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SF컨벤션 : 다함께SF #dasf 에 기고한 발제문입니다.
소설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공부해 본다면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소설의 정의란 무척 간단하다. 소설이란 ‘있을 법한 이야기’를 ‘그럴 듯하게 쓰는 것’이다. 서사 그 자체의 설득력과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이의 설득력이 모두 짜임새 있게 어우러져야만 독자를 서사에 몰입시키는 게 가능하다.
우리가 흔히 SF라고 줄여 부르는 이 장르의 풀네임은 Science Fiction, 즉 ‘과학소설’이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뒤에 Fiction이 붙은 이상 SF도 소설의 기본적 얼개에서 벗어날 수 없다. 즉 ‘있을 법한 이야기’를 ‘그럴듯하게 써야만’ 한다. 소위 SF라고 여겨지던 것들이 성큼 현실로 다가와 버린 요즘 세상엔 많이 없어진 편견이긴 하지만, 그런데도 여전히 1965년생 이상의 세대에게 SF에 관해 묻는다면 ‘있을 법한 이야기’로 여기지 않을 확률이 높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SF는 가장 ‘있을 법한 이야기’다. SF에 대해서 마치 미래를 예견하는 예언서처럼 여기는 사람들도 있다는 점까지 돌이켜보면 그 점은 더욱 분명해진다. 그런데도 SF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공상적인 이야기로 여겨지는 맥락을 톺아본다면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말하고 있기 때문일 터다. (모든 미래가 그렇듯이) 그 미
래는 도달할지 도달하지 않을지 정해져 있지 않다. 그리고 우리가 선 현실 위에서 도달할 미래의 기술적 측면을 예측하는 건 그리 대중적인 작업은 아니다. 그러나 실제로 도달할 가능성이라는 차원에서 보았을 때 SF야말로 ‘있을 법한 이야기’의 새로운 지평을 펼쳐낸다.
무엇보다도 SF는 단순히 미래세계에 살아가는 인물들을 그려내는 것만이 아니다. 미래세계의 특정한 환경·기술·형태가 어떤 방식으로 세계에 작동하는지를 다루는 서사다. 말하자면 ‘과학’이 소설 속에서 등장인물과 같이 기능한다고 볼 수 있다. 소설을 비롯한 대부분의 서사는 등장인물에 이입해서 이야기를 따라가도록 구성되어 있다. 미래세계 그 자체에 이입해서 서사를 따라가게 된다면, 과연 지금의 현실은 어떻게 보일까. SF를 읽고 있는 사람은 자신이 사는 세계를 총체적으로 새롭게 바라보지 않을 방도가 없다. 그리고 이 세계가 도래했을 때 자신이 어디에 서 있을지까지. 바로 이 지점이 끊임없이 인문학과 SF를 연결짓게 하는 부분일 것이다.
최초의 SF가 무엇인가는 상당히 논쟁적인 지점이다. 케플러의 《솜니움》이냐,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이냐가 한쪽씩을 차지하고 서 있다. 하지만 어느 쪽이건 SF라는 장르의 본질을 보여준다는 점에서는 일치한다. 케플러는 달이라는 공간으로 ‘나아간’ 인간의 이야기를 다루었고, 메리 셸리는 생명체의 창조라는 영역으로 ‘나아간’ 인간의 이야기를 다루었다. SF는 미지의 영역을 향해 발을 내디디고 그 미지의 영역을 정복하는 인간의 이야기를 다루는 것으로 출발했다. 그러므로 가장 대표적인 SF가 지구인 누구에게나 미지의 세계인 ‘우주’를 여행하는 서사라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순서겠다.
활발하게 SF를 창작한 초기 작가 중의 한 명인 쥘 베른의 소설들은 인류의 기술적 진보에 대한 꿈과 희망이 넘쳐흐른다. 무기 애호가들이 새로운 모험을 찾아서 대포에 몸을 싣고 달로 떠나는 《지구에서 달까지》는 인류의 신기술에 대한 확신이 넘친다. 이 신기술에 대한 확신은 소설이 창작된 1800년대 중반이라는 배경과 밀접
하게 연관되어 있다. 찰스 다윈이 《종의 기원》을 출간하고, 철도운송이 놀라운 속도로 발전하고, 유럽의 여러 국가는 전 세계를 전부 유럽에 복속시킬 기세로 뻗어 나가고 있었다. 세계는(국가건 자연이건 사회건) ‘유럽인’의 날카로운 지성 위에 철저하게 밝혀지고 ‘소유’되고 있었다. 어디든 발길이 갈 곳은 넘쳐흘렀다. 심지어는 우주까지. 그리고 이 쥘 베른의 활기찬 시대정신을 그대로 이어받은 장르가 바로 스페이스 오페라다.
〈스타워즈〉와 〈스타트렉〉은 ‘SF’라는 말을 들었을 때 대중적으로 먼저 떠오를 작품들이다. 동시에 이 두 작품은 압도적으로 많은 팬덤을 거느리고 있다. 가장 인기 있는 SF가 바로 스페이스 오페라라는 점은 SF의 ‘정신’에 대해 여러 생각을 하게 한다. 스페이스 오페라는 제국주의로서의 SF를 그대로 이어받은 SF라고 할 수 있다. 주인공은 미지의 우주로 모험을 떠나고, 우주에서 ‘주인공과는 다른(다양성을 확보한다기보다는 급이 떨어지거나폄하 신비로운숭배 생명체들인 경우가 많다)’ 인물들을 만나서 적을 무찌르고 세계를 평화롭게 ‘회복’한다. 정당한 왕국을 수복하는 〈스타워즈〉와 UN을 연상시키는 행성 연합을 확장하는 〈스타트렉〉 모두 분명한 제국주의적 함의가 보인다. 이 두 작품이 세상에 나온 1960~70년대가 냉전의 정점이었다는 점까지 고려하면 SF가 반영하는 시대정신이 얼마나 첨예하게 현실과 맞닿아있는지를 아주 잘 알 수 있다.
물론 SF가 반영하는 시대정신을 이렇게만 한정 짓는다면 SF와 인문학에 대해서 말하는 의미가 덧없이 축소되고 만다. 스페이스 오페라의 맞은편에는 ‘외계인’이 있다. 물론 외계인에는 다양한 종류의 외계인이 있다. 스티븐 스필버그가 재현하는 지극히 사랑스러운 외계인, 〈E.T.〉같은 작품도 외계인을 다루는 SF다. 그러나 좀 더
전통적인 외계인은 허버트 조지 웰스가 다루는 《우주전쟁》에 등장하는 종류의 외계인이다.
이 소설 속 외계인은 조금도 인간을 닮지 않았고 어딜 봐도 문어로 보인다(서양 문화권에서는 두족류가 그렇게도 무서운 존재인지, 종종 두족류를 공포의 대상으로 설정하곤 하는데 이 소설에서도 그렇다). 단, 식인문화를 가진 문어들이다. 인간의 피를 흡착하는 문어들을 피해 애를 쓰고 도망가는 인간들을 다룬 이 소설은 1800년대 후반에 출간되었다. 식민지를 확장하다 못해 달까지 가는 세계관이 나타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다. ‘인류의 피를 흡착하고 지구를 정복하기 위해 찾아온 외계인이 있다면’이라는 가정은 정복하는 땅의 독자들에게 정복당하는 이의 입장을 상상하게 하였다.
1950년대 영화 〈신체 강탈자의 침입〉에 등장하는 외계인들은 인간의 신체에 침투해서 감정 없는 존재로 인간을 복제해낸다. 외계인들에게 자아를 강탈당한 이들은 그저 신체가 존재할 뿐 내부는 텅 비어버리게 된다. 외계인들에게 신체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는 이미 빼앗긴 척을 하며 그들과 똑같이 감정 없는 태도를 따라 하며 살아가야만 한다. 소설 《신체 강탈자》와 영화가 1955년에 발표되었고, 1950년부터 1954년까지 매카시즘이 미국을 휩쓸었던 점을 고려해본다면 이 외계인이 무엇을 상징할지도 다양한 해석이 펼쳐진다.
그러나 역사상 가장 사랑받았던 외계인은 누가 뭐라 해도 스티븐 스필버그의 〈E.T.〉다. 지구에서 식물을 평화롭게 채집하던 외계인은 음흉하고 사악한 정부 기관에 쫓겨서 위험에 처한다. 외계인의 친구가 되어 거악인 정부에 맞서 외계인을 지켜내는 것은 순수하고 착한 어린이 친구들이다. 누구라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아름다운 동화다. 그러나 이 와중에도 이 외계인 이야기에는 ‘다른 존재’를 사회가 어떻게 대하는지, 그리고 창백한 푸른 별에 사는 인간들은 이 광활한 우주에서 ‘다양성’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담겨있다. 결국, 외계인을 다루는 이야기는 ‘타자성’에 대한 이야기와도 연결되는 셈이다.
1980년대의 SF라면 바로 사이버 펑크다. 《뉴로맨서》가 출간된 1984년은 매킨토시가 판매를 시작한 해기도 하다. 리들리 스콧은 매킨토시 광고에서 조지 오웰의 《1984》를 멋지게 오마주했다. 조지오웰의 《1984》에 나오는 듯한 전체주의 사회를 젊은 여성이 망치 하나로 때려 부수는 통쾌한 광고 위에는 ‘애플이 매킨토시를 소개하면, 당신은 왜 지금 1984년이 소설 《1984》와 같지 않은지 알게될 것이다.’라는 문구가 뜬다. 사이버라는 압도적인 공간이 얼마나 기대를 얻고 있었는지를 새삼 깨닫게 된다. 윌리엄 깁슨은 여기에서 사이버 공간의 정보를 통해 인간이 인간 외의 다른 존재로 해체될 가능성까지 나아갔다. 현재 소셜미디어에서 자아를 분열하는 인간의 모습은 윌리엄 깁슨이 상상했던 사례의 정보화 과정과 상당히 닮아있다.
사이버 펑크는 자연과 인공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장르다.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에 등장하는 안드로이드들은 지극히 인간적이다. 그들은 자율적이며 스스로 사고하고 삶에 대한 의지가 충만하다. 자신의 역사를 알고 있고, 그 연속선상에서 행동한다. 영화 버전인 〈블레이드 러너〉에서도 인간의 기억의 연속선상에서 살아왔기에 자신이 레플리카라는 사실을 모르는 레플리카를 등장시켰다. 주인공 릭은 도주한 안드로이드를 잡아야 하지만, 안드로이드들은 그 와중에서도 인간성을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
인간으로서의 총체성은 《뉴로맨서》에서 보듯 존재하지 않고, 필립K. 딕이 만든 안드로이드에게는 인간의 의지와 정서가 존재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과연 ‘인간’을 구성하는 실체인가.
《뉴로맨서》의 몰리는 영구적으로 이식된 은색 선글라스를 끼고 있고, 인조손톱 밑에는 자동칼날을 부착하고 있다. 반사 신경의 반응속도도 인공적으로 높였고, 시신경에는 시간을 자동으로 읽을 수 있는 장치도 부착했다. 몰리는 인공과 자연의 경계에 서 있다. 우리가 정의하는 ‘인간’의 기준을 뛰어넘기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한 인물이다.
몰리를 떠올리며 종아리뼈가 없이 태어난 모델 에이미 멀린스가 알렉산더 맥퀸의 패션쇼에서 달고 나온 아름답고 장식적인 원목 다리, 무릎 아래를 절단한 가수 빅토리아 모데스카의 플래시가 달린 반짝이는 금속 다리, AI가 장착된 의수로 피아노를 연주하는 제이슨 반슨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과연 인간이란 통합적인 존재인지 의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1977년에 출간된 아이작 아시모프의 《바이센테니얼 맨》에서 앤드류는 ‘인간’이 되기 위해 인간이라는 종의 특성을 하나하나 쫓아간다. 앤드류의 여정을 따라가며 독자들도 필연적으로 인간이라는 종은 무엇으로 구성되었는지를 따라갈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가운데 ‘자연적 총체성’이란 과연 얼마나 핵심적인 요소일까. 2000년대의 SF는 이미 현실로 다가와 있는 영역을 포함할 수밖에 없다. 이제 인간은 새로운 지능을 창조하는 영역까지 현실로 만들어냈다.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주기》에서 테드 창은 ‘디지언트’라는 가상의 반려동물을 등장시켰다. 백지상태의 ‘디지언트’는 딥러닝을 통해서 훈련되고 사회성을 획득한다. 지금껏 등장한 안드로이드들이 자율성을 획득하고 있다는 면에서 인간성에 도전했다면 ‘디지언트’는 인간이 완전하게 통제할 수 있는 존재다. 그 대신 테드 창의 인간은 ‘완전하게 통제할 수 있는 존재를 얼마만큼 존중할 수 있느냐’는 시험대 위에 선다.
차이나 미에빌의 《페르디도 거리의 기차역》과 앤 레키의 《사소한 정의》는 인간의 경계를 뛰어넘은 통합적 인간을 넘어서서, 기계의 경계를 뛰어넘은 통합적 기계를 보여준다. 이 소설들 속에 등장하는 AI는 각자 개별체로 사고하면서 동시에 통합체로 사고한다. 사물인터넷이 그러하듯이, 개별체와 통합체의 구분이 무의미해진 거
대 AI는 그 자체로 하나의 목적성을 띠고 달려간다. 통합되지 않은 인간을 넘어서, 통합되지 않은 AI가 통합되는 세계 속에서는 인간의 사고도 끊임없이 분절될 수밖에 없다. 2000년대의 SF는 이 분절과 통합의 경계선 위에 존재한다.
SF를 마르크스주의와 연결짓는 것은 글을 쓰고 있는 이가 마르크스주의자라서 부리는 과잉된 막대 구부리기일 수도 있겠다. 로버트 하인라인 같은 작가는 《달은 무자비한 밤의 여왕》과 같이 혁명을 다루는 작품들에서조차 오랜 우파의 관용구였던 ‘공짜 점심은 없다There ain’t no such thing as a free lunch’를 사용해서 우파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에게 자유주의의 큰 영감을 주기까지 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SF를 해석하는 오랜 비평이론 중 하나가 마르크시즘이었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심지어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 자체도 기술이 압도적으로 발전한다는 전제하에 ‘노동자계급’이 세계를 점유하는 SF적 상상에 바탕을 두고 있다. 돌아보면 자본주의라는 특정한 체제가 지구 전역으로 확장되었을 무렵, SF라
는 특정한 장르가 탄생했다. 산업혁명과 과학혁명, 르네상스의 출현은 필연적으로 이 두 가지를 함께 배태했다. 때문에 《강철 군화》의 잭 런던, 《우주전쟁》, 《투명인간》의 허버트 조지 웰스, 《1984》의 조지 오웰과 같은 초기 SF 작가들 중에는 사회주의자들의 모습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최근까지 와서도 차이나 미에빌 같은 작가들이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조지 오웰이 사회주의자였음에도 《1984》가 오랫동안 반공주의의 맥락에서 선전된 것은 기묘한 일이다. 《1984》는 ‘어떤 사회주의가 필요한가’를 노골적으로 반문하는 소설이다. 동시에 전체주의적 국가에 계급으로서 복속된 노동자의 모습을 그려낸 소설이기도 하다. 군비경쟁을 통해서 경제를 구축하고, 노동자의 노동력을 100% 활용하되 사고력을 정지시키는 세계의 이미지는 그 이후로도 끊임없이 재생산되었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2009년 출간한 자신의 평행우주 SF 소설《1Q84》에서 이를 뒤집은 것은 흥미롭다. 《1Q84》에서 계급으로서 복속된 노동자는 빅 브라더가 아닌 리틀 피플에 의해 지배된다. 사이버펑크의 세계관과도 연결되는 지점이다. 지배하는 이와 지배당하는 이가 존재한다는 점은 여전히 마르크스주의적으로 고찰할 바가 있으나, 그 지배하는 이데올로기는 빅 브라더처럼 뚜렷한 모습을 갖추지 않는다. 이 서사의 적대자는 개인들의 정보를 비밀스럽게 복제하며 체제 내부에서 암약한다. 마치 빅데이터를 모두 관장하고 있는 네이버, 구글, 페이스북, 트위터를 우리가 인지하지 않고 활용하듯이.
어슐러 르 귄 같은 뉴레프트 계열 작가들의 등장도 마르크스주의적으로 유의미한 지점이다. 《빼앗긴 자들》은 특히나 마르크스주의로 자주 비평되는 작품으로, 냉전이 한창이던 1974년에 발표되었다. 공동육아와 계획경제에 기초한 사회주의 체제인 아나레스와 자유경쟁 체제에서 돈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자본주의 체제인 우라스의 등치비교는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를 흥미롭게 보여준다. 무엇보다도 주인공 쉐벡이 자신이 발견한 앤서블의 이론을 ‘카피레프트’로 공개해버리는 장면은 지극히 사회주의적임과 동시에 돌이킬 수 없는 SF의 발전과정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역사는 끊임없이 더 많은 정보를 공개하는 방향으로 움직여 왔다. 정보는 곧바로 권력의 점유로 이어진다. 더 많은 이들이 그 정보를 가지게 된다면, 권력 역시 분산될 수밖에 없다. SF로 계급의 무너짐을 상상한 이들은 바로 이 기술의 속성에 주목해 왔다.
필립. K. 딕이 그린 세계는 다양한 차원에서 마르크스주의적 일면을 보여준다.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에서 실질적으로 세계의 이윤을 창출하는 힘노동력을 가지고 있는 안드로이드들은, 지배자들의 세계에서 탈주해서 자신들의 노동을 스스로 통제하는 꿈을 꾼다. 주인공 릭은 인간이 아닌 안드로이드들을 잡으러 왔다가 ‘더욱 인간적인’ 그들의 삶에 혼란스러워지고 만다. 마르크스주의의 소외이론은 노동을 누가 통제하느냐가 핵심이다. 안드로이드라는 존재를 등장시킴으로써 노동에서 소외된 노동자들의 상황은 새롭게 조망된다. 지금 놓여있는 ‘비인간적인’ 처지와 함께.
체제에 위협이 될 수 있는 범죄자를 미리 처단한다는 《마이너리티 리포트》, 기억을 판매하는 회사와 그 기억을 조작할 수 있는 자본의영향력을 다룬 《도매가로 기억을 팝니다》의 경우도 자본주의 체제가 어떤 방식으로 개인의 삶의 경계를 흐트러뜨리는지를 다루고 있다. 마르크스주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SF는 기술발전이 가져올 평등한 세계와 평등하지 않은 상황에서의 기술발전이 어떻게 드러날 것인지를 보여줌으로써 불평등을 거울처럼 드러낸다.
2000년도에 출간된 차이나 미에빌의 《페르디도 거리의 기차역》에서는 ‘드림싯’이라는 이름의 마약을 생산하는 슬레이크 나방이 등장한다. 물론 슬레이크 나방을 키우는 존재는 인간이지만, 슬레이크 나방은 그 자체로 사람들을 현혹하고 중독시켜서 자신의 삶에서 소외되게 만드는 존재다. 이는 자본주의 체제가 어떤 방식으로 자본을 축적하고 생산해서 사람들을 착취하는가에 대한 너무도 직설적인 은유다. 착취되어 고통받는 이들의 편에서 슬레이크 나방을 처치하는 아이작은 개인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자본이라는 체제에 맞선다. 이처럼 노골적으로 자본주의 체제를 은유하는 SF는 비유를 통해 낯설게 함으로써 새롭게 현실을 주목한다.
마르크스주의 SF의 ‘낯설게 하기’가 이런 방향으로 나타난다면 페미니즘 SF의 ‘낯설게 하기’는 오래된 페미니즘의 경구 “개인적인 것은 정치적인 것이다”가 또렷해지는 방향으로 나타난다.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제2 물결 페미니즘이 진행된 이후 페미니즘 SF의 대표적인 작품들이 대거 나타났다.
어슐러 르 귄의 《어둠의 왼손》은 생리 주기와 비슷한 한 달가량을 주기로 어느 한쪽 성별이 자연 선택되는 게센이라는 행성의 주민들을 다루고 있다. 어슐러 르 귄은 모두에게 임신 가능성이 있기에 한쪽 성별을 억압할 수 없는 세계를 그리는 사고실험을 보여준다. 성별이 그때만 결정되기 때문에 과잉되게 성적 자원으로 타인을 취
급하거나 성적 위협과 제스쳐를 강조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다. 게센 주민들에게는 남성과 여성이 외따로 된 존재가 아니라 하나의 신체에 통합되어 있다. 우리 모두의 삶에 뼛속 깊이 박혀 있는 ‘문화적 차이’들을 떠나 정말로 평등한 사고를 할 수 있게 되는 환경을 사변적으로 구성해 본 것이다.
그런가 하면 마거릿 애트우드의 《시녀 이야기》는 정반대로 나아간 사변소설이다. 《시녀 이야기》 속의 세계는 여성성이 (정서와 신체 모두) 완전히 가부장제에 포획된 세계다. 이 안에서 여성은 결코 통합되거나 총체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주인공인 오브프레드는 오로지 보지, 그리고 아이를 생산하기 위한 그릇으로서만 존재한다. 프레드의 아내인 세레나 조이는 성적인 맥락이 모두 소거된 채 ‘안주인’으로서의 구색으로 존재한다. 하녀들은 오로지 재생산 노동력으로, 콜로니에 있는 이들은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배제 대상으로 존재한다. 현실에서 여성의 삶이 통합적일 수 없는 맥락을 끝까지 밀어붙였다. 《어둠의 왼손》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에서 현실이 드러나지만, 마찬가지로 페미니즘적 현실은 낯설게 뚜렷해진다. 우리의 일상이 얼마나 가부장 주의에 침탈당해 있는지.
옥타비아 버틀러의 《블러드 차일드》는 여성의 신체가 어떤 방식으로 여성의 삶을 지배하는지 남성의 신체를 소재로 드러내는 소설이다. 외계인이 남성의 신체에 알을 낳고, 그 알을 낳기 위해 죽음까지도 각오해야 하는 상황을 보았을 때, 이미 여성의 신체가 그 역할을 수행하는 데에 익숙해진 세계는 잠깐 모습을 바꾼다. 위에서 다룬 사변소설과는 다른 형태의 뒤틂이다. 출산에 엮인 그 모든 과정은 당연하게도 공포, 분노, 슬픔뿐만 아니라, 사랑, 따뜻함, 에로틱함까지도 포함한다. 지금껏 세계가 여성의 신체를 대상으로는 후자만 말해왔던 것과 다르게 남성의 신체가 출산을 맞닥뜨릴 때 현실은 다른 표정을 짓게 된다.
2017년에 발표한 김보영의 <얼마나 닮았는가>는 AI에게 신체가 덧씌워지는 상황을 상정하여 페미니즘적 낯설게 하기를 시도한다. AI가 덮어쓴 신체라는 설정은 ‘여성’ 일반이 처하는 상황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신체가 자아의 젠더상에 미치는 영향, 자아의 젠더와 신체의 불일치가 발생시키는 불편감과 부적절감의 영역까지도 생각해 볼 여지를 남긴다. 성적 정체성이란 통합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가, 사이버스페이스에서의 젠더 정체성이라는 것이 어떤 형태로 바뀌어 가는가에 대한 고찰은 해러웨이의 《사이보그 선언》에까지 맞닿는다.
“미래는 이미 와 있다, 아직 퍼져있지 않을 뿐이다.”라고 《뉴로맨서》의 작가 윌리엄 깁슨은 말했다. 이 말을 인용해서 한국 사회에 널리 퍼뜨리신 분은 최근 미래에서 좀 멀어지신 것처럼 보이지만, 이 말은 어느 순간에도 틀릴 수가 없다. 모든 미래는 바로 우리 곁에 있다. 그리고 SF는 우리 곁에 있는 미래를 뒤틀어서 보여줌으로
써 우리가 어디에 서 있는지 재확인시킨다.
우리는 사이버스페이스에서 정체성을 무효화시키고, 잃어버린 신체를 새로운 신체로 교체하고, 뇌와 외부세계를 직접 연결한다. 우리는 현실의 인간임과 동시에 우리의 사고 안에 있는 ‘미래의 인간’이다. 그러므로 현실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곧 연속선상의 미래에 대해 사고하는 것이다. 물론 그 역도 마찬가지다. 곁에 있는 미래를 제대로 보지 않으면 현실도 파악할 수 없다.
SF는 오늘도 여전히 다양한 양상으로 폭발하며 자신이 작성된, 동시에 작성한 세계를 뒤틀고 있다. 그 시간의 뒤틀림 속에서 세상을 읽어내는 건 SF라는 장르가 존재하는 한 계속 즐거운 일일 것이다. SF만큼 ‘있을 법한 이야기’를 ‘그럴듯하게 써내는’ 장르를 나는 또 알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