이었다. 내 안에 흥을 손끝 발끝부터 차근차근 끌어모아 둥글게 뭉쳐 띄우는 것 같은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봄꽃이 핀 한강으로 인라인 스케이트도 타러 다녔고, 유행하던 이대 앞 사주카페도 가봤다. 그곳에서 방금 고3에서 탈출한 나를 사주 아저씨는 '평생 공부할 사주'라고 단정 지었다. 그런 그의 말을 전적으로 믿진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종류의 새 경험들이 선명한 흔적들을 남긴 건 분명했다. 그 증거로 10년쯤 지난 뒤에도, '운전하지 마라. 운전하면 사지가 절단된다'던 그때 그 사주 아저씨의 무시무시한 말이 가끔 생각났다. 덕분에 난 장롱면허를 극복해 내기가 유난히 힘들었다. 운전대에 앉을 때마다 그 이대 앞 사주카페가 흐릿하게 오버랩됐다.
사실 대학교에 막 입학해서는 딱히 뭔가를 나서서 하지 않아도 신이 났다. 공강시간마다 볕이 쏟아지는 캠퍼스를 부유먼지처럼 떠돌아다녔다. 농구하는 선배들도 구경했고, 정문 앞 계단에 앉아 오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시간을 흘리기도 했다. 친구들과 학식 메뉴인 김치볶음밥이나 팔각정에 파는 라면정식으로도 수다를 떨었다. 공대 옥상에서 무가지를 깔고 누워 그런 사소한 것들에 깔깔 거리며 웃었다.
시간이 넘쳐흐르는 기분이었다.
당연했다. 밤 11시 반까지 교실에 묶여 단단히 조여놓았던 하루를 한 번에 풀어헤쳤으니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 시간의 홍수 속을 유영하며, 다양한 색의 새로운 것들을 빨아들였다.
금요일 오전은 수업을 몽땅 빼서 매주 조조 영화를 한편씩 봤다. 이건 내게 한 달에 만 육천 원으로 즐기는 최고의 사치였다. 무슨 영화인지는 중요치 않았다. 상영관에 걸린 영화를 대충 다 본 것 같다. 덕분에 연말쯤에는 CGV VIP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또 일주일에 몇 시간쯤은 도서관에 틀어박혔다.
학교 도서관에는 지금까지와는 판이하게 다른 새로운 책들이 보드라운 숨을 고르고 있었다.
입시를 위한 지금까지의 독서는 문학적 가치가 켜켜이 쌓인 귀- 한 글들을 하나하나 밑줄 그어가며 새기는 과정이었다. 하지만 나 혼자서 제멋대로 하는 독서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가볍고 짜릿했다.
설탕에 절인 레몬처럼 겉 멋에 잔뜩 절여져, 줄거리는 한두 줄로 요약되는 (당시의) 최신 소설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문학잡지라는 것도 발견했다. 마음을 몽실몽실하게 하는 일러스트에 캘리그래피로 쓰인 글들은 스무 살의 나를 벅차게 하기에 충분했다.
더 이상 대학의 낭만이 없다며 선배들과 떠들던 내게 '낭만이 뭐냐고 묻는 순간부터 우리는 늙어갈 일만 남았다.'라고 한방을 날리거나, 술 마시고 취하는 게 일과의 중요한 부분이었던 당시의 내게 '게을리하세. 한잔하고 사랑하는 일 빼고 모두 다'하는 문구는 찡 - 한 울림이었다.
곰스크로 가는 기차나 연금술사의 '마크툽' 같은 단어는 공대였지만 책 좀 본다 하는 친구들 사이의 암호 같은 역할을 했다. 친구와 서로의 싸이월드 일촌명을 마크툽으로 지었다.
더 이상 독서는 '얄리얄리얄라성 얄라리 얄라'에 이어진 멀위와 달래 밑에 밑줄을 긋고 '화자가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는?' 하는 식의 난제가 아니었다.
직관적이고 쉽지만, 그럴 듯 해보이는 대문학의 시대가 내게 열렸다.
그때 읽었던 글 중에 '성공을 위한 다섯 가지 요소'에 대한 내용이 있었다.
글에서는 성공을 위한 다섯 가지 요소로 끼, 깡, 끈, 꼴, 꿈을 꼽았다.
그때의 첫인상은 '반복되는 쌍기억이 만들어내는 어감이 귀엽다.' 정도였다.
그리고 천천히 내용을 곱씹을수록 글이 얼마나 핵심을 잘 짚어냈는지 실감이 났다. '이 다섯 가지 조건이야 말로 원하는걸 한방에 척척 일궈나가는 핵인싸의 성공 공식이구나.' 싶었다. 그것들이 내겐 없었다.
난 학과 장기자랑에서 여유 있게 노래 한 곡 할 만큼의 끼도 깡도 없었다. 혈연, 지연을 포함한 끈도 없거니와, 과 커플 1, 2, 3, 4, 5, 6, 7, 8.... 호를 차지할 만큼 눈길을 끄는 꼴도 물론 없었다.
거기에 더해 꿈마저 들이부은 소주에 지워졌는지 희미해졌다. 무엇이 되고 싶다는 열망보다는 아이라인을 먼저 그려야 하는지, 마스카라를 먼저 해야 하는지 따위의 고민이 더 컸다.
그때는 그냥 '그렇구나' 하고 지나쳤다. 더 이상 이 글을 붙잡고 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 글이 사주 아저씨의 말처럼 아직까지도 선명한 이유는, 아마도 이때가 처음으로 그렇게나 붙들고 매달리던 [꿈]을 성공을 위한 한 도구쯤으로 강등시킨 그 시작점이기 때문이지 싶다.
익숙한 '개구리 중사 케로로'를, 갑자기 서점에서 '개구리 하사 케로로'로 강등되어 만났을 때처럼 부자연스러운 느낌이었다.
하지만 쓱 - 지나쳐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