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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AI 밥그릇 02화

천천히 다가오는 죽음

by 맨디

장담컨대 오늘을 살아가는 이들 중에 AI를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너무 무서워 아빠 등 뒤에서도 손가락 사이로 숨어봤던 터미네이터 2부터 AI는 언제나 다루기 좋은 소재였다. 터미네이터 2는 무려 1991년 작이다.


물론 영화 속 이야기만도 아니다. 현실에서도 AI는 자주 불청객처럼 찾아왔다. 이세돌과 알파고가 대국을 하던 몇 주간 매일 쏟아지던 기사가 생생하다. 연패를 거듭하다 그가 알파고를 이겨내던 날, 사람들은 '인류의 승리'라며 환호했다. 방송에서는 한 수 한 수를 꼼꼼히 복기하며 통쾌한 승리를 곱씹었다. 엊그제 같지만, 이 또한 10년 전의 일이다.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AI는 늘 그렇듯 그곳 어디엔가 있었다. 호환 마마보다 비디오가 (더 정확히는 비디오 속 불건전한 콘텐츠들이) 더 무서운 일이라고 말하던 그때부터 AI는 늘 '당연히 닥칠 것 같은 막연한 미래의 포지션'을 맡고 있었다.

TV나 영화 속에 등장하면 "또 AI 타령이야?"싶을 만큼.


그래서 남편의 반응이 오히려 낯설었다.


"갑자기? 갑자기 AI?"

"응. 나 지난주에 굵직굵직한 미팅이 많았잖아. 한 CTO가 그러더라고. 지금 자기 회사 IT 인력의 70%는 오늘 당장 없어도 상관없는 인력들이라고."


그렇지 않아도 쏟아지는 기사들을 눈여겨보던 차였다.

-마이크로 소프트가 9,000명의 인원 감축을 단행했다.

-세일즈 포스가 ERP 시스템에 AI 코파일럿을 적용하면서 수천 명을 감축했다.

아니 더 정확하게는 눈여겨보던 게 아니었다. 굳이 찾아보지 않아도, 이런 기사들은 포털 맨 앞장을 차지하고 있었다.


무언가 일어나고 있다는 느낌은 가지고 있었다.

다만, 저 멀리 실리콘벨리에서 벌어지고 있는 거지, 아직 나와는 거리가 먼 일이었다.


"필요 없는 인력이라고? 근데 왜 안 잘라?"

"자를 수가 없다는 거야. 사회적 파장도 고려해야 하고, 당장 AI로 모든 걸 갈아타버린 회사에 누가 남아 있고 싶어 하겠냐고. 그래도 아직은 30%의 인력이 필요한데 말이야"

"아, 그래서 필요 없는 인력임에도 안고 가겠다는 거야?"

"아니. 그건 아니고. 기회를 주겠데."

"기회? 무슨 기회?"

"AI 시대에 필요한 인력으로 변할 수 있는가, 아닌가를 내년 연말까지 지켜보고 해고 대상자를 정하겠다는 거지."


혼란스러웠다.

이 대화를 하던 그날 저녁만큼은 AI는 영화 속 모습 그대로 선명한 공포의 색을 하고 있었다.

매트릭스처럼 AI에 의해 연료로 소모되는 인간의 모습이나, 레디 플레이어 원처럼 슬램가의 사람들이 가난을 피해 가상의 세계로 완전히 도피해 버리는 그림들이 눈앞을 스쳤다.


"내년 연말?"

"응. 내년 연말까지는 AI에 적합한 사람들로 회사 전체를 다시 셋업 하겠데"


그러면서 남편은 지난밤 고민의 흔적을 보여주었다. ChatGPT와 장문으로 나눈 커리어에 대한 고민들이었다. 그 끝에 남편의 직업에 대해 AI가 내놓은 의견은 "a slow death"였다.

그는 "천천히 죽음을 맞이할 직업" 혹은 "이미 서서히 죽어가고 있는 상태"라고 단호하게 말하고 있었다.


짧게는 3년, 아주 길어야 10년.


남편과 나의 커리어는 분명 그 종말을 맞이할 것이다.

감히 예측도 못했을 만큼 그 끝이 가깝게 다가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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