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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영 Apr 03. 2017

윤김지영 님과의 '로리타' 논쟁 아카이빙

앞서 썼던 글 욕망을 관용하는 페미니즘이 필요하다에 대해 윤김지영 님이 페이스북을 통해 반론을 보내오셨다. 서너 번씩 긴 글로 반론을 주고받았는데, 아카이빙이 필요한 부분들이 상당히 있다고 여겼다. 윤김지영 님의 동의를 구해서 이 곳에 아카이빙을 해 둔다.


윤김지영 → 이서영 ①


올해에 출판예정인 저의 두 번째 저서에서도 로리타라는 키워드로 집필 예정이지만 이서영씨의 '페미니즘인듯 페미니즘 아닌 페미니즘 같은' 논리들을 명확히 짚어서 하나하나 반박할 필요성이 보여 논쟁에 참여합니다.


1. 10대의 섹스가 위험과 자유 간의 줄다리기이자 성적 자유의 문제라는 논지의 모순 분석  

이서영은 로리타 논쟁을 두 가지 요소로 파악하는데 첫 번째가 성인 여성의 아동화와 수동화이고 두 번째가 아동 및 청소년의 과잉성애화에 의한 성적 착취와 성폭력 구도의 확산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이 두 지점을 여성의 자기결정권 개념틀 안에 포섭하여 읽어내고자 한다. 


그러나 이러한 접근방식에는 
다음과 같은 분석이 탈각되어있다. 로리타적 이미지들의 재생산 구도가 성인 여성은 물론 미성년 여성을
동시적으로 겨냥하는 것은 오롯이 여성성과 관계하는 문제만이 아닌 현재 한국사회의 약화된 남성성과 연루되어있다는 점 말이다.


여성의 극대화된 무기력함과 수동성이 소녀 이미지와 만났을 때에 이것은 남성 욕망이 일방적으로 배설되는 그릇이자 수용기로 재현되는 방식으로 활용된다.즉 약화된 남성성에 어떠한 타격도 입힐 수 없는 특정 여성성의 주조를 통해 남성의 젠더권력적 우위를 자연적 질서로 유지보존하고자 하는 반동 기제가 바로 로리타 이미지의 기저인 것이다.


그리고 이서영이 쓰는 자기결정권이란 개념은 페미니즘 이론에서는 성적 자기결정권 개념으로 명확히 지칭되고 있으며 앞으로 페미니즘 개념들을 보다 정치하게 차용해 오는 것을 권한다. 


성적자기결정권 개념은 페미니즘 이론의 '결정적' 개념이 아니라 논쟁적 개념이다. 왜냐하면 성적자기결정권 개념은 이성애자, 성인, 비장애인, 남성을 표준형으로 설정된 것으로 이 범주에 들지 않는 이들에게 그들이 마치 사회적 다수자와 마찬가지의 일원화된 자유와 선택의 폭을 동일하게 가진 것과 같은 착시효과를 낳기 때문이다. 이러한 착시효과에 의해 남성과 여성, 비장애인과 장애인, 내국인과 외국인,성인과 미성년 등이 1대 1 개인의 대등한 두 주체들로 상정되어버리고만다. 이러한 관계성에 내재해있는 젠더에 의한, 장애에 의한, 피부색과 국적에 의한,나이에 의한 권력기제와 차별체제들의 중층성들이 지워져버리고 말며 이것은 곧 사회적 소수자들에게 책임이 전가되는 결과를 낳는다. 


즉 성적자기결정권 개념은 제도적,구조적 폭력으로서의 강간문화를 개인의 자유문제로 개별화해버리고 마는 한계를 지니는 것이다.


이서영은 청소년의 성이 위험과 자유의 아슬아슬한 줄다리기임을 인정하지만 이것이 유일한 쾌락생산방식이라면 성적 자유가 탐구되는 경로가 될 수 있다는 논리적 비약을 저지른다.
이 주장에 함축된 명제들을 하나 하나 뜯어보자. 1.청소년의 섹슈얼리티가

 포기되지않으려면 위험에 노출될 수 밖에 없다.2.위험이 곧 성적 국면으로의 진입신호이므로 이것은 곧 쾌락생산의 촉발제이자 강화제로 기능한다.3.그러므로 성적쾌락의 자유는 곧 위험에 대한 용인이자 위험에 대한 제한행위는 쾌락탐구에대한 성적억압의 양식이다.


이 세 가지 명제에는 미성년이라는 특정 나이대의 사람들이 사회적,정치적 취약성-가난이나 강간, 착취,인신매매, 살해 등이 집중화되는 구조에 더 많이 노출되어있다는 것을 개선되어야할 사항이 아닌 쾌락의 스릴을 최대화하는 장치로 낭만화하고 있다.


이처럼 청소년의 섹슈얼리티가 위험과 자유사이에서 줄다리기하는 것이 아니라 위험을 전제한 생존의 문제임을 역설적으로 드러내고 만다. 왜냐하면 자유는 생존에의 위협과 사회적 죽음-배제와 열외 가능성에의 노출을 통해 확장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축소되고 부인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페미니즘은 이러한 사회적 정치적 취약성에 노출된 미성년의 성적 시민권을 부인과 억압의 대상으로만 보거나 단독적 양식으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청소년의 성적 시민권이 청소년의 투표권과 노동의 권리, 정치참여권 등의 다른 시민권의 부여를 통해 더 이상 취약성의 구조 속 섹슈얼리티를 실행할 수 밖에 없었던 사회기반을 재개편하고자 하는 논의를 진행시키고 있다. (<양성평등에 반대한다> 저서에서 권김현영의 논의를 참고하라)


다시 말해, 로리타 이미지 확산과 만연에 대한 페미니즘적 비판은 성적 억압강화를 위한 성적 엄숙주의의 설치가 결코 아니다. 


오히려 누가 무엇을 성적인 행위로 정의해왔는가, 성적 서사의 완결구도를 정의해온 일방적 권력이 겨냥하는 바는 무엇인가를 다시 들여다보게하며 우리의 성적 행위성이 지나치게 남성 페니스 삽입 구도로 축소되어 온 한계를 비판한다.이를 통해 다른 몸의 감각다발들을 나와 타자의 몸들 위에서 재배치해내는 일련의 실험적 성행위성에도 열려있는 것이 페미니즘 이론인 것이다.


오히려 미성년과 성년 간의 성애적 관계양식에서 페니스 삽입구도가 욕망방식의 유일성으로 규정되어온 경직성과 전형성을 푸는 해방의 매듭역시 페미니즘 섹슈얼리티 이론에서 제시될 수 있다.


왜냐하면 성적 자유란 위험을 무릎쓰고 남성이 가르쳐주는 성행위의 서사를 그대로 따라가서 이를 수행해내는 것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신이 원하는 바와 원하지 않는 바를 끊임없이 질문하며 하지 않을 거부의 권리와 거부의사 역시 구성해 낼 수 있는 것이 내가 재구성해낼 성적행위성의 지평확장과도 맞닿아있기 때문이다.바로 이것이 성적 자유를 구성하는 요소인 것이다.


성적으로 무지와 순결성을 강요받는 주조된 여성성으로서의 전형적 소녀성에 갇힌 자는 폭력의 양식으로 섹슈얼리티를 경험할 가능성이 높으며 이러한 폭력을 성적 자유의 필연적 조건으로 오인함으로써 남성중심적 욕망구조에 복무하게 되는 것이다


2.로타류의 이미지 비판은 다른 층위의 뒤섞음과 혼동에 불과한가? 또한 로타류 이미지에 대한 비판은 박해행위인가?


로타류 이미지가 어떠한 참조점도 없는 이미지의 탄생이라 여기는 것이 오히려 이 논쟁구도에서 나이브함을 드러내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이미지 텍스트들은 다른 이미지들을 차용,모사하거나 2차 가공, 변형하는 과정들을 통해 이미지 (재)생산이 이뤄지기 때문이다.


로타류 이미지의 참조점들은 크게 두 가지이다. 다시 말해 심각한 수준의 폭력과 그렇지 않은 것들을 뒤섞이게 한 이는 로타류 이미지 비판자들이 아니다. 이미 로타가 이 두 층위의 바리에이션을 아슬아슬하게 오가며 사진을 생산해왔다.


첫 번째 참조지점에는 파스텔톤 색감과 청소녀들의 무해한 이미지들로 욕망의 미감이 확장되는 듯한 방식을 취한다. 교복이나 체육복,세라복, 속옷 차림에서부터 이보다 더 하향화된 연령대의 유아복이나 어린이용 속옷 등의 드레스 코드들이 있다. 신체형상은 주로 엉덩이를 쭉 내밀고 카메라 쪽으로 고개를 향해 있거나 누워서 배를 걷고있는 모습들,
쭈구리고 앉아 카메라를 멍하게 응시하는 모습들로서 무지하고 순결하나 언제든 준비된 욕망 그릇으로 설정되어있다.
이것은 저항불능의 무지성과 순결성의 
환상구조로 점철된 여성성을 떠받히는 것이며 이러한 여성성의 재현은 여성신체의 무해성과 손쉬운 정복 가능성을 내포한다.


이러한 무해한 여성성이 겨냥하는 바는 남성 욕망투여의 실패가능성을 낮추거나 차단해버림으로 남성의 나르시시즘의 보루, 즉 자기애의 타격을 최소화하고 자기애를 보장하는 경로가 된다.즉 이러한 무해한 여성성은 남성과 여성과의 관계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이는 여성의 수동적,순응적 신체를 매개로 이와 대비되는 강하고 능동적 신체성으로서의 남성성을 정초해내는 방식이라 할 수 있다.


두 번째로 로타류 이미지의 참조점은 테디베어 이미지의 신체왜곡과 신체절단변형이라는 하드코어적 요소의 극단점에까지 그 수맥이 가닿아 있다. 이상하리만치 뒤틀린 몸의 비율과 드러 누워있으나 팔다리가 힘없이 축 처진 몸에는 시체성애적(necrophilia) 요소 또는 신체이동의 자유를 차단당한 여성의 병리적 구도가 소프트한 버젼에서 차용되어 인화되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전자가 남성이 욕망할 만한 길들여진 여성성의 전시(1)라면 후자는 여성을 길들인 남성성의 잔혹한 힘의 과시와 전시(2)라 할 수 있다. 
1번에서는 귀여워해줄 만한 여성들의 미학화가 진행되며 2번에서는 언제든 이 여성들을 위험에 내몰아 제압의 대상으로 축소해버릴 수 있는 처단 논리가 면면히 흐른다.
즉 로타류 이미지는 이 두 층위들을 오가는 긴장감 속에서 남성중심적 욕망구조의 미감과 도발성을 동시적으로 재현해냄으로써 각광받는 것이다.


그렇다면 로리타 반대 페미니스트들이 설리가 올린 인스타그램의 모든 이미지들을 악마화하고 박해하는가? 오히려 도발적으로 카메라를 응시하며 생크림을 짜넣는 퍼포먼스나 노브라 사진들,우린 손만 잡고 잤어요라는 위선적 순결 서사를 비웃는 사진들은 오빠들이 원하는 무해한 소녀상을 박살내어버리는 것이었다. 즉 이를 페미니스트적 퍼포먼스로 여기는 해석들이 줄을 이었다. 
이에 반해 이러한 통제불능의 사진들에 우려와 욕설을 퍼부은 것은 소녀를 잃을 수 없는 오빠들이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한다.


설리에 대한 비판은 로타와 작업한 베이비 로션 사진과 테디베어 연상포지션 사진,장애인 행동 모사 사진들로 국한된다.이로써 이서영이야말로 비판 지점들의 층위를 뒤섞어버리고 있음이 드러난다.


로타류 이미지를 비판하는 페미니스트들은 성을 지나치게 심각하게 생각하는 이들, 성엄숙주의자들이 아니다. 
왜냐하면 성엄숙주의자들은 성을 신성화하며 가족제도의 재생산 메커니즘으로 성욕동 구조를 한정시키려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로리타 이미지 반대진영 페미들은 섹슈얼리티를 신성화,이상화하기 보다 이것이 숱한 권력 비대칭과 취약성의 포식구조로 이뤄져있음을 이야기하며 이를 탈신성화하고자 한다.또한 비혼과 탈혼을 선언하여 섹슈얼리티와 결혼제도를 분리해내고자한다.


왜냐하면 결혼제도만이 아니라 자신의 몸을 성애화하고 미학화하는 방식, 성적 관계의 수행성을 재현하는 체계들이 남성과 여성이라는 이분법적 성차의 위계성을 실행하는 지대로 기능할 수 있음이 낱낱이 분석되기 때문이다. 
또한 대중적 미감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아무렇지않게 소비되고 무의식적으로 내면화되는 남성 욕망구조의 양태들이 인간의 보편적 욕망방식으로 용인,묵과되어온 것에 저항하고자 하는 것이다.


왜 여성들은 항시 남성의 원함과 욕망의 재현양식에 쿨하게 동의하기만 해야 하는가? 이에 대해 격한 거부와 불화의 도입을 통해 여성이 다르게 욕망할 수 있음을, 남성 욕망구조만이 욕망의 전부가 아님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왜 엄숙주의와 검열주의로 낙인찍혀야하는가?
이러한 성엄숙주의라는 프레이밍의 남발을 통해 남성의 그 어떠한 욕망양식도 표현의 자유와 성해방의 지점으로 면죄부를 손쉽게 획득해버리게 되는 것이다.


이는 곧 "리비도(성욕동 에너지)는 남성적인 것이다"라고 선언한 프로이트의 관점을 그대로 내면화한 것이다. 
모든 성욕동 에너지가 남성적 본질이라는 전제에서는 리비도와 남성적인 것이라는 두 요소의 조합을 떼어내어 이를 탈자연화하고 비본질화하려는 것이 곧 리비도 구조의 붕괴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로타류 이미지 반대 페미들은 리비도라는 성욕동 에너지를 차단하려는 논리가 아니라 이것을 남성적인 것이 방기,용인되는 장으로만 한정하지않고 이를 새로운 실험의 장으로 변환해내어 리비도 구조를 재구축하고 재정의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서영은 로리타 논쟁이 미성년 섹슈얼리티를 비가시화하고 남성 성본능을 통제불능의 것으로 상정한다고 했는데 이것이야말로 남성중심적 성욕동 구조가 노리는 효과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미성년 섹슈얼리티는 남성적 욕망대상으로 미학화되고 조직화되는 것으로 한정되며 성욕동의 공격성과 방출력이 남성적인 것이라는 전제 하에서 미성년 여성은 이러한 공격적 성본능의 수용 용기가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서영이 언급하고 있는 미성년 섹슈얼리티는 정확히 미성년 여성 섹슈얼리티이며 성인 남성의 최적화된 욕망대상으로 정의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이서영은 미성년 여성의 섹슈얼리티의 자유를 오빠들에게 사랑받고 욕망받는 것으로 전제함과 동시에 이러한 욕망대상으로 환원되는 걸 거부하는 것을 자유에 대한 억압으로 파악해낸다. 또한 미성년 섹슈얼리티라는 젠더성이 기입되지않는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이성애중심적이며 남성중심적 관점을 모든 미성년의 섹슈얼리티로 보편화해버리는 오류를 저지르고 만다.


그리고 페미니즘은 "성폭력은 통제가능한 것"이라는 주장을 내세우는 단선적 이론이 아니다. 왜냐하면 성폭력이 통제가능하다는 명제는 마치 이것이 개인의 절제력 문제인 것처럼 사안을 축소시켜버리기 때문이다. 
페미니즘은 성폭력을 구조적 문제이자 반복되는 성폭력 문화이자 강간문화라는 개념틀로 접근하고 있다.이를 통해 왜 남성들은 욕망 방출자이자 공격적 실행자로 사회적, 문화적 용인의 대상이 되는지, 이러한 편향적 욕망 방출 구조의 폭력성이 결국 남성 젠더의 권력우위성이 재생산되는 체제임을 파헤치고 이를 비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서영은 페미니즘적 의제들을 가져올 때에 오빠들이 박수쳐주는 올바른(?) 페미니즘의 떠도는 설들을 페미니즘 이론의 전제로 둔갑시키지 말아야한다.이를 위해선 페미니즘이 심화된 학문분과의 영역이자 품을 들여 생각하고 탐구해야할 인식의 지도들임을 먼저 깨달아야한다.


그리고 로타류 이미지들에 대한 비판과 논쟁구도의 가열화를 박해라는 용어로 과연 등치할 수 있는가? 
우선 박해라는 개념의 적확한 이해부터 전제되어야한다. 
박해란 해고나 열외, 배제 등과 같은 사회적 죽음은 물론 생물학적 죽음이 집단적 차원에서 가해지는 것을 뜻한다.
로타류 이미지 생산 작가들이 이러한 피해에 노출되었는가? 오히려 톱스타들과의 작업반경이 넓혀져 나가고 있으며 로타의 아류 버젼 작가들이 더욱 증가하고 있다. 또한 로타류 사진 프레임에 피사체가 되는 것을 여성이 심미적으로 가치화되고 자유로와지는 방식으로 오인되고 있다. 이서영은 이희은의 예시를 통해서도 이를 입증한다.


오히려 남성중심적 욕망구조와 무모하리만치 전면전을 벌이려는 과격 페미로 낙인찍힌 이들이 해고와 신상털이, 사회적 죽음에 지속적으로 위협당하는 박해의 현실은 왜 불합리한 현실의 지형임이 간과되는가.
이 사회의 실재성이 담보되는 현실이라는 실존지반이 결국 남성중심적으로 개편된 지대임이 이러한 비대칭적 현실인식력을 통해 더욱 명확히 입증되고 만다.


이서영 → 윤김지영 ①


윤김지영 님의 글을 꼼꼼하게 읽은 후에 대답할 것들이 있는 것으로 사료되어 이 글을 씁니다.
 

윤김지영 님께서는 제 글에 함축된 명제들을 이렇게 요약하셨습니다.
 

[1.청소년의 섹슈얼리티가 포기되지않으려면 위험에 노출될 수 밖에 없다.
2.위험이 곧 성적 국면으로의 진입신호이므로 이것은 곧 쾌락생산의 촉발제이자 강화제로 기능한다.
3.그러므로 성적쾌락의 자유는 곧 위험에 대한 용인이자 위험에 대한 제한행위는 쾌락탐구에대한 성적억압의 양식이다.]
 
저는 이 요약이 왜곡되었다고 여깁니다.
 
저는 자유와 안전이 별개의 문제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의견을 글에서 명확히 밝혔습니다. 저는 쾌락과 자유를 포기하지 않기 위해서 위험을 감수했던 자신의 경험을 밝혔으나, 그것을 긍정적 경험으로 평가하지 않았습니다. "성적 보수주의"는 안전을 위해서 자유를 포기하라고 하는 것이겠지요. (비단 성적 보수주의 뿐만 아니라 모든 "보수주의"의 근저에는 이것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저는 "줄다리기"로 쾌락과 위험의 양가성을 파악하고 있지 않습니다. 위험을 문제삼아서 쾌락을 제거하려는 것을 성적 보수주의로 공격한 것입니다. 현재의 '로리타 이미지'에 대한 비판은 그런 문제에 대해 충분히 고찰되고 있지 않다는 생각입니다.
 

윤김지영 님께서는 "성적 자기결정권"으로 언어를 엄밀히 사용하기를 요청하셨습니다. 사실 저는 이 경우 "신체의 자기결정권"까지도 포함해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언어를 좀 더 좁혀서 논의가 섬세해 질 수 있다면 좋은 일이며, 세밀한 지적에 감사합니다.
 
저는 여전히 "성적 자기결정권"이 결정적 개념이라고 생각합니다. 성적 자기결정권을 행사하기 위해서 주체성의 평행을 맞추는 과정 역시도 성적 자기결정권을 쟁취하기 위한 투쟁의 일부입니다. 성적 자기결정권의 주체성을 회복하지 않으면 성적 문제에 있어서 평등 그 자체가 요원합니다.
 
윤김지영 님께서는 제가 성적 자기결정권의 개념 자체를 결정적 개념으로 자리매김함으로써 청소년의 '미숙함' 그 자체를 흐리지 않을까 염려하신 것으로 여겨집니다. 하지만 그 글에서 저는 청소년의 미숙함과 성적 자기결정의 권리 양쪽을 모두 이야기 했습니다. 발생할 수 있는 피해를 모두 개인의 자유문제로 한정짓지 않기 위해서였습니다.
 
"성적 자기결정권"으로 언어를 좁히게 되면 이 경우 어떤 차이가 발생하는지 궁금합니다.
 
투표권, 노동의 권리, 정치참여권 등 다른 시민권의 권리가 청소년에게 부여되어야 한다는 말씀에 적극적으로 공감합니다. 당연히 그러한 방식으로 청소년의 권리는 신장되어야 합니다. 그 가운데에서 성적 자기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는 자유도 물론 확장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일종의 "단계적 해방론"처럼 여겨져서도 안 될 것입니다.
 

윤김지영 님의 로리타 이미지에 대한 분석에도 적극적으로 공감합니다. 현재 한국사회의 약화된 남성성과 연루되어 있다는 점이 특히 그렇습니다. 페미니즘의 웨이브가 이토록 강력하게 불어오는 것, (실제로 그렇지 않을지언정) 젊은 남성들에게 정서적으로 역차별이라는 단어가 설득력있게 다가가는 것들이 약화된 남성성과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대중문화에서는 그것이 로리타 이미지의 소비, 심지어는 여성들을 환상을 타겟으로 나온 걸그룹을 남성들이 주류로 소비하는 데까지 나아갔다고 보입니다. 2000년대 초반의 일본 오타쿠들이 소비하는 애니메이션 속에서 더 이상 남성 등장인물이 보이지 않았던 것과도 맞닿아 있죠. 더 이상 '강한 남성성'이 성애적 소비를 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저의 의문은 이것이 어떤 방식으로 "팔다리를 자른 성노예 여성"까지 연관되느냐는 것입니다. 소아성애 범죄까지 연관되느냐는 질문입니다. 성애적 욕망(그것이 여성을 여전히 약한 존재로 자리매김하는 것이라고 할지언정)과 폭력적 범죄 사이에는 직접적 연결고리가 없습니다. 그렇기에 저는 이것이 "공포를 먹이로 삼은 사기"라고 까지 서술했습니다.
 
더욱이 그런 "사기"의 결과로 로타와 작업을 한 여성들이 "소아성애자들에게 아이들을 바치겠다는 선언"이라는 말을 듣는다면 이 논의의 구조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그런 말을 듣는 여성이 이희은 씨 한 명만도 아닙니다. (한 명이면 괜찮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저는 이 지점에서 이것이 비평이라기보다는 검열에 가깝다고 판단했습니다.
 
*
로타의 자신은 당연히 비평의 대상입니다. 그러나 그 비평이 범죄와 사진을 직결하는 방식이라면 동의할 수 없습니다. 저는 페미니즘 비평이 로타의 사진을 분석하는 것도 당연히 필요하겠으나, 로타와 사진을 찍고 싶어하는 여성들의 욕망을 분석하는 것이 더욱 필요한 일이라고 여겨서 마지막에 사족같은; 셀피 앱에 대한 이야기를 집어넣었습니다. 이 역시 페미니즘적 비평의 대상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저에게는 좀 더 확장된 해석이 필요하다고 생각되지만) 그것을 설령 말씀하신 "페니스 삽입구도"로 평가한다고 하더라도요.
 
 
논의에 참여해주신 데에 진심으로 감사를 표합니다. 함께 건설적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윤김지영 → 이서영 ②


<이서영님의 답변에 대한 제 답변1입니다.>


1. 남성중심적 욕망 매트릭스 속 머물기가 자유의 성취인가?


자유와 안전이 별개의 문제가 되어선 안되지만 현재 미성년 여성의 섹슈얼리티의 자유는 안전이 보장받지 못하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음을 안타깝게 여김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여기서 미성년 여성 섹슈얼리티가 안전의 문제는 물론 '성적 자유'의 문제역시 성취해내는가를 묻고자 합니다. 이서영님은 이 부분에 대한 문제의식을 설정하고 있지 않은 채 위험담론의 과잉을 통한 자유의 제거로만 논의를 집중하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남성중심적 욕망의 매트릭스 속에서 남성이 설정한 욕망양태에 딴지를 걸지 않고 그것이 요구하는 일방적 성애화, 대상화에 충실히 따라야만 아름답다는 심미적 가치는 물론 여성 스스로의 자존감이 올라가고 나아가 자유까지 획득할 수 있다고 주지하는 현실에 대한 고찰말입니다. 
왜냐하면 남성중심적 욕망의 매트릭스에서 남성이 어떻게 성애화되고있는가 제대로 드러나있지 않다는 것은 이 욕망구조에서 욕망하는 자와 욕망되는 자라는 자리가 이미 편향적으로 배분되어있다는 방증이기도
하기 때문이지요.


대신 이 일방적 욕망의 매트릭스에서 과감히 벗어날 것을 주장하며 남성이 설정한 성애화 방식이 유일한 여성의 자기 미학화와 자기애의 상승경로가 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 왜 성적 자유에 대한 억압자로 내몰려야하는 걸까요?
남성이 원하는 욕망대상이 되지 않으면 여성은 추함이라는 심미성의 결여자로의 추락은 물론 그런 흉물스런 자기자신에 대한 거부와 혐오를 새겨야한다는 것에서 욕망의 매트릭스는 여성에게 자유의 공간이 아니라는 것이 이서영님의 논지구도에선 전혀 분석되고 있지 않습니다. 
또한 남성이 요구하는 성애화 방식에의 순응이 유일한 성적 자유의 획득경로라는 논리는 '순응하여라.그것이 너를 더욱 더 자유롭게 하리라'라는 모순적 지배강령의 주지라는 것을 적확히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 로타류 이미지에 대한 페미니스트적 비판점인 것입니다.


남성중심적 욕망의 판 위에 머무는 것, 그것이 욕망할 만한 미녀의 자리든 욕망할 만하지 않는 추녀의 자리든 간에 이것이 여성을 갈아먹는 방식임을 깨달으며 여성이 어떻게 욕망하는 자이자 스스로와의 관계성을 다르게 직조할 수 있는가를 고찰하여 욕망의 판을 새로이 짜보겠다는 자유에 대한 선언이 이 사회에서 너무 쉽게 자유의 억압이자 성엄숙주의로 내몰리는 논리를 철저히 들여다보자는 겁니다.
왜냐하면 남성이 허락한 그 자유는 결국 종속의 장치인 자유의 환상일 뿐이며 그 자유의 환상베일을 찢어보는 것이 페미니즘이기 때문이지요.


즉 페미니즘은 위험과 자유를 양자택일의 문제로 두는 성적 엄숙주의의 일환이 아니라 '위험해질 수록 더욱 더 욕망의 대상화에 최적화되고 더욱 성적 자유를 획득하리라'라는 남성중심적 욕망의 문법이 로타류 이미지에 의해 증폭되고 있음을 파헤쳐 보여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서영님께서 문제제기하신 로타류 이미지에 대한 자유와 위험의 관계에 대한 고찰이 페미니스트적 접근에서 간과되지 않고 철저히 이뤄지고 있음이 입증됩니다.


2.성적 자기결정권은 결정적 개념인가?


이 논의를 심화하려면 성적 자기결정권의 두 용례를 세분화해야 합니다. 
첫 번째로 "모든 이는 누구나 성적 자발성과 자율성, 선택의 다양한 폭을 동일하게 가진다"가 실재 사실-이미 존재하거나 존재하고 있는 바에 대한 묘사나 기술행위로 전제될 때에, 제가 비판한 중층적 권력기제의 탈각이자 소수자 책임론의 전가로 이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이와 젠더, 장애의 여부, 피부색과 국적 등에 의한 비대칭적이며 위계적 권력관계가 성적 행위의 수행에서도 기입되기 때문이지요. 다시 말해, 모든 이가 성적 자발성과 자율성의 강도와 폭을 동일하게 소유,구현하고 있다는 전제가 이미 차별적 현실에 대한 은폐 장치로 기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성적 자기결정권 개념이 평등의 환상장치로 문제적으로 접근되어야함을 페미니즘 이론가들이 주장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모든 이에게 성적 자율성과 자발성,선택의 다양한 폭이 평등하게 보장되고 배분되어야한다"라는 판단 사실-반드시 뭐뭐해야만 한다라는 당위에 대한 기술행위로 전제된다면, 성적 자기결정권은 앞으로 구현해나가야할 이상적 지향점, 정치적 투쟁의 의제이자 평등의 획득을 위한 쟁점들로 설정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이서영님은 판단 사실로서 이 개념을 접근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개념이 결정적 개념이 됨을 의미하진 않습니다. 이서영님이 사용한 '결정적'이라는 단어의 의미부터 세밀히 정의해보자면,
이것은 논쟁의 여지 없이 단정적인 것 또는 다른 제반조건에서 상위심급으로 설정되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성적 자기결정권의 두 용례가 전혀 구분되지 않고 쓰이는 작금의 현실에서는 이 개념은 논쟁적이자 문제적인 것으로 부상할 수 밖에 없습니다. 
설령 두 번째의 개념 접근 방식의 틀로 이서영님의 논지를 위치시킨다 할 지라도 강간문화와 남성욕망 매트릭스의 일방성에 대한 첨예한 구조적 인식, 즉 성적 자기결정권이 상위심급이 아니라는 인식을 수반하지 않는다면 이는 자율성의 환상과 평등의 환상에 복무하는 종속적 개념이 되어버리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청소년의 미숙함 때문에 성인과 동등한 성적 자기결정권을 가질 수 없다"라는 주장을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이는 곧 인지능력 부족, 발달상태 부족이라는 개인의 능력 미달 상태로 청소년을 규정하는 행위이자 여전히 성인을 완성체이자 표준모델로 설정하는 위계적 논리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청소년에 대한 정의방식으로 사안을 단순화할 때에, 보호담론과 성적 보수주의가 제공한 문법의 덫에 걸려 버리는 것이지요. 
그리고 "아무 것도 모르니 보호해줄게"라는 보수적 보호담론과 "아무 것도 모르니 내가 하자는 대로 따라오면 성적으로 해방될 거야"라는 성적 자유의 환상은 매우 밀접하게 맞닿아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미성년 여성에게 부여된 성적 자기결정권이 과연 성인 남성의 그것과 동등한가?라고 질문하는 것은 한국사회에서의 이중적 성규범의 가동방식에 대한 질문이기도 합니다. 여성에게 성적 무지를 강요하고 순결의 박탈을 온전성에 대한 타격이자 되돌릴 수 없는 피해로만 여기게하는 것과 남성에게 성애의 과잉주체가 되어 여성을 포식하고 정복하는 것이 남성성의 확장과 실현이라고 여기도록 하는 것, 바로 이러한 이중적 성규범의 가동현실에서 미성년 여성은 성인 남성과 성적 선택의 출발점 자체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청소년 개인의 미숙함,판단능력 미비라는 개인적 부족 탓에서 성인과 미성년 간의 불평등이 기인하는 것이 아님이 드러납니다. 제가 성적 시민권과 더불어 정치적 참여권과 투표권 등의 사회적 시민권의 획득을 주장한 것도 구조적이며 제도적 차원에서 이러한 불평등이 기인함을 효과적으로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그렇다면 성적 시민권이 다른 정치적, 사회적 시민권의 획득 이후에나 보장 가능한 단계적, 후차적 권리로 미뤄져야하는가라는 질문에 답하겠습니다. 성적 시민권과 정치사회적 시민권은 상호적인 것이자 동시적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미성년 여성이 노동계약의 권리가 획득된다면 원조교제의 방식으로 섹슈얼리티가 불평등 거래되는 구조로 들어가지 않을 수 있으며 정치적 투표권 행사와 피선거권을 통한 정치적 대표자로 선출될 수 있는 권리를 통해 청소년 섹슈얼리티가 착취의 방식이 아닌 새로운 방식으로 구성될 수 있는 가능성이 모색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3. 로타류 이미지 비판의 타겟대상은 누구여야 하는가?


이서영님은 로타류 이미지를 미감의 확대와 여성 성애화의 또 다른 버젼으로 국한해 읽어내고 있습니다. 제가 적은 두 번째 반박문에 자세히 논증되고 있지만 로타류 이미지는 파스텔톤의 몽환적 색상 터치와 아기자기한 소품장치의 활용을 통해 소아성애적 욕망을 허용할 만한 것이자 여성의 자기미학화와 자기 가치화 경로로 주지하고 있습니다.


가장 욕망할 만한 여성적 상태를 유약하기 짝이 없는 어린아이 상태로 설정하는 것, 거부와 저항의 의사가 전면적으로 제거되어있는 여성이 로타류 이미지가 세공한 신체-언어들에서 극대화되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로타류 이미지는 여성의 유아화, 수동화를 촉진합니다. 무해한 여성, 즉 남성 욕망 그릇의 최적화 버젼이 유아화된 상태로 설정,재현되는 방식은 소아성애적 욕망을 소비할 만한 것으로 대중화하고 이를 무의식화하는 데에 기여하는 바가 있다고 봅니다.


(소아)성애적 욕망과 소아성애범죄의 간극을 주장하셨는데 전자가 성적 판타지의 영역이라면 후자가 성적 판타지의 실현으로 정의하고 있어보입니다. 
그러나 소아성애라는 개념은 이미 성인 어른이 소아를 욕망의 대상으로 여겨 성적 에너지를 투여한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서는 소아의 욕망 지향성이나 방향성이 어떻게 투여되고 있는가가 전혀 분석이나 고려대상이 되지 않습니다. 즉 소아성애라는 개념이 이미 욕동구조가 쌍방향적이거나 상호적인 것이 아니라 일방향적이라는 것입니다.
이성애자라는 특정 성지향성에서도 여성과 남성 쌍방 모두가 상대를 성적 에너지의 투여대상으로 여길 때에 합의된 성관계로 규정되지만 그렇지 않을 시에는 강간으로 규정됩니다.


그런데 소아성애에서는 강간과 합의된 성관계의 구분이 어려운데 그 이유는 신체적 심리적 경제적 측면, 즉 사회문화적 권력성의 압도적 우위성을 일방적으로 점유한 이 앞에서 발화되는 동의가 과연 대등한 두 주체의 관계로 볼 수 있는가의 문제를 내포하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소아가 무엇을 성적인 것으로 여기는가는 성인의 그것과 상이하다는 지점이 탈각됨으로써 오로지 성인의 성적 욕망지형 속에 강제 편입되도록 해버립니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어린아이의 성은 성기로 제한되지않으며 온 몸이 성적 에너지의 투여대상이 되는 것이자 매우 산발적이어서 이를 다각적 도착성으로 개념화하기도 합니다.(프로이트의 <성에 관한 세 가지 에세이>를 참조하라)


그리고 테디베어식 성노예 이미지는 로타류 이미지가 바리에이션을 통해 차용해오는 이미지임을 두 번째 반박문에서 상술하고 있으니 그 부분을 읽고 의견주시면 됩니다.


프랑스 현대철학자 장 보드리야르는 <유혹에 대하여>에서 이미지가 이미 과잉실재이자 현실보다 먼저 오는 것이자 현실을 구조화하는 것이라는 주장을 펼치죠. 원본과 사본,
현실과 비현실,
진짜와 가짜, 실재와 이미지 등의 이분법적 구분이 뒤흔들린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로타류 이미지는 성적 판타지와 미감적 배치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여성이 욕망할 만한가, 유아화된 여성신체의 무해함, 무력성과 남성 신체가 관계맺는 법은 무엇인가 등에 대한 욕망의 구조화인 것입니다. 특히 젠더 감수성이 바탕이 된 성교육이 부재한 사회에서 이러한 이미지들은 곧 욕망의 표본이자 교과서로 기능하여 남성이 원하는 바가 곧 여성이 원하는 바로 오인되어 실행되는 것입니다.


테디베어식 성노예 여성 이미지의 만연을 통한 공포의 사기라고 표현하셨는데 로타류 이미지가 주조하는 유아화된 여성은 소프트한 이미지부터 하드코어한 이미지를 차용해 전략적으로 배치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를 통해 수동성의 강도들-무해한 여성에서 테디베어 이미지까지-를 체화한 이만이 욕망할 만한 여성으로 이상화되는 것, 이에 대한 문제의식조차 검열 의지로 튕겨져나가는 것, 수동성의 강력한 주지방식이 성적 자유의 실현으로 탈바꿈해서 아무렇지않게 받아들여지는 현실에서 페미니스트들은 공포의 감정을 느낄 것입니다.


또한 로타류 이미지 비판 페미니스트들은 특정 여성성의 재현체계가 이미지들의 세계에 국한되지 않고 이것이 여성들의 신체성을 운용하는 방식(화장법과 드레스 코드, 웃는 법,앉는 법, 걷는 법 등)은 물론 자기애 획득과 박탈 방식과 너무도 밀접히 연동됨을 온 몸으로 겪어내는 여성들의 현실, 그것을 소리높여 가시화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남성들은 특정 남성성을 과도하게 이상화한 이미지에 속박되어 자신의 신체성을 도려내고 깍아냄과 동시에 자기몸을 부정의 대상이자 혐오대상으로 인식해 매순간 불화하는 경험을 여성보다 극히 적게 가짐으로써 이 사안에 대한 심각성을 덜 인식할 가능성이 높다 하겠습니다.


로타류 이미지 비판의 화살은 이러한 이미지의 생산자와 이를 소비하는 자, 즉 남성중심적 욕망 매트릭스의 직접적 수혜자이자 성적 주체자리를 점유하고 있는 이들로 타겟팅되어야한다고 여깁니다. 
유아화된 여성, 수동화되고 남성 욕망 그릇으로 대상화된 방식을 자기미학화와 자기가치화의 경로로 여겨 피사체가 된 이들 역시 남성 욕망 매트릭스 유지의 부분임을 간과할 순 없지만 이들을 '아이들을 소아성애자에게 팔아넘기겠다는 선언자'라는 라벨링이 있다면 이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이는 비판이 겨냥해야할 지점의 적확성이 다소 어긋나보이며 로타류 이미지 생산자와 소비자들에게 면죄부를 주는 방식-피사체가 되려는 여성들이 있으니 이런 이미지 생산이 있을 수 밖에 없다는 논리로 귀결되어 이 모든 비판이 여성에게로 다시 집중화되고마는 방식으로 가동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피사체가 된 여성이 왜 자유의 박탈이 극대화된 로타류 이미지에 갇혀있으면서도 이를 자유의 실현으로 여기는가를 질문하는 것이 로타류 이미지에 대한 페미니스트적 비평지점일 겁니다. 이는 곧 이 사회에서 가치와 자리를 부여하는 위치가 남성들에 의해 독점되고 있음을 드러냅니다.


남성이 설정한 욕망경로를 통해서만 자신에게 가치가 부여되고 자기몸과 관계맺을 수 있는 이러한 방식, 이것이 아닌 다른 욕망의 판 직조에 대한 상상력이 허용되지않기에 피사체가 된 여성들이 늘어나는 것입니다.
이로써 로타류 이미지 피사체가 된 여성의 욕망은 페미니즘적으로 무조건적 부정의 대상이 아닌 비판적 분석지점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저 역시 이 논쟁이 남성중심적 욕망 매트릭스에 대한 도전이자 페미니즘적 논의들의 세밀화 과정이 되길 바랍니다.


이서영 → 윤김지영 ②


윤김지영 님의 답변에 다시 답합니다.
 
여러 차례에 걸친 길고 꼼꼼한 문제제기에 우선 감사를 표합니다. 글을 쓰신 시간이 아침 일찍이라서 감사한 마음과 죄송한 마음이 같이 드네요 :)


 
로타의 이미지에 대해선 다양한 해석이 있을 수 있습니다. 윤김지영 님의 해석에 대해 존중합니다. 이미지의 해석에 대해서는 제가 부연할 문제가 아닙니다. 저는 비평이 어떤 방식으로 담론으로 형성되며 무엇을 타격하고 있는지를 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박해에 대해서 “박해란 해고나 열외, 배제 등과 같은 사회적 죽음은 물론 생물학적 죽음이 집단적 차원에서 가해지는 것을 뜻한다”고 두 번째 글에서 정의하셨는데요. 저는 로타가 박해받는다고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실제로 로타는 말씀하신 것처럼 많은 연예인들과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찾아보니 여성뿐만이 아니라 남성들(제국의아이들, 허경환, 김기리 등)과도 활발한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로타와 작업을 한 여성인 이희은 씨는 ‘로타와의 작업 = 아동성폭력 조장’이라는 이유로 “니 애미 보는 앞에서 강간을 당해봐야 정신을 차리지. 한남들한테 한 번씩 돌려주고 너무 헐거워져서 허벅지가 벌어졌다느니. 로타하고 무슨 체위로 했냐느니" 같은 댓글을 받습니다. 저는 이런 상황에 대해서 박해라고 인지했습니다.
 
윤김지영 님께서는 설리의 생크림을 짜넣는 퍼포먼스, 노브라 사진, 순결 서사를 비웃는 사진들에 대해서는 페미니스트들이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으나 로타와의 작업들이 문제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설리의 사진은 그런 방식으로 비판받지 않습니다. 로타와 작업을 하고 이후 설리의 모든 ‘성적인’ 사진들은 ‘로리타’의 맥락에서 해석되기 시작합니다. 말씀하신대로 그 댓글들에는 ‘사랑스럽고 조신한 설리’를 잃기 싫은 남성들의 분노도 있을 것이지만, ‘로리타 이미지’에 대한 페미니즘적 분노 역시 마구 뒤섞여 있습니다. 댓글창에서는 이들 사이에 긴장관계가 발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악플을 막고 싶은 설리의 팬들과 이들의 긴장만이 발견됩니다.
 
설리가 모텔이나 호텔으로 추정되는 곳에서 찍은 사진이나 맨발로 거울을 보며 찍은 사진 등, 단순히 성적 이미지를 유추할 수 있는 사진에도 “어 로리타” “ㅋㅋㅋㅋ이런 사람 아직도 있네 님도 한번살다 가는 인생 입에 생크림 쳐넣는 동영상 올리거나 로타랑 소아성애 사진 찍어서 우리나라 아동범죄에 열심히 기여해보세용~~” “로리타는범죄아님?“ 같은 댓글이 달립니다.
 
말씀하신대로 이것은 적확한 타격지점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미 타격은 이런 방식으로 이뤄지고 있습니다. 언제나 심각한 비난에 입장을 발표하는 것은 로타와 작업한 여성(설리, 이희은)이나 로타의 사진이 좋다고 말한 여성(신세휘), 로타를 팔로우한 여성(타이미) 등입니다. 여성에 대한 타격이 늘 그렇듯 여기에는 성적인 비난이 뒤섞이죠.
 
저는 이렇게 타격지점이 엉망이 된 이유가 바로 ‘만연한 것’과 ‘만연하지 않은 것’을 뒤섞은 데에서 왔다고 생각합니다. 윤김지영 님의 글에서도 그런 뒤섞임을 봅니다. 윤김지영 님께서는 로타의 사진에 대해 언급하시며 ‘소아성애’라는 표현을 여러 번 사용하셨습니다. 말씀하신대로 소아성애는 상호적인 것이 아니라 일방향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10대 후반의 소년/소녀에게 이끌리는 것은 충분히 상호적일 수 있습니다. 저 역시 로타의 사진이 훌륭하고 아름답다고 생각지는 않습니다만, 로타가 자신의 작품에서 사용하는 코드들은 ‘교복, 체육복, 반바지, 니삭스’ 등 소아보다는 10대 후반의 청소녀에게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것들입니다. 여성을 수동적 존재로 묘사한다는 비판을 피해갈 수 없을 것이며 이미 그런 비판을 충분히 받고 있는 사진들이지만 이 사진들에서 소아를 찾기는 어렵습니다.
 
얼마 전 종영한 드라마 <도깨비>는 주인공이 ‘18세’라는 이유로 소아성애 논란에 휩싸였습니다. 18세는 소아가 아닙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여전히 그때도 아동성폭력이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저는 이런 점에서 논의가 ‘만연한 것’과 ‘만연하지 않은 것’을 뒤섞고 있고, 모든 미성년을 소아와 동급으로 취급하고 있기 때문에 결론적으로 미성년의 섹슈얼리티, 성적 자기결정권을 지우는 데까지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젠더성에 대해서 언급하셨는데, 저는 ‘18세’에게 ‘소아성애’ 논란이 일어나는 상황에서는 남성과 여성 모두가 포함될 수 있다고 생각했으므로 굳이 성별을 언급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습니다.)
 
남성적 욕망의 구조가 전부가 아님을 말하는 것은 당연히 무척 훌륭한 일입니다. 그런 목소리가 더 늘어났으면 좋겠습니다. #이렇게_입으면_기분이_조크든요 해시태그 운동이 얼마나 많은 여성들에게 해방감을 안겨주었는지 기억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방식의 욕망을 보여줄 수 있고, 구조에 도전하는 ‘성적 액티비티’와 ‘미적 액티비티’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방식이 미성년과 소아의 차이를 지우고, 사진에 대한 비판과 범죄에 대한 비판의 경계를 흐리는 방식이라면 문제제기가 필요합니다. ‘여성을 수동화 한다’와 ‘아동 성폭력을 조장한다’는 아주 다른 말입니다. 아무리 사회에서 여성이 수동적으로 취급받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아동 성폭력과 같은 것이 될 수는 없습니다.
 
SNS에서 로리타 이미지를 비판하는 사람들 중 많은 수는 그 간극에 대해 어떤 논증도 하지 않고 비약합니다. 그리고 ‘아동 성폭력’의 이미지는 너무나 강렬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우리 아이들이 위험하다”는 말에 쉽게 빠져듭니다. 그리고 그들은 여성들에게 ‘흉자’라는 딱지를 붙이고 아동성폭력 조장범이라고 악플을 답니다. 저는 이런 방식으로 이미지를 구성하는 것에 대해 ‘공포를 이용한 사기’라고 서술했던 것입니다. 욕망에 대한 비판, 욕망을 투영한 이미지에 대한 비판, 욕망을 실제로 행한 행동에 대한 비판은 모두 구분되어야 합니다.
 
물론 그 사이에는 연계점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동일하지 않습니다. ‘동일하지 않다’는 것이 저의 가장 큰 문제의식입니다. 말씀하신 논의대로라면 ‘자유의 박탈을 자유의 실현’으로 받아들이는 여성들의 욕망을 분석하기 위해서라도 이런 방식의 비약은 멈춰야 합니다. 처음 "피사체가 되길 원하는 여성들의 욕망을 관용해야 한다"고 글을 쓴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윤김지영 → 이서영 ③


< 이서영님의 답변에 대한 저의 답문2 >


1. 박해의 대상을 로타와 작업한 여성들(이희은이나 설리)로 한정함과 동시에, 페미니즘적 분노가 겨냥하는 지점이 특정 여성들로만 귀결된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습니다. 이를 입증하기 위해 확증편향(確證偏向)적 사례들의 댓글들만 선택적으로 가져온 것은 증거 수집 단계에서 선택편향이 이미 발생했다고 판단됩니다. 
왜냐하면 첫 번째로 페미니스트들은 로타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로타류 사진이라는 아류버젼의 증식에 대한 강력한 문제제기를 개진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것을 소비, 확산시키는 매체의 남성중심적 유통구조, 이를 소비하고 있는 이들에게도 비판의 날을 향하고 있음이 간과되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 이서영님은 설리의 여러 전복적 퍼포먼스들에 대한 페미니스트적 분석과 비평들에 대한 의견들은 전혀 고려의 대상으로 넣지 않음으로써 본인이 생각하는 페미니즘은 여성에 대한 혐오를 여성이 재생산해내는 국면으로만 한정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편향적 논증구조는 페미니즘이 ‘여성과 여성 간의 적대관계를 조장하는 사상’이라는 결론으로 이어지게 하는 장치라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이서영님께서는 자신의 주장을 합리화하기 위해 페미니즘적 담론의 지형들을 너무도 협소한 단일지점-여성의 여성에 대한 분열과 적대 이론으로 환원하고 있으신 겁니다.


2. 로타류 이미지를 단순한 성애적 욕망의 표현으로만 볼 수 있는가?에 대한 분석지점이 이서영님의 답변에선 의도적으로 탈각되어있습니다. 왜 이토록 로타류 이미지가 재현해내는 특정 여성상에 남성들은 물론 여성들이 열광하는가의 문제는 곧 특정 판타지의 열성화 구조를 살펴보려는 첨예한 분석의지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단지 많은 이들이 열광하니 아마도 좋은 것일 것이고 그러니 이를 인정해주고 용인해야한다는 것이야말로 가장 게으른 비평방식입니다.


이서영님의 원글에서는 설리만이 아니라 어린아이처럼 보일 수 있는 옷을 코디한 이들에 대한 공격을 언급하셨는데, 로타의 이미지를 차용한 로타류 이미지들이라는 확장, 변용된 아류 이미지 버전에서는 이제 사춘기에 들어선 이들에서 더 연령대가 내려간 유아들의 특정 복장들이 직접적으로 드레스 코드로 여자 아이돌에게도 입혀지고 있는 실정입니다. 즉 로타 이미지가 로타의 작업으로 한정되지 않고 이상증식하고 있으며 이것이 여러 쇼핑몰이나 아이돌 복장 등에서 적극적으로 차용됨으로써 주류적 여성상의 재현체계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들은 여성의 유아화, 수동화만이 아니라, 나아가 아동복 쇼핑몰에서 아동 모델들의 과잉성애화로도 이어지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 로타 이미지가 단독적 이미지의 창작행위가 아니듯이 다른 이미지들도 로타에게서 참조점을 얻어 무해한 여성, 무지한 여성, 저항할 수 없는 여성, 구멍으로 환원되길 기다리는 여성상에 미성년이라는 사춘기 후반대 여성상은 물론 유아적 여성상을 생산해냄으로써 미성년과 소아의 차이를 지우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미성년과 소아의 차이를 지우는 것은 제가 아니라, 소아적 이미지를 소비할 만한 욕망의 미감 대상으로 여기도록 하는 로타류 이미지들의 효과인 것입니다. pedophilia에서 pedo는 사춘기 이전의 아이와 사춘기 초반대에 있는 이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정의되는데, 로타 이미지의 아류버젼인 로타류 이미지들의 증식구조는 소아성애라는 개념틀을 통해 충분히 읽힐 만한 요소들을 명시적으로 드러내며 이를 활용해 욕망의 도발성과 심미성을 소비하도록 합니다.


나아가 이서영님은 욕망에 대한 비판과 욕망이 투영된 이미지에 대한 비판, 욕망을 실행한 행동에 대한 비판의 층위가 구분되어야한다고 하셨습니다.
자, 이 구분법이 과연 슬라이드 면처럼 명확히 구분될지 살펴보겠습니다. 욕망에 대한 비판이라는 표현에서 욕망 그 자체를 의미하는 듯 보입니다. 그러나 욕망 그 자체는 욕망에 대한 재현 방식, 표현 방식을 통해서만 비로소 문화, 사회적으로 욕망이라는 자리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프랑스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깡은 욕망을 언어체계, 재현체계의 산물로 정의내리기도 하지요. 이를 통해 욕망에 대한 비판과 욕망이 투영된 이미지에 대한 비판이라는 이 두 층위가 그렇게 명확히 나눠질 수 없음이 드러납니다. 왜냐하면 욕망은 그것이 이미지든, 언어이든 간에 재현물을 통해서만 비로소 형태화되고 명명되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 욕망을 실행한 행동과 욕망에 대한 이미지 간의 구분을 이야기해봅시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기나긴 질문들을 거쳐 성적 욕망을 실행해왔나요? 
과연 무엇이 성행위이며 어떤 것이 여성적 성행위이고 무엇이 남성적 성행위인가, 어디까지가 유사 성행위이고 어디까지가 성행위인가, 성행위의 완결은 무엇이라 할 수 있으며 성행위의 서사구조는 어떻게 진행되어야하는가 등에 대한 질문을 심도 깊게 하기보다 성적 욕망이 투영된 이미지-포르노그래피를 찾아보고 이것을 흉내내고 모사하기, 이 이미지들을 항시 염두해 두고 실행하는 것을 ‘성행위를 했다’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 욕망에 대한 이미지와 이것을 실행한 행동이 완벽히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욕망을 투영한 이미지가 욕망 행위들을 세밀하게 구조화하고 있으며 욕망행위들은 욕망 이미지에의 충실함 정도로 재정의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로타류 이미지들이 특정 여성상의 재현을 통해 남성과 여성간의 성적 관계의 구성방식, 몸의 가치화 방식을 구조화하고 이것이 이미지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행위의 실행에서 먼저 오는 것, 참조점, 표준점으로 기능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만연한 것과 만연하지 않은 것을 뒤섞는다고 하셨는데 우선 이 두 용어에 대한 이서영님의 정의방식부터 따라가 보겠습니다.
만연한 것은 곧 용인할 만한 것이자 만연하지 않은 것은 용인될 수 없는 것이라는 정의방식을 설정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이서영님은 용인의 폭을 만연함, 즉 숫적 우위성, 전파확산성의 선점으로 정의내림으로써 ‘빻은 욕망도 욕망’으로서 인정해야한다는 결론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빻은 욕망의 만연을 이 현실에서 직접적으로 확인하고 있기에 이것의 만연함, 숫적 장악력이 곧 이것의 정당함과 옮음, 아름다움을 보장하는 것이라고 여기는 태도에서는 어떠한 비판적 관점-욕망 구조가 이데올로기적 전투의 장이자 무의식적 층위의 축적이자 변형이라는 지점들이 전혀 투영되어있지 않습니다.


3. 이서영님은 10대 후반의 소년/소녀와 성인 간의 섹슈얼리티를 마치 10대 섹슈얼리티의 유일한 성적 자유로 환원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10대 섹슈얼리티는 성인과의 관계로만 축소될 수 없는 것입니다. 10대가 자기 자신의 몸과 관계 맺는 자기 에로스적인 몸의 발견, 몸 위에 쾌락의 감각점들을 배치하는 과정 등도 10대 섹슈얼리티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즉 자기 자신의 몸에서 무엇이 쾌락의 지점인지를 탐색할 수 있도록 하는 성교육의 제공과 더불어 10대와 10대 간의 섹슈얼리티의 문제에 대한 가능성도 열어놓고 이들에 대한 피임교육은 물론 무엇을 성적인 것으로, 무엇이 욕망할 만한 몸인가, 어떠한 것이 성적 행위의 서사이자 이것의 완성인가 등에 대한 질문과 실천들이 기존의 주류적 포르노그래피의 이미지에 포획당하지 않도록 하는 지난한 과정이 바로 10대 섹슈얼리티가 새롭게 직조되는 방식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서영님이 전제하고 있는 10대 후반의 소년/소녀와 성인 간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낭만화 구조에는 여전히 성에 무지한 자와 성을 가르쳐주는 자, 미숙한 자와 성숙한 자 등의 이분법적 권력구조 속 이성애적, 성기중심적 섹슈얼리티 경제를 유일한 섹슈얼리티의 서사로 전형화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4. 이서영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이렇게 입으면 기분이 조크든요 라는 해시태그를 통한 새로운 여성성의 재현들이 기존의 전형적 미감의 양식과 남성중심적 심미화의 전유구조는 물론 욕망구조를 해체하는 방식으로 생산되는 것의 필요성에 동의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한시적 해시태그 선언만이 아니라 전문 작가들에 의해 새로운 여성성의 재현양식들로 다루어져 생산, 유통, 소비되는 대대적 현상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있음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는 곧 욕망의 재현구도를 생산하고 소비하는 장이 이미 남성중심적으로 개편되어있음을 더욱 명확히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러한 편향적 재현체계에서 남성중심적 욕망구조 속 자유를 획득하리라 오인하고 있는 여성들을 주체적 행위자라는 자율성의 프레임으로 읽어내어 관용을 이야기하는 것은 남성욕망 매트릭스에의 편입을 축복하는 행위에 불과합니다. 
왜냐하면 피사체가 된 이들이 주체적으로 자발적으로 욕망 매트릭스에 들어왔다는 그 환상이 도대체 어떠한 욕망판의 직조방식에서 기인했는가부터 철저히 들여다보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이러한 욕망판이 어떻게 파열될 수 있는가, 어떻게 여성들이 순응하지 않음에도 자기애와 심미성, 자유라는 가치를 구현해낼 수 있는 욕망판이 가능한가, 그 전략들은 무엇인가 등에 대한 치열한 고찰이야말로 비평의 몫인 것이자 페미니즘의 사유역량일 것입니다. 
이서영님은 페이스북의 다른 글에서 우파 페미니즘을 비판하셨는데 제가 보기에는 이서영님이 로타류 이미지에 대해 취하는 태도는 상당부분 기득권적 남성질서에 타격을 주지 않고 남성들을 연민하고 보듬어주는 것, 남성적 욕망방식에의 안착을 자유와 주체성으로 여기도록 하는 우파(?) 페미니즘의 뉘앙스를 적극적으로 차용하고 있음을 인식하길 요청드립니다.


나아가 남성들이 전유하고 있는 언어와 가치체계에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기꺼이 순응하는 것만이 아름다움이라는 가치와 자기애의 발생과 강화, 자유까지 부여받게 될 것이라는 지배강령에 그 어떠한 비판적 분석도 투입할 수 없다면, 그것은 비평의 죽음을 의미할 것입니다.


이서영 → 윤김지영 ③


윤김지영 님께 보내는 세 번째 답글
 
1.
 
윤김지영 님께서는 제가 ‘확증편향’을 가지고 댓글을 보셨다고 여기시는군요. 그것이 페미니스트들의 비평을 간과하고 있기 때문이구요. 그러므로 비평을 적대지형으로 환원한다고 서술하셨네요.
 
설리의 ‘노브라’, ‘생크림’ 사진에 대해 많은 페미니스트들이 속 시원해 했던 것을 알고 있습니다. 초반에 그 사진들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오갔던 것을 기억합니다. 저는 그 부분에 대해서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로타에 대한 페미니즘적 비평도 물론 많습니다. 그 결과 이제는 때로 로타를 공격하는 흐름에 대해 부정적으로 서술하는 사람들조차 ‘로타 사진을 좋아하는 건 아니’라는 말을 반드시 붙여야 하죠. 직전에 쓴 글에서 저 역시 그랬습니다. 그리고 현재 로타에 대한 사회적 분위기는 비평을 넘어서서 모종의 ‘소비자 운동’ 형태가 되어 있습니다.
 
소비자 운동 그 자체에 대해서 모두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당연히 아닙니다. 소비자들은 로타의 사진을 불매할 수도 있고 불매하자고 선동을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현재 이 운동이 향하는 방향은 윤김지영 님께서 말씀하신 ‘적확하지 않은’ 방향인 것이 문제입니다. 로타에 대한 비판은 설리, 이희은, 타이미, 신세휘 같은 여성들에게 ‘로리타’라고 악플을 다는 조직적 집단이 형성될 만큼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녀들에게 달리는 악플에 대한 비판이 그만큼 존재하진 않습니다. 그런 일이 있었다는 기사들은 종종 있지만요.
 
‘간과됨’을 말해야 한다면, 사회적 논의의 지평에서 어느 쪽이 더 ‘간과’되고 있는지에 대해서 말해야 합니다.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되어왔던 비평을 다시 한 번 충분히 서술하고 나서야 ‘악플을 받는 여성들’에 대해서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온당한 일입니까? 설리의 여타 사진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서술했던 일각의 페미니스트들이 당연히 존재합니다. 그들 중 어떤 사람들은 ‘안티 로리타’ 진영에도 함께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긍정적 서술’이 실제로 설리를 향하는 악플을 막아주지는 못했습니다. 전에 말씀드렸다시피 오히려 대중에게는 설리의 모든 성적인 애티튜드를 로리타로 환원하는 결과를 낳았죠.
 
페미니즘 안에 당연히 다양한 담론 지형이 존재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 로타와 작업한 여성들을 일점타격하는 지형도 ‘분명히’ 존재합니다. 이미 존재하는 것에 대해서 말을 하니, ‘다양한 담론지형이 존재한다’고 대답하는 것은 무용합니다.
 
2.
 
욕망, 욕망이 투영된 이미지, 욕망을 실현한 행동이 명확히 구분되느냐고 물으셨죠. 물론 명확히 구분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흰색과 검은색 사이에 다양한 여러 그라데이션이 존재한다고 해도 흰색이 검은색이 되지는 않습니다. 결국 어느 순간 미성년자 의제 강간의 연령을 사회는 정해야 하고, 어느 순간 용인되지 않는다고 빨간 딱지를 들어야 합니다.
 
오히려 말씀하신 논지를 끝까지 밀어붙이면 ‘로타류 이미지’라고 명명하신 것이 ‘범죄를 표상’하고 있다고 말하기는 더욱 어려워질 수 있습니다. 그 사이의 수많은 그라데이션이 모두 한 가지라고 말씀하실 생각이 아니시라면요.
 
저는 ‘만연한 것’이 곧 용인되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지 않습니다. 그렇게 말하지도 않았고요. 이를테면 1930~1940년대의 나치 독일에서 유대인을 대하는 방식은 ‘만연한 것’이었겠지만 그 시대에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해서 절대로 용납할 수 있는 것이 아니죠. 단지 우리가 계속 말하고 있는 ‘로타류 이미지’는 당연히 비평의 대상이 될 것이지만 거기에 참여한 모든 사람이 배제당해야 할 수준의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는 것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제가 박해의 당사자로 지목한 그 여성들이 그런 상황에 처해야 할 수준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만연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뒤섞인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설령 정말 ‘소아성애적’ 이미지로 사진을 찍는다고 할지언정 그것이 직접적으로 소아성애 범죄와 같지 않다는 이야기와 함께 했죠. 이 대화는 이 부분에서 정의를 내리고 지속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1) ‘로타류 사진’은 소아성애를 유발하는가?
2) 로타와 함께 사진을 찍은 여성들에 대한 사이버 테러가 비평의 영역에 들어가는가?
 
3.
 
저는 미성년이 성년과 관계 맺는 것이 유일한 미성년의 섹슈얼리티라고 한정한 적이 없습니다. 계속해서 쓴 말들이 부당하게 요약된다는 인상을 받게 되네요. 지금 상황에서 가장 문제시 되는 것이 ‘성년과의 관계’이기 때문에 이 부분을 서술한 것입니다. 미성년 자신이 스스로를 성애화하는 것이나, 미성년들끼리의 관계에서 서로를 성애화하는 문제에 대한 서술에 대해 당연하게 동의합니다만, 이 서술이 제 서술의 어떤 부분에 대한 반박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대화가 자꾸 공회전을 하고 있다고 느낍니다.

 
#이렇게_입으면_기분이_조크든요 해시태그에 대해서 더 고무되어야 할 방식이라는 점에 동의하셨는데요. 이 부분에 대해서라면 저는 바댕테르의 이야기를 빌려오고 싶습니다. 올바른 성의 윤곽을 그려내는 것보다 추방해야 할 성의 모습에 더 집착하는 것은 오히려 여성들의 성해방을 결박하게 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더 필요한 것은 검열과 사이버테러가 아니라 새로운 성적 형태에 대한 액티비티입니다. 이를테면 르네 비비앙이 ‘와디즈 왕비’의 이야기를 빌려와서 주체적인 여성상에 대해서 생각한다거나, 카트린 M이 자신의 성애를 탐구한 글을 쓰는 것, 혹은 00년대의 <봉자> 같은 실험들이 있을 수 있겠죠. (물론 이 모든 것이야말로 완전하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더 자유롭게 장려되어야 할 성적 액티비티에 대한 예시일 뿐입니다)
 
4.
 
제가 쓴 ‘우파 페미니즘’에 대한 글을 차용하신 것을 읽었습니다. 그 글은 ‘우파 페미니즘’을 비판한 게 아니라 박성은 님께서 ‘우파 페미니즘’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신 게 오류라는 지적입니다. 
 
저는 그 글에서 우파 페미니즘을 실제로 우파적 정치경향성을 보여준 매키넌 류의 페미니즘으로 정체화 했습니다. ‘맑시즘을 젠더에 적용한 페미니즘 = 좌파 페미니즘’이라는 도식이 실제로 정치적 지형에서 어떻게 어긋나는지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매키넌 류의 반 포르노 진영 페미니즘은 “우리 아이들이 위험하다”는 논리를 가장 많이 적용한 페미니즘입니다. 매키넌은 제가 그 글에 썼듯이 공화당 의원들 및 기독교 우파와 결탁하여 포르노 금지법을 통과시켰습니다. 매키넌은 ‘기득권적 남성질서’에 타격을 주고 싶었기 때문에 우파적 정치를 선택했습니다. (윤김지영 님의 우파 페미니즘에 대한 정의가 저와 다를 수는 있겠지만 그 글에 기대어 말씀하셨으니) 오히려 제 정의에 따르면 저는 매키넌과 반대편에 서 있죠. 그리고 이 경우 ‘우파 페미니즘’에 더 근접한 것은 로리타 이미지에 반대하는 페미니스트들입니다. 저는 명백한 정치적 우파를 천명하고 있는 박성은 님께 당신이 하고 싶어하는 것은 오히려 좌파 페미니즘일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드린 것이죠.
 
실제로 한국에서 아동·청소년의성보호에관한법률, 소위 아청법을 대표발의한 발의자들은 대부분 당시 한나라당 소속의 의원들입니다. 윤석용, 권영진, 신상진……. 그리고 2017년에 와서 “이런 건 아청법에 걸릴 것 같아서 출판물 및 방송 심의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실질적 검열이 일어나면 안티 로리타 이미지를 주장하는 페미니스트들이 검열에 반대할까요? 저는 이 점에 대해서 매우 회의적입니다.
 
로리타 이미지에 대해서 말하는 많은 분들이 ‘오! 롤라’ 향수 광고를 언급하시더라구요. 한국이 아니었다면 로타는 이미 감방 갔을 거라는 식의 이야기와 함께 등장합니다. 하지만 이 사례가 언급될 때 마크 제이콥스가 격렬하게 항의했던 것, Coty UK와 ES 매거진, 선데이 타임즈 등이 이 광고에 대해 전혀 항의를 받지 못했다고 증언했던 것, 모델이었던 다코타 패닝이 ‘그건 그저 향수병일 뿐’이라고 했던 것, 여러 언론들이 논쟁적으로 이것이 검열인지 아닌지에 대해 다뤘던 것은 전혀 언급되지 않습니다.
 
그런 부분들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 이상 저는 여전히 이 논쟁이 ‘선언’에 머무르기 쉽다고 생각합니다.
 
+) 덧.
혹시 괜찮으시다면 이 논의가 오간 다음 텀블러, 브런치 등 다른 곳에 아카이빙을 해 둘까 합니다. 나중에 다시 찾아보면서 생각해 보고 싶은 부분들이 많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을 수 있을 듯합니다. 어떠신지... :)


윤김지영 → 이서영 ④


< 이서영님의 세 번째 답변에 대한 제 답문 3 >


1. 로리타 논쟁의 수많은 쟁점들을 로타 사진 속 피사체가 된 여성들에 대한 사이버 린치의 문제, 악플의 문제로만 환원하는 것이 어떠한 논리적 궤적을 낳는지 한 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서영님이 집중화하고 있는 논지에 의하면, 로타 이미지 반대하는 페미 진영은 설리에게 악플다는 집단으로 설정되고, 로타 이미지에 대해 긍정적 비평 또는 수용하는 페미 진영의 몫은 설리의 악플을 막아주는 집단으로 등장할 때에만 비로소 이 사안의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는 논리로 귀결되기 때문이지요. 
트위터에 있는 로리타 버스터즈라는 계정에만 들어가 보아도 특정 여성들에 대한 악플이 아니라 로타류 이미지를 생산하는 대형 아이돌 기획사의 마켓팅 전략, 쇼핑몰 이미지, 뮤직비디오 속 이미지 배치 등의 유통구조와 미디어 기술에 대한 확산 경로를 비판의 주요 대상으로 다룹니다. 즉 설리에게 악플달고 사이버 불링하는 집단과 급진페미진영을 등치시키는 오류를 통해, 로리타 논쟁을 설리라는 대중 이미지 아이콘에게 발산하는 소녀적 시기심의 발산과 이에 의한 집단 따돌림이라는 뉘앙스를 덧붙여버림으로써 이를 다시 남성욕망구조에서 인정받은 여성과 그렇지 않은 여성들 간의 이간질이라는 여성혐오적 사안으로 재정초시킬 수 있는 전제 설정이라는 점부터 철저히 재검토해 보셔야합니다.


그리고 저는 페미니즘 진영의 복수성, 다각성이라는 일반론적 개괄을 한 것이 아닙니다. 아직까지도 페미니스트들 내에서도 이 사안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가 결론나지 않았으며 여러모로 사유의 틀을 재직조하지 않고는 쉽게 덤벼들 수 없는 매우 민감한 사안이 바로 로리타 논쟁이라는 점을 부각시킨 것입니다. 즉 로리타 논쟁을 둘러싼 페미니스트 이론 진영, 활동 진영의 입장들은 아직도 생성 중이거나 신중론 고수 등으로 다각화되어있음을 드러낸 것이 제 논지의 목적입니다. 그러하기에 이서영님이 ‘이것을 이미 존재하는 것에 대한 재지적이며 무용한 것’이라는 본 것은 오히려 최신 이슈들을 둘러싼 페미니스트 지형의 역동을 제대로 읽어내지 않은 게으름의 일환이라 사료됩니다.


2. 로타류 이미지들의 그라데이션은 파스텔톤의 미감을 자극하는 소녀 이미지부터 테디베어식의 하드코어 이미지까지를 아우릅니다. 이러한 강도적 차이들이 표상하는 바를 범죄의 재현물로 일원화하고자 하는 것이 제 주장의 목적이 아닙니다. 
로타류 이미지들의 그라데이션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욕망할 만한 것으로 여기게 되는가, 욕망의 판 위에서 무엇이 대상화라는 극화된 자리에 놓여 있는가, 어떤 몸은 지워져버린 채 응시하는 눈으로만 존재하고 있는가, 왜 특정한 신체 포지션들이 반복되어 나타나는가 등을 읽어냄으로써 이것이 욕망구조의 전형화, 특정 패턴화에 기여하고 있음을 비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정말 로타류 이미지가 욕망의 미감확장을 위한 것이기만 한다면 왜 로타류의 피사체들은 대부분 어린 여성이자 어려보이는 여성, 무해한 여성들로만 설정되어 있는가부터 질문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로타류 이미지들이 반복적으로 생산해내는 무력하고도 과잉성애화된 소녀상에는 여성 신체를 남성적 힘과 폭력이 기입될 수 있는 백지로 설정하는 것과 이 백지를 남성욕망에 알맞게 마음대로 그리거나 구기거나 짓이기는 것조차 허용되며 무제한적 욕망 방출이 가능하다는 판타지에 기대여 있는 것이며 이러한 판타지의 촉진을 가속화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욕망의 환상구조가 단지 환상으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일상에서 여성이라는 타자의 신체에 대한 상호주관적 관계양식의 문제는 물론 여성과 남성 간의 이성애적 성애의 구성법에 대한 표본, 참조점으로 기능할 수 있다는 것을 비판하고자 한 것입니다.


이서영님은 ‘소아성애적 이미지와 소아성애 범죄는 같지 않다’라는 주장을 펼침과 동시에 소아성애는 범죄라는 인식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저와의 논쟁 가운데에서, 10대 후반의 미성년과 성인 간의 성애는 합의와 자유의 실현지점이 될 수 있지만 소아라는 사춘기 이전과 사춘기 초반대에 있는 이들이 성인과 맺는 성애는 범죄에 속함을 그 전의 답변문에서도 이미 밝혀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이서영님께서도 범죄의 영역으로 단호하게 분류하고 있는 소아성애와 이러한 범죄의 일환으로서의 소아성애가 이미지화되는 것과의 관계가 과연 어떻게 설정되어야하는가를 스스로가 입증해내야만 하는 아포리즘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소아성애라는 범죄의 일환을 비슷하게 재현해내고 이미지화하고 있는 소아성애적 이미지들의 확산은 무엇이 용인된 욕망할 만한 몸인가, 즉 욕망이 투여될 수 있는 심미적 몸의 대상에 소아성애적 몸이 추가됨으로써 이것의 실행에 대한 죄책감 완화, 사회문화적 구성물로서의 욕망구조가 남성적 본능으로 쉽사리 자연화, 정당화되는 것을 방관하는 것은 아닌가 라는 질문들을 추동시킬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서영님이 제기한 두 질문들의 방향성은 설정점부터 잘못 잡고 있습니다.
1) 로타류 사진은 소아성애를 유발하는가? 라는 질문은 로타류 사진을 낙인찍거나 낙인찍지 않고 용인하거나 두 입장만을 도출하기 때문입니다. 그러하기에 질문을 수정해야합니다. 특정 이미지라는 재현체계는 특정 성적 판타지를 추동하고 이러한 환상은 성애적 현실에 개입할 수 있는가로 바꾸어야합니다. 저는 로타류 사진이 소아성애의 유발원인이라는 단순화된 주장을 확정하고자 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로리타 논쟁구조에 내재해있는 숱한 욕망의 문제들, 특정 남성성의 구축과 여성성의 구축, 권력체계의 강화 등을 더욱 정치하게 다루어야한다고 보기에 첫 번째 질문을 수정한 것입니다.


2) 로타 피사체가 된 여성을 향한 사이버 테러가 비평의 영역에 들어가야하는가? 라는 질문은 로타류 이미지 반대진영의 페미니즘 비평이 특정 여성에 대한 사이버 불링의 사안으로만 축소, 환원될 수 있는가로 전환되어야한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저는 그 이전들의 답변에서 분명하게 피사체가 된 여성들에 대한 공격이 오히려 이러한 사진 생산자와 유통자, 소비자들에 대한 면죄부를 줌과 동시에 사안을 여성 대 여성간의 분열양상으로 치닫게 한다는 것을 여러 번 밝힌 바 있기 때문입니다. 
이서영님은 로리타 논쟁에서 피사체가 된 여성에 대한 공격만을 주된 비평의 지점으로 과도하게 설정함으로써 로리타 논쟁에서 길어내어질 수 있는 욕망의 구조와 욕망 배분판의 편향성, 욕망 재현의 생산권력, 재현체계의 생산자가 가치 생산자가 되는 독점구조 등에 대한 논의를 놓쳐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3. 로리타 논쟁에서 피사체가 된 여성들을 성적 자유의 구현자이자 주체적 여성으로 과대평가하는 이서영님의 비평방식에는 10대 후반의 어린 여성과 성인 남성 간의 성적 행위가 성적 자유의 실현방식으로 전제되고 있습니다. 
미성년이 더 이상 욕망되는 몸이 아닌 욕망하는 몸으로 구성되어 스스로의 몸에 대한 쾌락점 찾기, 미성년 간의 섹슈얼리티가 구성되는 법이 성기 중심적이지 않게 재배치하는 성교육들에 대한 논의를 언급한 이유는 로타류 이미지들이 바로 이 지점들을 완벽하게 은폐하고 탈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로타류 이미지에서는 성인이 아닌 듯 보이는 자, 어려보이는 자, 또는 어린 자들이 성인 중심적, 성기 중심적, 남성중심적 섹슈얼리티 경제에 그저 일방적으로 편입되는 자로만 재현될 뿐, 스스로의 몸을 남성중심적 시선을 경유하지 않고 욕망하기나 성기 중심적이지 않은 섹슈얼리티 배치라는 쾌락 실험 수행자라는 인식 자체가 배제되어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러한 의도적 탈각을 통해 가장 완벽한 욕망 대상화가 진행되고 있기에 바로 이 지점을 비판의 가격타로 삼은 것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성적 형태에 대한 액티비즘은 기존의 전형화된 욕망 구조가 어떻게 우리를 일상적으로 무의식으로 포박하고 있으며 그 이유는 과연 무엇인가에 대한 철저한 비판의 과정 없이는 도출될 수 없습니다.
모든 우등화된 가치들-심미성, 자기애, 자유가 전형화된 욕망 매트릭스에 안착하는 방식에서만 일방적으로 배분되고 있는 이 상황에서 이것에 대한 가격타 날리기, 균열내기, 비틀기라는 비판의 국면 없이는 이에 대한 대안적 미학이나 성적 액티비즘의 전복적 상상 단계로 비약할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남성중심적 욕망 매트릭스는 욕망구조만이 아닌 가치의 질서까지 독점하는 방식이며 이러한 욕망 배분판 일그러뜨리기, 균열내기는 곧 가치판을 다시 설정하여 다른 가치들을 생산해내기 등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하기에 거대한 욕망 매트릭스를 그대로 온전하게 내버려두고 마치 병렬적 세계 중 하나인 것처럼 다른 욕망방식이 동시적으로 평행우주처럼 진행될 수 있다는 나이브한 인식구조야말로 이 세계가 정상화 기제를 통해 특정 몸만을 심미화화고 특정 몸을 열등화하고 배제하는 위계적 권력의 장임을 은폐해버리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성적 액티비즘은 기존 욕망구조에 대한 비판적 단계와 동시적으로 진행되거나 그 과정에서 실행되는 행위들입니다.


나아가 로타류 이미지 비판 페미들은 단 한 번도 검열을 한 적이 없습니다. 검열이란 확산, 유통구조 속에 들어올 수조차 없도록 그 전 단계에서 생산, 판매 단계를 사전에 막아버리는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검열 권력을 페미니스트들이 누린 바 없으며 검열을 행한 적이 없음을 명시합니다. 
로리타 논쟁을 성자유주의 대 성엄숙주의, 표현의 자유 대 검열주의라는 고루한 이분법적 프레임으로 단순화하시지 마시길 바랍니다.


4. 어쩌면 로리타 논쟁에 대한 철저한 사유의 몫이 여태껏 한국 페미니스트들에게 면제되어왔기에 지금과 같은 사안들을 미국 섹스 워 페미니즘 논쟁의 틀을 그대로 수입해 와서 적용하는 것으로 그 당혹감의 강도를 그나마 줄여보고자 하는 것일 겁니다. 그러나 로리타 반대 진영 페미들이 전개하는 논의구조가 미국 섹스 워 논쟁 구도에 그대로 기입될 수 있는가부터 세밀히 들여다봅시다.


이서영님은 로타류 이미지 반대 진영페미와 매키넌의 입장을 근접한 것으로 주장하고 있습니다.
매키넌의 전제는 여성과 아이, 제3세계 여성 등이 인신매매와 강간, 착취의 방식으로 포르노그래피 제작에 동원되고 있으며 이러한 성적 이미지 생산 단계부터의 여성 아동 착취가 발생하며 이것뿐만이 아니라 이렇게 제작된 이미지 재현구조를 통해 무엇이 여성적 성행위이고 남성적 성행위인가를 체화해나감으로써 섹스가 곧 수동적 여성과 공격적 남성 간의 자연화된 질서가 되며 여성 착취의 정당한 근거로 자리하도록 기능한다는 비판입니다. 이서영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단순히 “우리 아이들이 위험하다.”라고 주장한 것은 매키넌의 페미니즘 이론을 지나치게 단순화한 것입니다. 매키넌은 여성지배구조의 일환으로 포르노그래피를 분석하며 섹스 워 논쟁에 뛰어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맥키넌과 로타류 이미지 반대 진영 페미들이 등치될 수 없는 이유를 밝히겠습니다. 맥키넌은 포르노그래피라는 이미지 재현구조에 충실한 성적 행위의 실행을 남성과 여성 젠더 간의 권력 낙차가 그대로 기입, 반복되는 장으로 설정함으로써 안티 섹스적 입장을 취한 것입니다. 즉 섹슈얼리티가 자유와 해방의 지점이 아니라 젠더권력의 강화지점임을 드러내어 보여준 것입니다. 맥키넌은 반포르노그래피 입법안 통과를 위해 기독교 보수당과 손을 잡았으며 인디애나주 시조례로 이 법안을 정착시켰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정치적 결탁은 여성이 섹스할 권리인 피임권과 임신중절권에 대한 퇴보를 용인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로타류 이미지 비판 진영 페미들은 자신의 몸의 권리인 피임권, 임신중절권을 찬성하고 있으며 이러한 권리 주장은 섹스 자체에 대한 반대가 아닌 섹스할 몸, 안전하고도 즐겁게 섹스할 권리에 대한 주장이라는 점에서 안티 섹스적 입장이 아님이 드러납니다. 또한 로타류 이미지 비판 진영 페미들은 남성중심적 섹슈얼리티 경제의 욕망그릇으로만 남지 않고 이러한 욕망의 배분판을 다시 짜는 자가 되고자 하는 욕망의 야심가이자 무엇을 섹슈얼리티라고 할 수 있는가부터 급진적으로 되묻는 자입니다. 모든 섹슈얼리티는 남녀의 권력구조이며 제거되어야 한다라는 안티 섹스적 주장이 아니라, 섹슈얼리티가 젠더권력구조로만 환원, 축소되고 있는 것, 그것이 모든 욕망의 다가 아님을 소리 높혀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즉 욕망의 축소와 제거가 목적이 아니라 우리가 알고 있는 가시화된 욕망구조만이 욕망의 다가 아님을 소란스럽게 말하고 떠들어댐으로써 자신들이 욕망하는 자, 다르게 욕망하고자 하는 자임을 드러내어 보여줍니다.


로리타 반대진영페미들이 취할 수 있는 앞으로의 전략 중 하나는 욕망 매트릭스를 비판적으로 분쇄해내는 국면과 더불어 이러한 비판에 대한 페미니스트 이론가들의 개념 생산, 논쟁 프레임 재설정, 심미성의 영역의 재설정과 자기애와 자유 실현의 다른 경로탐색을 위한 욕망 구조와 가치 질서의 재편 등에 대한 이론들이 필요합니다. 
또한 여성이 자신의 몸을 성애화하고 쾌락화하는 다양한 자위도구들에 대한 정보 공유부터 심미적 몸의 독점권을 부수는 이미지 재현물들의 기획과 판매, 유통구조의 확보를 통한 성적 액티비즘의 실행들이 사진작가나 예술가 집단에서 실험되고 실행되어야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5. 그리고 아청법의 우경화 전략에 로리타 반대페미들이 가담할 것이며 이는 곧 우파 페미니즘화를 낳는다는 주장에 대해 반박하겠습니다. 2011년 9월 15일 발의된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은 한나라당 주도로 이루어졌지만 2012년 9월 7일 발의된 아동ㆍ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의 발의자들은 14명의 민주당 의원과 1명의 새누리당 의원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아청법 입법화 시에 로리타 반대진영 페미들이 모두 한나라당의 우파 정책에 동원되어 매키넌류의 우파 페미니즘의 화신이 될 것이라는 주장이 무효임이 드러납니다.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은 “아동·청소년대상 성범죄의 처벌과 절차에 관한 특례를 규정하고 피해아동·청소년을 위한 구제 및 지원 절차를 마련하며 아동·청소년대상 성범죄자를 체계적으로 관리함으로써 아동·청소년을 성범죄로부터 보호하고 아동·청소년이 건강한 사회구성원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함을 목적”으로 하는 법안입니다. 이 법안의 홍보, 교육 주요부처는 여성가족부로 2016년 11월에 지정되어있으며 이를 통해 이 법안이 매키넌이 기독교 보수당과 손잡은 법안과는 그 성격이 다름이 여실히 드러납니다.


매키넌이 반포르노그래피 입법안을 통과시켜 인디애나주 시조례로 확정하기 위해 기독교 보수당과 손을 잡은 것에는 성 자체에 대한 배격과 더불어 피임권, 낙태권의 금지, 결혼제도 이외의 섹슈얼리티 금지와 배격화 논리를 고수하는 논리와의 결탁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성가족부가 주요 담당부처로 설정된 이 법률의 목적은 사회적, 정치적 취약성의 구조에 더 많이 노출된 이들에게 정치적 사회적 시민권을 확대적용할 수 없는 현 상황에서 더 많은 신체적, 심리적, 물질적 권력을 누린 이들에 대한 권력 남용제한 규제를 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법안의 한계성에 대한 논의는 이 논쟁의 논외 사안으로 제쳐두겠습니다.
이를 통해, 아청법 발의, 적용이 우파 페미니즘화이자 맥키논류의 미국 페미니즘의 궤적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라는 주장 자체가 성립되지 않음이 드러납니다.


6. 그리고 ‘오 롤라’ 향수 광고가 로리타적 이미지라는 낙인의 예로만 쓰일 뿐 그것이 검열과 철회의 대상이 되지 않았으며 다코다 패딩 역시 그저 향수병일 뿐이다라는 발화를 페미니즘 비평지점으로 충분히 다루지 않고 있음을 문제 삼으셨습니다. 
자, 그러면 제가 다뤄보겠습니다.
논쟁이 되는 광고의 사진에서 왜 그저 향수일 뿐인 것을 향수가 뿌려지는 귓불이나 목덜미, 손목이 아닌 다리 사이에 끼워 넣어야만 하는 것일까요? 즉 이것이 단순한 향수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성적 어필을 위한 도구이자 성애적 측면을 강화하는 유혹의 기호임을 드러냅니다. 이러한 유혹의 기호로서의 향수병은 꽃병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꽃대는 발기한 남근적 이미지의 은유라면 꽃봉우리와 꽃잎 부분은 여성의 클리토리스를 연상시키는 것으로 남근과 여성 성기의 결합물로 보여집니다. 발기한 남근적 이미지의 향수병을 다리 사이의 적재적소(?)에 배치함으로써 이 향수의 소비가 곧 여성의 몸에 대한 정복행위로 이어질 수 있음을 은유함과 동시에 만개한 꽃잎은 여성의 만족감, 또는 여성성의 성취를 뜻합니다. 이것이 상징하는 바는 여성은 남성에 의해 욕망할 만한 존재가 됨으로써 자기애 상승 구도에 들어갈 수 있음이, 즉 욕망의 대상이 되는 것이 불유쾌한 일이 아닌 쿨한 일이자 존재의미가 부여되고 매력적인 심미성이 입증되며 이를 통해 자신에 대한 자기애역시 확보되며 성적 자유의 만개까지 누릴 수 있다는 것, 이러한 중층적 가치의 회로 안으로 들어왔음을 상징합니다. 
여기서 다코닝 패딩이라는 유약하고 무해하며 어린 이미지의 여성을 모델로 기용함으로써 향수병이라는 대체적 남근이 정복할 수 있는 신체성의 영역과 남성 욕망의 범위가 확장 가능함을 메시지화하고 있기도 합니다. 이 광고가 로리타 이미지로 여겨져 철회된 대표적 예로 로리타 반대진영 페미들이 소환하는 것은 무엇때문일까요? 이것이 정확한 사례에 대한 인용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로타류 이미지에서 보여지는 파스텔톤의 색감과 소품 배치를 통한 성적 의도성의 직접성, 미감의 범위 하에서 도발하기 등이 그대로 재현되었기 때문이라 생각됩니다.


그리고 이서영님은 로리타 반대 페미진영이 선언에 가까운 말만 하고 제대로 된 논증을 하지 않는다는 지적을 하셨습니다. 세련화되고 유려한 논증구조의 무게는 가장 보수화된 이론체계이자 기존 남성중심적 질서를 유지하는 것일수록 가장 그 층위가 두텁습니다. 왜냐하면 논증에 뛰어드는 학자군단에 대한 체계적 지원들도 매우 강력할 뿐만 아니라, 지금껏 축적되어온 지식의 역사 위에 그저 하나 더 추를 올려놓는 일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한국사회를 격동시키는 최근 이슈들은 그 역사성이라는 축적의 역사도 짧을 뿐만 아니라, 영미권의 개념틀이 그대로 적용되지 않는 한국사회의 맥락적 특이성이 있습니다. 또한 기존의 질서와 가치체계에 짱돌을 들고 전면전을 벌이겠다는 것은 기나긴 형이상학의 역사와 가치론, 인식론 등에 대한 도전을 의미하는 것이자 사람들이 당연하게 여기는 무의식적 욕망구조의 층위까지 건드려서 이것이 자연화된 질서가 아니라는 것도 논증해내야 하지요. 즉 이 지난한 논증과 반증, 철저한 비판과 새로운 개념을 생산하고 대안적 사유의 축을 구축해나간다는 것이 물질적 제반조건, 사회문화적 환경 속에서 자꾸만 제한을 받고 반발을 받아오는 것이기에 선언들의 파편들이 긴 논증구조로 들어오기도 전에 사라져버리고 말기도 합니다.


즉 로리타 반대페미진영이 주장하는 바들, 단말마의 비명같은 선언, 분노의 선언들이 이론적 궤도로 들어와 여물어가고 논의의 층위들을 구성해나가는 것은 페미니스트 개인의 역량 문제만이 아니라 이제 막 시작된 활동들에 대한 장기적 지원과 학문적 연계점들이 제공되어야할 구조적 문제인 것입니다. 
로리타 논쟁은 완성판이 아닌 사유의 시작점, 도전의 지점에 거합니다. 맨주먹으로 싸우기 시작한 이들의 날카로운 선언들이 없다면, 많은 이들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들 앞에 온몸을 진통해내며 "아니오"라고 하는 이들이 없다면 페미니즘은 태동조차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러한 선언의 가치들이 장기화된 이론적 논증의 층위로 이어지는 것은 한국 페미니즘의 현재적 관건이자 미래의 지평일 것입니다.


덧붙이기)그리고 아카이빙에 동의합니다. 이서영님과 진행한 논의의 부분들이 제 저서나 논문에서 부분적으로 인용되고 심화될 예정이기도 한데 이에 대한 서영님의 동의의사도 구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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