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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맨디 Aug 02. 2023

회사는 숫자를 좋아한다.

"엄마! 합격했"

어버이날을 하루 앞둔 2008년 5월 7일, 합격자 발표가 났다.

15년이나 지났지만 아직 그 날짜까지 기억한다.


노트북이 없었기에, 난 학교 도서관 1층에 있는 공용 컴퓨터에서 면접 결과를 확인했다. 벌벌 떨리는 손가락으로 '확인' 버튼을 누르던 순간! 세상은 5초쯤 멈췄다가 다시 돌아갔다.

하얀 배경이 감격한 표정으로 어퍼컷을 날리는 그의 사진을 바뀌, 난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지나가던 친구가 그런 날 발견하고 더 수선을 떨었다. 둘이 껴안고 한참을 펄쩍펄쩍 뛰었다. (고마웠어 동희야!)


"엄마! 내 엄청 잘했으니깐, 어버이날 선물은 없다! 알았나? 안줄꺼야" 내가 너스레를 떨자,

"응 그래! 이것보다 더 좋은 선물이 세상에 어디 있어" 하며 이번엔 엄마가 뚝뚝 울었다. 머쓱한 뿌듯함에 헤헤 거리며 실없이 웃었다.


조금 더 설명하자면, 내가 최종 합격한 회사는 지난 취업 시즌에 유일하게 내게 면접까지 기회를 줬던 바로 그 회사였다. 취준 기간은 남들보다 길었지만, 결과만 보면 난 딱 한 회사에 6개월 간격으로 두 번 면접을 보고 최종 합격했다.


6개월. 그 기간 동안 고시원안에서 가위를 정말 많이 눌렸다. 보통은 그 상자갑만 한 공간을 벗어나지 못하게 누군가 날 짓누르는 꿈이었다. 매번 허공에서부터 형체도 없는 그것이 점점 커지더니, 숨쉬기 어려울 만큼 날 덮쳐왔다.

그렇게 박스에 갇힌 것처럼 찐득 거리는 시간이었지만, 객관적으로 '고작' 6개월은 짧은 시간이었다.

그 사이 일궈낸 것도 쥐뿔 없었다.

토익점수는 80점쯤 높아졌고,

기사시험도 필기만 합격해서 이력서에 쓰지도 못했다.

학점이 변할 리도 만무했다.


하지만 결과는 달라졌다.

대체 뭐가 변한 걸까?


좀 악이 받쳤으리라. 그런 독기가 면접에서 조금은 드러났을 것이다. 긴장하고 주춤거리는 것보다는 의지가 활활 타오르는 편이 면접에서는 보기 좋다.

그리고 또 다른 이유는 아마도 내가 더 이상 막연한 꿈이 아닌, '연봉 사천'이라는 목표를 쫓았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이 부분이 회사의 취향을 조금은 더 맞춰준 것, 일지도 모르겠다.


회사는 선명하게 숫자로 쓴 것들을 좋아한다.

그 정도가 가끔은 '회사란 숫자로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을 어떻게 숫자로 표현할까에 대해 고민하기 위해 모인 곳이 아닐까' 싶을 만큼 별의별 걸 다 숫자로 쓴다.

대차대조표도 숫자로 이뤄져 있고

KPI도 숫자와 백분율로 표시하고

프로젝트 성과도 비용과 수익으로 설명해야 한다.

위기도 발생 확률과 발생했을 때 영향을 행, 열로 교차해 그 등급을 숫자로 매겨두고,

필요한 리소스의 양도 시간당 처리가능한 업무양으로 산출해 계산한다.

내가 가장 지표로 나타낼 수 없다고 확신했던 개개인의 업무 평가마저도 숫자와 숫자로 적힌 4x4의 매트릭스로 주어졌다. 숫자는 논란의 여지가 덜했다. 해마다 고과철이 되면, 반박할 구석이 없는 '숫자'로 완성된 고과를 받아들였다.


회사는 그런 곳이었다.


회사원이 되고 2년쯤 지나, 한 학년 위 학교 선배의 취업을 도와준 적이 있었다. 모의 면접을 하며 '기업의 목적이 뭐냐?'라고 묻는 내 질문에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것이라는 선배의 대답에 놀랐다.

"봉사도 하고 수익을 환원도 하고. 어려운 사람도 돕고..."

그 대답에 난 사색이 되어서, 2년간 들은풍월을 읊어댔다.

"좋은 일이고 회사에서 해야 하는 일은 맞죠. 하지만 회사의 궁극적인 존재의 목적은 아니죠. 회사의 목적은 존속이에요. 수익을 창출해서 고용을 확대하고 끊임없이 살아남아야죠."

늘 생존을 위해 유망 사업을 찾고, 수익 창출을 위해 숫자를 어지럽게 섞어놓은 표 무더기를 분석하는 게 일상이었다. 어느새 그 생활이 익숙해져 그의 해맑은 대답이 낯설어졌다.

'쩝. 세상 물정 모르네.' 입 밖으로 내진 않았지만 분명 내 표정에는 그 찝찌름한 생각이 비쳤으리라.


그렇게 회사원이 되었다.

여행을 계획해도 엑셀을 펼쳐서 숫자로 표현했다. 지역별로 항공권, 호텔가격, 비용 등과 기대되는 행선지를 엑셀 스프레드 시트로 작성했다. 엑셀로 표현할 수 없는 세계는 없다고 굳게 믿었다.

새해 계획을 작성하는 다이어리도 달라졌다. 스페인어 공부하기 / 영어 회화 하기 / 운동 시작하기 같은 두루뭉술한 이야기들은 자취를 감췄다. 대신 Dele B2 취득 / OPIC AL 취득 / 요가 주 2회 같이 숫자와 확실한 목표만 남았다.

A goal without a plan is a just wish.

계획 없는 목표는 한낱 꿈에 불과하다. -생텍쥐페리


을 위해 달성해야 하는 것들을 구체화하면 목표가 된다.

그리고 그 목표를 짧은 기간으로 나누어 계획으로 만든다.

계획에 시간과 달성을 위한 방향을 덧붙이면 비로소 전략이 된다.


그게 꿈을 이루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그때 읽고 또 읽던 자기 계발서들은 그렇게 주장했고, 난 착하게 착실하게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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