뾰족한 변곡점이 그려지는 순간이 있다.
내 경우는 세 번, 그런 경험이 있었다.
1.
난 줄곧 글 쓰는 게 좋았다. 초등학교 때는 길이로 승부를 보는 산문이 좋았고, 중학교 무렵은 시에 빠졌다. 그 담백한 문장이 그려내는 울림을 들여다보는 일이 즐거웠다. "살아가는 것은 외로움을 견뎌내는 일"이라니. 그런 위로가 마음 안에 고요히 울리는 게 좋았다.
그러다 연예인을 좋아하기 시작하면서는 방송국 PD가 되고 싶었다. 꽤나 간절한 편이어서 이메일로 몇몇 PD들을 인터뷰하면서 조언을 구하기도 했었다. 그들은 입을 모아 강조한 건 '언어의 힘'이었다. PD란 결국 흐름을 읽어내고 그걸 방송으로 풀어내는 일이기에 소통과 이해가 중요하다고 했다.
이 모든 것들은 문과에 기반을 둔 일이었다.
그래서 난 큰 고민 없이 스스로를 문과적인 사람이라 결론 내렸었다. 연예인을 좋아하게 되면서 시 읽기를 멈췄고, 또 시간이 흘러 그 좋아하던 덕질도 시들해졌지만 한번 도달했던 결론에는 변화가 없었다. 난 문과인간이었다.
그즈음, 영어를 가르치던 담임선생님이 나를 따로 불렀다.
"선생님이 살아보니까, 문과를 나와서는 밥 먹고 살게 없더라. 이과 가라!"
기어코 HOT를 보기 위해 PD가 돼야 한다거나, 시집을 품고 살던 시절의 나라면 다른 선택을 했으려나? 모든 게 시들하고 지루하다 느껴졌던 그때, 선생님의 말씀은 작은 일렁임이었다. 그렇게 충동적으로 이과를 선택했다.
물론, 이과에 간 첫해 난 엄청난 고전을 겪어야만 했다. 공통 수학도 어려운데 수학 2는 말할 것도 없었다. 충동적인 선택은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2.
이후로 난 대충 수능 점수에 맞춰 공대로 흘러들었다.
공학수학이나 공대의 미적분(Calculus)에 비하면 수학 2는 쉬운 편이었다. 교수님은 전공책 첫 챕터를 '고등학교 때 다 배운 거니까 넘어가자'며 굵직하게 넘겨버렸다.
대학생활 내내 감당 안 되는 공부를 하는 기분이었다. 당연히 취업 전선에 들어설 즈음, 나는 연신 서류탈락의 고배를 마시게 됐다. 채울 것 없는 이력서 덕에 비어버린 속에 쓰디쓴 잔을 연거푸 들이켰다. 뭐 지원했다 하면 탈락이라, 대한민국에 있는 대부분의 회사로부터 사과문을 받아대던 차였다. "귀하의 능력은 출중하나, (...) 유감입니다." 소주가 달게 느껴질 만큼, 썼다.
보여줄 수 있는 게 어중간하니, 오히려 남는 건 대기업 밖에 없었다. 삼성그룹만큼은 나처럼 초라한 스펙을 가진 이들 모두에게 인적성 시험이라도 볼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곳이었다. 취업이 장애물 경기라면, 고작 첫 번째 허들 하나의 높이를 낮추는 것인데 큰 기회처럼 느껴졌다.
물론, 회사 입장에서는 이 작은 허들 높이 변화에 엄청난 비용을 치워야 한다는 걸, 입사 이후에나 겨우 알게 되었다.
내게 다른 방법은 없었다. 이 인적성에 모든 걸 걸어야만 했다.
고민이 된 부분은 삼성 계열사 중에 어느 곳을 택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선택이 너무 많아 조금은 뽑기 같은 기분도 들었다. 그래도 당연히 삼성전자겠지, 하며 드롭다운 메뉴를 선택하려는 찰나 교수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프로젝트 단위로 돌아가는 건설사를 가세요. 일단 들어가기만 하면, 가장 역동적이고 밥줄 긴 일이 될 겁니다."
밥줄이 길다라.... 마우스 휠만 뱅뱅 돌리다 '아 모르겠다' 하고 건설사를 지원했다. 두 번째 변곡점이었다.
3.
내가 입사하던 무렵 회사는 대 호황을 누리고 있었다. 난 그 흐름에 휩쓸려 운 좋게 입사했다는 편이 옳은 분석이라고 생각한다. 어느 정도였냐 하면, 핸드폰을 사러가도 대리점 직원이 우리 회사의 주가 전망을 물어봤다. 그렇게 모두가 주목할 만큼 성과를 내고 있었다.
마치 회사가 날개라도 단 것 같았다.
그리고 이내 그 날개를 뚝 떼어 내더니, 나를 전 세계로 날려 보냈다.
첫 출장을 중미, Trinidad & Tobago 섬으로 시작했다. 같은 해에 5박 6일로 멕시코를 다녀오기도 했다. UAE 사막을 거쳐, 중동, 일본, 유럽, 미국,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뭐 안 가본 나라가 없게 쏘다녔다. 동기들은 사하라 사막 바로 옆동네로 파견을 가기도 했다.
우리 모두는 '역마살'이라고 불러도 좋을 기질을 옆구리에 끼고 살았었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나자, 우습게도 내가 세계 어디에서도 살아남을 것 같은 자신감이 솔솔 생겨났다. 퇴사를 결정하던 무렵, 미국, 싱가포르, 호주, 홍콩 뭐 어디든 날 받아주는 곳으로 가 살리라 했다.
오만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확실히 오만한 생각이었다.
고민 끝에 호주로 정착지를 정하고, 대학원을 다녔다. 영어 점수를 받고 비자를 받는 데까지는 평균에 비하면 짧은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누리던 것들을 비슷한 수준으로 이곳에서 끌어올리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육아 휴직 중에 권고사직을 당하기도 했고, 코로나를 직격으로 맞아 합격했던 일들을 줄줄이 취소당하기도 했다.
남편도 비슷한 과정을 겪었다. 식당을 운영하던 요리사에서 헤드헌팅 회사 매니저가 될 때까지 굴곡이 많았다. 한 번은 다니던 회사가 하루아침에 호주 비즈니스 전체를 청산하기도 했다. 또 한 회사에서는 최고 실적을 낸 이듬해 지난해만큼 실적이 안 나온다며 '당일 해고'를 통보하기도 했다.
남편과 내가 모든 게 비로소 안정되었다는 결론을 낸 건 최근의 일이다. 합산 연봉이 목표치에 들었고, 아이는 어린이 집을 졸업해 공교육을 시작했다. 학비가 눈에 띄게 줄었다. 물론 우리보다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사람들은 셀 수도 없이 많을 것이다. 한 가지 분명한 건 우린 적당히 먹고 살만 하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돈을 더 벌면, 책임이 너무 많아지니까 우린 이 정도로 가늘고 길게 가면 되겠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 이야기를 한지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아, 남편이 잠을 설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호주의 굵직굵직한 회사 세 군데의 CEO, CTO를 한 주에 모두 만나고 오던 주말, 남편은 잠드는 대신 컴퓨터 앞에 밤새 앉았다.
다음날 아침, 토끼처럼 충혈된 눈으로 말했다.
"우리 직업은 곧 없어질 것 같아. 큰일 난 것 같아."
마지막 변곡점을 알리는 말이 세상밖으로 뚝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