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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영 Jun 19. 2017

오늘도 ‘정의’는 안녕하십니까?

이것은 한 번 썼다가 밴 당한 원고이고 이곳에 아카이브 한다 ㅠㅠ

연예인에게 악플을 쓰다가 고소를 당하는 등, 온라인에서의 행동들 때문에 오프라인에서의 자아가 위협받을 때 사람들은 흔히 ‘인실좆’이라는 말을 한다. ‘인생은 실전이야, 좆만아’라는 문장의 줄임말인 인터넷 밈이다. 그리고 ‘인실좆’이라는 말에는 흔히 ‘사이다’라는 말이 함께 따라붙는다. ‘인실좆’ 썰이란 대체로 온라인 공간에서 ‘실전’인 오프라인의 인생이 ‘좆’이 될 수도 정도로 심각한 문제를 일으킨 정의롭지 않은 누군가를 현실의 권위를 빌려와서 처벌하는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 소셜포비아는 바로 이 ‘인실좆’을 시키고 싶었던 ‘정의로운’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영화는 비교적 안전한 포맷을 따라간다. 영화 속에서 ‘인실좆’의 대상이 되는 ‘레나’는 여성이며 한국 남성들이 대부분 예민하게 생각한다는 ‘군대’의 문제를 건드린 사람이다. 영화 속에서 레나를 몰아붙이는 이들이 가지는 정의감이란 기울어진 사회의 부정의에 살짝 한쪽 발을 기대고 있다. 그들은 인실좆을 시키기 위해 혼자 사는 여성인 레나를 떼거지로 만나러 갔을 때, 자신이 물리적으로 유리할 것이라는 사실을 완전히 이해하고 있다. 인터넷 문화 속에서도 군인으로서의 자기 경험에 함몰되어 있는 사람들은 언제나 어느 만큼은 경원시되는 분위기가 있었다. 그러므로 이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애초에 양게, 지웅, 용민의 ‘인실좆 레이드’에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상태에서 감정을 유지할 수 있다. 이것은 감독이 선택할 수 있는 사례들 중에 가장 안전한 선택지였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상황이 그렇지 않다면 어떨까. 가장 유명한 사례로는 IAC의 홍보 임원이었던 저스틴 새코의 사례가 있다. 2013년 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 가면서 그는 “아프리카에 간다. 에이즈에 안 걸렸으면. 농담이야, 나는 백인이니까!” 라는 트윗을 올렸다. 아프리카에 가는 열한 시간 동안 그 트윗은 1만 5천 번 리트윗 되었고 소셜 네크워크의 아우성 끝에 IAC는 저스틴 새코를 해고했다는 사실을 SNS로 알렸다. 수많은 트위터 사람들은 소위 ‘팝콘’을 튀기며 저스틴 새코가 공항에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공항에 내려서 그녀가 자신의 사회적 이름이 얼마나 추락했는지를 확인하고, 자신의 해고사실을 알게 되어 절망하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기를 기원하면서. 심지어는 “#HasJustineLandedYet(아직 저스틴은 도착하지 않았니)” 라는 해시태그가 돌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나쁜 행동을 한 사람에게 ‘정의’라는 이름으로 마음껏 언어로 위해를 가하며 사악한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


물론 이들은 레나를 죽이기 위해서 이런 일들을 벌인 것이 결코 아니다. 레나의 ‘인실좆 레이드’를 주최한 아프리카 VJ 양게는 카메라 앞에서 ‘레나에게 주먹질을 하겠다’가 아니라 ‘레나에게 사과를 받겠다’고 공언한다. 그 와중에 그는 레나의 방으로 들어가면서 ‘문이 열려있으니 나는 주거침입죄와는 무관하다’는 말까지 한다. 소셜미디어를 통해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 알지 못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즐겁게 하고 싶다는 욕망은 ‘내가 하는 행동에 책임을 지겠다’는 사고와는 상당히 거리를 두고 있다.


물론 ‘그저 트위터에 멘션 하나를 쓴 것’, ‘그저 페이스북에 글 하나를 쓴 것’은 반드시 응분의 책임을 져야할 엄청난 죄악이 될 수 없다. 때린 것도 아니고 살인을 저지른 것도 아니다. 기껏해야 조금 조롱을 하거나 다른 사람들과 함께 ‘조리돌림’에 참여했을 뿐이다. 심지어 잘못한 상대방에게 적당한 사과를 받아내려고 시도했을 뿐이다. 그렇다면 VJ 양게와 양게를 따라 레나를 만나러간 수많은 사람들은 무슨 권한으로 레나에게 사과를 요구하는가.


그들은 피해자이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의무복무를 해야 하는 군인이라는 공통된 경험을 가지고 있는 이들은 레나라는 악한 사회 구성원의 혐오발언 때문에 정서적인 피해를 받았다. 그들은 자신들이 저지르는 행동이 가해라는 프레임에서 스스로를 피해자로, 혹은 정의로운 연대자로 정체화하며 끊임없이 빠져나갈 수 있다. 국가에게서 필연적으로 받은 피해의 경험을 존중해주지 않은 레나에게 그들은 피해자의 정체성으로 사과를 요구한다. 사과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는 행위’다. 결국 당사자가 잘못을 인정함으로써 용서를 할 수 있는 관계의 새로운 차원을 여는 행위다. 물론 영화 속에서 레나는 끝까지 사과하지 않았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저스틴 새코는 사과를 했다. 그리고 새코는 새로운 직장에 취직해서도 다시 공격을 받고 길거리에서 사람들이 지나가는 새코의 사진을 찍어 다시 트위터에 업로드하는 일들을 겪었다. 그 사과란 ‘사과’로서의 의미를 가졌다고 볼 수 있을까? 그 사과는 어떻게 소셜미디어를 통해 ‘정의’가 구현되었는지를 사람들에게 전시했고 그들에게 소위 ‘사이다’를 선사했다. 그렇다고 해도 사안은 끝나지 않는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새로운 화낼 거리를 찾아 헤매기 때문이다. 이런 인식 속에서 조리돌림을 당한 개인은 절대로 복합적 평가를 받지 못한다. 새코는 앞으로도 영영 일자리를 얻을 수 없는 사람으로 존재해야만 한다.


치아에 단 교정장치가 이 컨셉의 화룡점정인데 그건 곧 블루레이가 나오는 영화에서 확인합시다


영화 속에서 아프리카 VJ를 맡고 있는 캐릭터 양게는 이런 시스템과 어떤 식으로 자아가 일치할 수 있는지 가장 선명하게 보여준다. 양게는 레나의 죽음에 벌벌 길 정도로 당황했으면서  도 새로운 ‘먹잇감’을 발견할 가능성이 생기자 다른 방식으로 활력을 찾는 인터넷의 시스템을 자신의 자아에 거의 이식한 것처럼 행동한다. 


때로 SNS에서 마주하는 사람들 중에는 ‘verified', 즉 확인된 사람들이 있다. 이미 이름이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유명인들은 흔히 계정 앞에 verified 표시를 달고 있다. 하지만 비단 이 정도로 온라인의 자아가 사회적 자아와 연결되어 있지 않은 사람이라고 해도 많은 사람들은 온라인 속 자아와 사회적 자아를 연결하고 살아간다. 페이스북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출신지와 출신학교 혹은 휴대폰 번호를 연동하라고 요청한다. 트위터도 걸핏하면 휴대폰 번호를 연동하라고 요청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설령 그런 모든 유혹에서 다 벗어나서 자신의 정보를 가리고 익명의 소셜 네트워크 사람이 되는 데에 성공했다고 하더라도 소셜 네트워크의 본질적인 특성인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는 결국 어떤 방식으로건 사용자를 확인된 사람으로 만들기 쉽다. 자신의 일상에서 겪었던 사소한 일들부터 사안에 대한 의견을 밝히는 행동까지, 소셜 네트워크는 사람의 일상에 너무나도 밀착해 있다. 언제나 ‘모니터 뒤에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모니터 뒤에 있는 사람들은 모니터 안과 삶을 쉽게 연동한다. 그 결과 영화 속에서 지웅은 레나에게 트위터 멘션을 보냈다는 이유로 자신이 누구인지 어떤 삶을 사는지가 인터넷에 공개되고, 용민은 자신의 과거 닉네임을 털리면서 자신의 삶을 통째로 다시 부정당하게 된다. 그것은 비단 영화 속에서만 있는 일은 아니다. 과거 닉네임을 언급하는 종류의 협박은 지금도 소셜 네트워크에서는 왕왕 벌어진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한 번 ‘악’으로 낙인찍힌 인간에게는 복합적 평가가 내려지지 않기 때문이다. 과거 문제가 있었던 사람으로 몰아가서 발언력을 약화시키려는 시도부터 현재의 문제를 과거의 닉네임까지 확장해서 그 사람을 인터넷 공간에서 몰아내려는 시도까지. 소셜 네트워크의 삶은 현실의 삶과 연결된 공간을 점점 늘려가고 있다. 좀 더 엄밀하게 말하자면 소셜 네트워크의 삶‘이’ 현실의 삶‘으로’ 확장되고 있다.


정의구현을 시도하다가 자신들 스스로가 ‘복합적 평가를 받을 수 없는 개인’의 위치로 추락한 지웅과 용민은 새로운 먹잇감을 찾아내기 전까지는 이미 현실의 영역까지 확장된 소셜 네트워크의 삶을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깨닫는다. 그래서 이들은 자신들이 스스로 새로운 먹잇감을, 혹은 새로운 정의구현을 하기로 마음먹는다. 이 시스템 안에서는 새로운 정의구현과 새로운 먹잇감은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 더 사악하게 굴 수 있어야 하지만 사악하게 굴 명분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래서 이들은 레나의 뒤를 쫓다가 ‘사이다’와 ‘정의구현’으로 구성되지 않은 구체적 세계를 맞닥뜨리게 된다. 레나의 분노와 결핍, 그녀가 받은 피해와 그녀가 가한 가해, 이미 죽어버린 레나라는 한 대학생의 총체가 준비도 없던 상태에서 느닷없이 이들을 후려친다. 마땅히 혼쭐이 나야 할 악인이었던 레나는 일면적이지 않은 구체적인 존재로서 뒤늦게 이들의 삶에 개입한다. 그 와중에 레나를 ‘인실좆’ 하려고 했던 인물들은 레나의 컴퓨터에 있는 수많은 인터넷 자아를 난도질 해 온 역사를 들여다보며 마땅히 느껴야 할 자기혐오 대신 레나에 대한 혐오를 표출한다. 인터넷으로 타자를 공격해서 무릎 꿇리는 행위는 바로 자신들이 하려고 했던 것임에도 이들은 레나에 조금도 동일시하지 않는다. 레나는 소셜 네트워크의 세계에서 돌아올 수 없는 낙인이 찍힌 ‘악인’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합니다

물론 조리돌림과 마녀사냥이 인터넷에서만 존재한 것은 결코 아니다. 엘리자베스 로프터스의 책 『우리 기억은 진짜 기억인가』에는 억울하게 아동 성폭력의 가해자로 몰려서 모든 삶이 무너진 아버지들이 등장한다. 언론을 비롯해 수많은 사람들이 이들에게 엄청난 비난을 퍼부었다. 비난을 퍼부었던 사람들은 자신들이 자신의 자녀에게 끔찍한 짓을 한 악인들을 처벌한다는 정의감이 있었을 것이다. 정의를 구현하는 것은 인간이 느낄 수 있는 쾌감 중 상당히 높은 수준의 도덕적 고양감을 제공한다. 그러나 조리돌림에는 타인을 돕고 자신을 희생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쾌감도 있다. 타인의 고통을 지켜보는 관음적 쾌감이다. 실컷 욕설을 해서 삶을 망가뜨린 후 #HasJustineLandedYet라는 해시태그를 만들어서 아직 저스틴이 도착하지 않았는지를 묻는 종류의 쾌감이다.


SNS는 여기에 한 가지 장점을 더 얹어주었다. 조리돌리는 자들의 책임을 극도로 약화시켜 준 것이다. 이들은 이제 물리적으로 돌을 던져서 상대에게 타격을 입힐 필요도 없고, 강제로 긴 모자를 씌우고 누군가를 거리로 끌고 나올 필요도 없다. 언제든 계정은 폭파시킬 수 있고 닉은 ‘세탁’할 수 있는 존재다.


한 쪽에서는 온라인 공간의 삶이 현실의 공간을 잠식해가고 다른 한 쪽에서는 온라인 공간이라는 특성을 통해 더욱 쉽게 몸을 숨긴다. 이 두 가지는 분리되지 않은 채로 여전히 진행 중이다. 어떤 책임도 질 필요 없이 편안하게 누군가의 삶이 몰락하는 과정을 지켜볼 수 있고 실제로 개인들은 그 결과에 부담스러운 책임을 질 필요도 없다. 지라고 그들에게 요구할 수 있는 사람조차도 없다.


소셜 네트워크 시스템이 돌아가는 가장 커다란 동력은 자신을 돋보이게 하고 동시에 타인들을 기쁘게 하고 싶은 욕구다. 그리고 지금 이 영화의 세상이 모니터 속에 존재한다. 사람들의 이런 욕망이 이 시스템을 구성했기도 하지만 이제는 이 시스템이 사람들의 욕망을 역으로 구성하고 있기도 하다.


무척 멋있는데 자꾸 쓰다보면 아무말 되는 단어들


지난 2016년, 힐스버러의 진실이 밝혀진 이후 힐스버러 스타디움에는 ‘진실과 정의’라는 글자에 불이 들어왔다. 그 두 단어는 사회적 인간으로 살아가는 모두에게 가장 본질적인 말이다. 윤리의 마지막에는 반드시 저 두 단어가 있어야만 한다. 그 두 단어를 향해서 많은 사람들이 치열하게 살아간다. 변함없이 조리돌림을 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가장 본질적인 단어이기 때문에 이 단어는 때로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하는 단어가 되기도 한다. 전두환이 만들었던 정당이 민주정의당이었던 것처럼.


이 영화가 나온 것은 2015년이다. 영화가 나올 때보다도 더욱 분명하게 지금 우리는 영화 속의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그러므로 정의를 추구하며 오늘도 누군가의 글에 좋아요를 누르고 악인들을 비난하는 글을 리트윗하는 우리는 반드시 물어야만 한다. 우리의 ‘정의로운’ 욕망은 어떻게 구성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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