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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맨디 Oct 19. 2023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Taba naba naba norem,

Tugei pe neiser mi, dinghy ge nabatre,

Mi ko kei miserer em nebewem,

Taba naba norem


- 위글스 TABA NABA, 토레스 해협의 전통 노래-




호주에 21년 만에 처음으로 'Yes' 투표가 있었다.

지금까지의 투표가 누군가의 당락을 결정짓는 것이었다면, 이 투표는 21년 만에 헌법을 개정하는 투표였다.


당신의 선택은 'Yes"인가? 'No'인가.


매번 선거를 앞두면 지지자들은 집 앞 담장에 거침없이 본인의 의사를 표현해 둔다. They said Yes!


유튜브 광고에도, 거리 곳곳에도 이 투표에 대한 홍보로 나라가 한동안 떠들썩했다. 내용은 간단하다.

"당신은 에보리진, 그리고 토레스 해협 제도의 주민들에게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대표권을 부여하는 법안에 동의하십니까?"


"Yes"

혹은 "No"


답은 딱 두 가지로만 간단하게 할 수 있다.

하지만 헌법의 첫 꼭지를 수정하게 될 이 문장의 영향력은 결코 간단하지 않다. 지금 호주 인구 전체에 약 3% 밖에 되지 않는 에보리진에게 의회의 모든 법안에 목소리를 높일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겠다는 뜻이다.

헌법이 수정되는 걸 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그 파급력이 감히 짐작되지 않는다.





호주는 피의 역사를 가졌다.

'가장 오래된 사람들'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에보리진은 약 65,000년에서 80,000년 전에 호주에 정착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가장 오래된 사람들이 가장 멀리 떨어진 곳에 살던 새로운 이들을 만난 것이다. 에보리진의 문화는 전적으로 배척한 채, 절대 뒤로 걷지 않고 전진한다는 호주의 두 동물, 캥거루와 이뮤 (타조와 비슷하게 생긴 호주 새로 타조와는 다른 종으로 분류한다.)를 상징으로 하는 오스트레일리아, 호주가 탄생했다.



에보리진은 토착 원주민 민족으로는 드물게 언어를 가지고 있었고, 자연에 공존하는 문화를 발전시켰다. 하지만 땅과 문화를 고스란히 빼앗긴 채 물러나게 됐다. 그렇게 아주 소수만이 남아, 아주 작은 문화의 싹만을 박물관에 전시하듯 남겼다.






긍정적인 건 시간이 지나면서, 이 메마른 노란빛 호주 땅에도 작은 변화의 바람이 일고 있다는 점이다.

몇 가지 흔적이 있었다.


가장 가까운 변화는 우리 집안으로 성큼 찾아왔다.


어느 날부턴가 우리 딸은 '부메랑 피플'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한 것이다.

어린이집에서 배웠다며, 그들은 우리에게 땅을 나눠준 (Shared) 고마운 이들이라는 말을 자주 했다.

정식으로 학교 프로그램에 에보리진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시간을 편성했다. 교육은 강력한 힘을 가졌기에, 감히 가장 크고 고무적인  변화라고 말할 수 있다.

당장 20-30대만 해도 호주에서는 이런 교육을 받아본 이가 없었다.


에보리진을 의식한 이후로 영화관에서도, 예술 전시에서도 그들에 대한 노트를 쉽게 볼 수 있었다.

I acknowledge the Traditional Owners of the land on which we are meeting. I pay my respects to their Elders, past and present, and the Aboriginal Elders of other communities who may be here today.

크고 작은 공적인 자리에서 해당 문구를 어린 시절 우리의 '국기에 대한 맹세'처럼 왼다.

그들과 그들의 오래된 역사를 존중하겠다는 다짐 같은 문구이다.


시스템도 조금 변했다.

호주에 한 번이라도 이력서를 넣는다면, 에보리진인지 확인하는 문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을 채용하면 정부에서 회사에 혜택이 주어진다. 특정 회사들에서는 에보리진을 상대로만 하는 교육 프로그램도 진행한다.  회사에서 재정적인 지원을 하면, IT 기술을 익혀 바로 현업에 투입한다는 계획이다.


작은 노력들이 일렁이듯 서서히 일고 있었다.

그리고 그 정점이 바로 Yes 투표였다.




비록 오늘의 그들이 소수 일지라도, 이 땅의 오랜 주인임을 인정하고 그들에게 목소리를 부여하겠습니다.

동의하십니까?




투표의 결과는 No. 였다.

호주인의 약 80%가 투표에 참여했고, 그중 60%는 No를 택했다.

종이에 또박또박 NO라고 거부의 의사를 써 내려갔다.


Yes라고 또박또박 써 내려간 사람들은 대략 40% 정도였다.



멜버른에 봄이 찾아왔다.

그리 춥지 않은 겨울이었는데도,

봄이 오자, 따뜻한 기운에 만물이 생동한다.

레몬은 열매를 맺었고, 시들어 색이 죽었던 나뭇가지에 초록이 고였다.

흔적을 찾아볼 수 없던 작은 꽃나무들이 꼼꼼히 싹을 틔워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빼앗긴 그들의 들에는 이번에도 봄이 들지 않았다.

혹독한 멜버른의 가장 시린 바람이 그대로 서렸다.

역시 한번 빼앗긴 들에는 쉽사리 겨울이 가시지 않는다.





그들의 끝나지 않는 겨울에 마음 한쪽이 이겨지면서도,

우리의 들에 겨울 끝마다 당연하듯 찾아오는 봄을 새삼 감사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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