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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이 못생겼다는 이유지만(잘 생겼다니까요)

by 이김정 Feb 22. 2025


나름 잘 나갔 학생 시절 이야기입니다.


고등학생때 개인 전용 비행기거드름을 피우며 등교하던 일이죠.

라고 했으면 좋겠지만.

시내버스로 끄적끄적 통학하니다.


"어이. 학생!! 안으로 들어갑시다. 같이 좀 타자고!!"


만원 버스에 콩나물시루처럼 타시절이라는 거죠. 그런 때였습니다.


그런때, 중년이상 되신 분들은 아마 아실 것 같은데요.

당시 버스를 탈 때는 회수권이라는 걸 사용했었죠.

그래요. 회수권입니다.


지금이야 "삑!삑" 하고, 교통카드를 쓰지만, 그때는 종이로 된 중고생용 회수권을 요금통에 넣었었죠.

우리들끼리는 떡볶이하고, 군만두 사먹을때 보탤려고, 넣는 척 도로 뺐다는 일생일대의 무용담이 전해지기는 하는데.

결단코  무관합니다. 음, 네.


그러던 어느날 아침이었습니다.

그날도 정류장에서 학교 가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

근데 정신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혼미했고요.

밤샘 독서실 공부를 하느라 그런 거냐고요.

아니요.

그럴 리가요.

저희 집에서 멀쩡히 잘 잤습니다.

뭘까요.


조금이라도 더 잘려고 버티다 버티다 대충 눈꼽만 떼고 "지각이다! 큰일났다!", 후다닥 뛰쳐나왔던 겁니다.

정신이 있었겠습니까.

아직 꿈나라죠.

신발도 대충 꿰차고, 머리는 수세미고,  와중에 손에 들고 나온 게 장바구니라도 할 말이 없을 정도입니다.


교는 버스로 대여섯 정거장 거리 정도.

짧다면 짧은 거리입니다.

까짓것 뛰어갈까 지만, 바로 포기합니다.

아침땐 5분, 10분이 중요하니까요.

버스 하나를 놓치면 빠듯해지고, 두번 놓치면 정류장에서 열라 뛰어가도 교문까지 아슬아슬 하죠.

교문 앞에는 문제의 체육쌤이 기다리고 있고요.


"요녀석들. 쯧쯧. 하여간 지각하는 놈들이  지각을 해요. 상습범이지. 넌 엎어지면 집이 코 앞인데."


게다가 지각을  아이들은 교내를 돌며 휴지를 주어야 합니다.

휴지를 줍느나 교내를 돌다가 남녀공학이라 마음에  둔 여학생들 보기라도 하면 꼴이 말이 아닙니다.


"2학년 2반 이김정. 지각했구나. 그렇게 안봤는데." 하고요.


러니 지각은 절대 안됩니다.


아침 정류장에서 정신을 차리고, 눈을 부릅뜨고 버스를 기다립니다.

정말 놓치면 안되는 거죠. 절대로.


이런 생각은 나만 하는 게 아닙니다.

주변을 둘러보면, 학생들이며, 출근하는 회사원들도 여념없습니다.

마치 초원에서 사냥감을 찾는 매의 눈처럼 눈에서 빛이 납니다.


빠지직.


물론 찾는 게 시내버스지만요.


마침 그때 낯익은 버스가  눈에도 들어옵니다


전속력으로 투다다다 달려갑니다.

제 앞의 사람들을 하나둘 제쳐나갑니다.

이럴 때 절대고수로 숨겨온 경공을 펼치는 겁니다.


"휘리릭. 휘리릭."


 그러냐고요. 경공을 펼치며 초스피드를 내냐고요.


앉아서 갈려고요. 


대여섯 정거장 가는데, 그것도 고등학생이 뭘 앉아서 가냐 하겠지만, 체력 비축입니다.

공부때문에요?

아니요.

점심시간에 농구할려고요.


이렇게 말하는 틈에, 방심으로 놓쳐버렸네요. 

벌써 문 앞에 사람들이 줄줄인 거죠. 

오늘은 날이 아닌가 봅니다. 입소문 맛집이라고 새벽 KTX로 달려갔더니 내부수리중이랍니다.


대신 줄 끝에 찰싹 습니다.

먹고살자면 입석이라도 타야하니까요.

찬밥 더운 밥 가리겠습니까.

지각은 하지말자.

기본은 지키고 가는 게 순리이니까요.


손지갑에서 회수권을 한장 꺼냅니다.

어서 탑시다. 타자고요.


그런데 그때였습니다.


"톡. 톡."

제 등 뒤를 누군가 치는 게 아닙니까.


누구지?

왜 그러시지?


난 새치기 안했는데.

아침부터 누가 잠자는 코털을 건드리...


아니.

여학생?


서구형의 이목구비에.

눈동자가 초롱초롱 반짝이고.

살포시 다문 입술.

발간 홍조의 .


심장이 벌컥벌컥합니다.


이쁘다는 얘기죠.


미인 db를 모아 AI에게 물어보면 나오는 답.

"AI야. 이 세상에 누가 제일 이쁘니."

리즈시절 소피마르소입니다.


(왠만하면 중간에 이미지 안넣는데 이건 참고사진을 넣네요.)


브런치 글 이미지 1


음성어도 넣겠습니다.


띠옹!


근데 문제가 있었어요.

저렇게 이쁜 여학생 제가 모른다는 거죠.

그러나 다른 일면으로 봐야죠.

이제부터 알아가면 되는 겁니다.

몰라도 알아야 하는 거고요.

이쁘니까요.

이쁘면 뭐든 가능하게 됩니다.


래서  예전부터 알던 사이처럼 방긋 웃어주었죠.


무슨 일이신가요. 우리 이쁜 소피...


채 말을 꺼내기도 전에, 그녀는 다짜고짜 뭔가를 제게 내밉니다.


이건?


뭐가 이렇게 급하신지.

단계를 밟아서 가시지.


근데. 아하.

이거 뭐겠습니까.


당연히 오겡끼데스까 아니겠습니까. 

지금은 돌아가신 나카야마 미호. 이와이슌지.

러브레터 라는 거죠.

오겡끼데스까.


 아니라.

사랑을 얻기위해 밤새워 준비한 선물이고요.


흐흐흐.


렇지않고서야 이렇게 이쁜 여학생이 갑자기 제게 뭔가 주겠습니까.

분명 저를 몰래 훔쳐보며 흠모하고 있었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렇지 않을까요.

그렇지 않고서야 낯모르는 제게 선물, 아니면 러브레터를 줄까요.


큭큭.

오래 살고 볼 일이네요.


저는 손바닥을 내밀었습니다. 낼름.

그녀의 손에선 그 뭔가가 제 손에 톡 전해져왔고요.

전 잽싸게 잡았습니다.

느낌은 작은 종이입니다.

러브레터군요.


맞네요.

큭큭.

고개를 들었습니다.

여학생을 봅니다. 

없네요.

이미 쏜살같이 사라진 뒤였습니다.


나이가 어려서 부끄럽긴 하시겠지. 물론 저도 어리지만.

그렇지만.

통성명이라도 하고 가시지.

번호도 교환하시고. 참, 그때는 그런 게 없었겠네요.


괜찮습니다.

가 받은 에 그녀의 이름이나 그녀가 제게 남긴 메시지가 있을 거니까 상관없겠지요.


흐흐흐.

왜 이렇게 자꾸 웃음이 나올까요.

어제 무슨 좋은 꿈을 꾸었길래 이런 일이.


게다가 혹시 이런 건 또 아닐까요.

절 흠모하는 여학생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거죠.

한 트럭 정도.

동호회도 결성하고.

그치만 부끄러워서 말을 못하고 저를 몰래 훔쳐보기만 한다는 거죠.

근데 그 와중에 가장 이쁜 여학생이 대표가 되어.


"내가 너네들 대표로 고백을 하고 올게. 나만 믿어."


흐흐흐.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어떻게 해야죠.

행복한 고민일세.

아이, 행복해라.


흐흐흐.


"어이 학생. 버스 안타나." 

이 목소리는 운전 기사님이십니다. 

무뚝뚝, 사춘기 딸이 쾅 하고 들어간 방문을 바라보시는  황망한 표정이시네요.

"안탈려면 그 발좀 내려놓지. 아침부터 혼자 히죽히죽 웃고만 있지 말고."


보니 제가 앞문에 한발을 걸치고 있고.

그런 저때문에 버스는 가지도 못하고, 안의 사람들이 째려보고 네요.


"저 자식 뭐야. 이 동네 미친놈 아니야."


그런 것엔 아랑곳없이 전 얼른 버스에 홀라당 올라탑니다.

"조그만 들어가주세요. 아저씨."

"학생 여기 들어갈 데가 어디 있다고."

"거기, 여의도 광장만큼 넓은데요."

"그럼 내가 여기서 자전거라도 탈까."

"아저씨, 조금 들어가도 되겠구만, 학생 어여 들어와."


그렇게 어적어적 들어가서 손잡이를 잡고는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녀가 준 걸 잃어버릴 새라 꽉 쥐고 있던 손을 눈 앞에 올렸습니다.

버스는 다음 정거장을 향해 부르릉 출발하고요.


전 그녀가 준 러브레터를 드디어 확인했죠.

손을 펼쳤습니다.

손가락을 한개씩 폈죠.

이럴수록 감질맛나게.

쪼으는 맛이 있어야.


흐흐흐.


그랬더니.


모습을 드러 것은.

그것은.

바로.


러브레터냐. 선물이냐.

치맥이냐 피맥이냐.

바다냐 계곡이냐.

라면이냐 자장면이냐.

(잠깐 광고 보고...죄송.)


과연.

모습을 드러낸 것은.


회수권.


엥.


이건 뭐시다냐.


손바닥에 회수권이 달랑 한장 멀끔히 저를 쳐다보고 있네요.

그러니까.

그녀가 제게 준 것은 회수권 한장이었다는 죠.


?

어째서.

무엇때문에.


회수권이라니요.


나 이런 정말.


이게 뭡니까. 대체.


요새는 회수권에 러브레터를 적어서 보내는 게 유행인가요.


그날 저는 그녀가 준 회수권을 똘히 바라봤습니다.

혹시 몰라 회수권 여기저기를 살펴보고요.

정말 유행이라서 어딘가 제게 사랑의 메시지를 적어보냈나 싶어서요.

그러나 그런 건 없었습니다.

사실 그 작은 종이 회수권에 뭘 쓸 여백은 손톱만큼도 없었죠.

뭘 썼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하고요.

세상에 널린 게 종이인데 굳이 회수권에.


그렇다면 뭐죠.


머리를 싸매고 고민했습니다.

회수권의 의미에 대해서.

그럼 선물인가.


선물로 회수권을 주기도 하나요.

쫌 아닌 것 같은데.

선물이라기에는 액수가.


한참 생각했어요.

화장실에 갈때도.


옆에서 쉬하던 녀석이 저를 보더니.

"이김정 무슨 고민있어. 고민이 많아보여. 나랑 교회 다닐래. 주께서...선물을 주실거야."

살짝 사이비 다니는 녀석입니다.

"돈 많이 주신대. 너희 주께서."

"선물은 그런 더러운 세속이 아니야. 깨끗한 마음이지."


그래, 나 더럽다.

잠깐.

깨끗한 마음이라.


그렇습니다.

그래요.

와중에 사이비에게 알아냈네요.


그러니까, 그녀가 깨끗한 마음을 담아 선물로 준 것이라는 생각에 미칩니다.

왜냐면 그녀석 말대로 선물은 마음이니까요.

예를 들면 이런 마음이겠죠.


"버스 탈 때 내 생각하고 이 회수권 내렴. 사랑의 증표."

찡긋.


잠깐.

근데 전 그애를 모르는데요.

누군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생각하라는 걸까요.

그리고 회수권은 한번 사용하면 버스 기사님이 가져가시잖아요.

그럼 사랑의 증표가 저에게서 기사님에게 가는 건가요.

나 이런.

아니네요.


그럼 이건 어떨까요.


"앞으로 우리가 만나는 백일 때까지 회수권을 매일 공급해줄께."


아니 이건, 무슨 회수권 납품업자도 아니고, 좀 그렇죠.

그리고 다음날 여학생이 나타나지 않은 걸 보면 매일 주는 것은 아닌 거고요.

패스.


그럼 혹시 이거는  어떨지.


"난 실은 작년에 비 오는 날 이 정류장에서 차 사고로 죽은 여학생 귀신이야. 내 회수권이니까 니가 가져도 돼."


덜덜덜.

이건 너무 무서운데요.

진짜 패스.


그렇다면 대체 그녀가 제게 회수권을 준 의미는 무엇일까요.


아무리 생각해봐도 떠오르질 않네요.

(여러분도 한번 맞춰보세요. 뒤에 정답이 나오지만.)




할 수 없이 저는 잠복 수사에 들어갔습니다.

그래봐야, 그 정류장에 똑같이 등하교를 했다는 얘기이지만서두.


그리고 정류장에 그 여학생이 있는지 매일 두리번거렸죠.

직접 묻는 게 확실하니까요.


브런치 글 이미지 2


잠복 수사.


헌데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그녀는 보이지않았어.

일주일이 지나고 또 일주일이 지납니다.

역시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어요.

혹시 전학이라도 가셨나.

아니면 시한부라 어느 병실에 누워있다는.

그날 마지막 제게 고백을 하기 위해 온 거고요.


아아. 로맨틱한 스토리들이 더해집니다.


지금도 병실에서 마지막 잎새를 보고 있고요.

제가 나타나기만을 기다리는 것은 아닐까 하고요.

그래서 정류장에 다시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겁니다.

점점 죽음의 시간이 다가옵니다.

어떡해.


안 ~ 돼.


한편의 러시아 장편소설 분량이 됩니다.


시간이 또 흘렀습니다. 미스테리는 풀리지않고요.

그러니 정말 답답했습니다.

그 병실이 어디일지요.

아, 아.


그러던 어느날이에요.

그날따라 제가 늦장을 부리느라 조금 늦었거든요.

이번에 오는 버스를 안타면 바로 지각입니다.


드디어 저 멀리 버스가 다가오는 게 보였죠.


근데 그때였어요. 

정류장의 다른 버스로 달려가는 여학생 모습이 왠지 낯이 익지 뭡니까.

저애 많이 봤는데.

가끔 놀리던 초등학교 동창인가.


근데, 찰라.


저애 혹시.


뒤통수로 번개가 후려칩니다.


번쩍!


맞다.

그녀다!

그 여학생이다!


소름이 확 끼쳤습니다.


아니, 병원에서 언제 퇴원했대.


저는 쏜살같이 따라잡았습니다.

이건 무조건 잡는다.

얼마나 찾아헤맸는지 모르지.

이번이 마지막 기회일지도 몰라.

이번에 정말 못잡으면, 답답해 미치는 거지.


그리고 가까워지자 어떻게 할지 몰라 망설이다가 에라 모르겠다 하고, 그녀의 등을 쳤습니다.


너무 세게 쳤나.


하마터면 그녀가 뻑 넘어질뻔 했습니다.

정말 병원 갈 뻔했습니다.


"아야, 누구세요. 아침부터."


녀가 앙칼진 목소리로 도끼눈을 하고 뒤돌아봤습니다.

시한부 병실에 계셨던 건 아닌 것 같네요.


얼굴부터 확인합니다.

맞습니다. 그녀가.


그 여학생이 틀림없습니다.

이제야 찾았군요. 회수권을.

전 바로 물었습니다.


"회수권. 회수권 맞죠."


난데없이 회수권이라니.

이름을 알아야 부르든말든 할텐데. 저도 사정이 있으니 원.


근데 역시나 회수권의 표정이, 아참, 그녀죠.  

그녀의 표정에 변화가 감지됐습니다. 도끼눈도 사슴눈이 되고.

맞네요.  알아보는 겁니다.


그러자 전 확신을 갖고 이렇게 다시 묻습니다.


"대체 회수권이 무슨 의미냐고요. 머리에 쥐나서 미쳐버리는 줄 알았어요."

라고 물은 것은 아니고 그런 의미를 담은 표정을 지었죠.


그러자 여학생은 금세 무슨 뜻인지 눈치챕니다. 

잠시 머뭇거리고 양볼에 바람을 넣더니 숨을 푹 내쉽니다.


푸우.


할 말이 많으신가.

왜 저러시지.

그렇게 그애가 제게 술술 풀어놓은 얘기는 좀 긴데.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어느날 자신이 버스를 탔는데 지갑에 회수권이 없었다.


(왜? - 괄호 안은 제가 말한 겁니다)


다 사용한 것을 깜빡한 것이다. 마침 버스비를 낼만한 돈도 없었고. 나쁜 일은 한꺼번에 일어난다더니 그 짝이었다.


(나도 그런 경험 있다. 끄덕.)


그렇게 난감해할 즈음이다. 

뒤에 있던 친절한 남학생이 자기대신 회수권을 내주었다.


(그런 놈은 원래 사기꾼이다 나만 빼고.)


 남학생 아니었으면 정말 큰 망신을 당할 뻔 했다.

 뒤로 회수권을 갚으려고 남학생을 찾았던 것이다.

대체 그 친절한 남학생은 어디에 있지 하고.


(찾을 필요 없다니까, 사기꾼이라니까.)


헌데 한동안 찾지못하다가, 너를 발견한 거다.

처음에 남학생과 똑같이 보였다.

내가 그 남학생이 너무 만나고 싶어서 아마 귀신이 씌였나보다.


(귀신 맞네. - 이건 속마음.)


어쨌든 니가 그 남학생인 줄 알고 빌려준 회수권을 갚는데, 자세히 얼굴보니 아니더라. 


(내가 좀 더 낫지)


한마디로 너무 못생겼다.

그렇지만 이미 준 회수권을 돌려달랄 수도 없고, 순간 창피하기도 해서, 그냥 도망친 거다.

재수 옴 붙었다 하고.


(그렇게 된 사연이라니 애석하다, 나한테.)


그런데 이렇게 다시 만나다니 잘됐다. 그 회수권 다시 돌려주려고 온 거지. 다시 돌려주렴.

얼굴과 달리 마음은 착하네.


(더 애석해졌다)

(불쌍한 나.)




이것이 사건의 전말입니다.


허무하죠.

어떡합니까. 그렇다는데.

회수권은 돌려줬냐고요.

돌려줬습니다.


치사하지만 어떻게 하겠습니까. 달라는데.


그리고 그저는 버스를 놓쳐 고등학교 처음으로 지각을 하게 됐다는 거고요.

젠장.


어깨가 축 처져 지각까지 한 채 교문 앞에 도착했습니다.

마음에 비가 내렸습니다.

그동안 한 상상이 다 헛되고 헛된 것이었네요.


마음이 우울하고 허무하고, 비가 와서 홍수가 나니, 지각이고 뭐고 실은 잘 모르겠더라고요.


근데 지각을 했네요. 처음으로.


헌데요.

이상한 게 있었어요.

처음 지각을 해보니 이상한 풍경이 눈에 들어오는 거 아닌가요.


어떤 거냐 하면요.

지각한 학생들 교문 옆으로 쪼르르 서있었거든요.

생각보다 인원이 많더라고요.

근데 다들 지각 단골들인지 서로 친해보였다는 거예.

선생님까지도요.

그래 이쪽 바닥은 다 그런가 보지 뭐.

헌데.


"너 오늘 10분 지각이네. 왜 이렇게 일찍 왔어."

"다음부터 좀더 늦어볼께요. 선생님."

"빨리 휴지 주으러 가요. 선생님."


무슨 친목회도 아니고.

이건 뭐 교내 청소 자원봉사단 분위기였어요.

무늬만 지각이고요.

서로들 너무 친하다고 할까요.

설마 자기네들끼리 모이려고 일부러 지각하고 그런 건 아니겠죠.


상황이 이러니, 저만 그들 무리에서 조금 떨어져 뻘쭘히 서있게 되었어.

원숭이들 사이에 있는 화이트 오랑우탄 같다고나 할까.

파랑색 유니폼 입은 축구부에 혼자 빨강색 유니폼 입은 격이랄까요.


선생님 표정도 미심쩍고요.


이 자식, 못보던 놈인데, 여기 왜 끼여있지. 하고요.


대충 이런 느낌인 거죠.


아이들도.

영국 3대 명문 사립 스쿨에서 전학 온 학생 바라보듯 퉁명스럽습니다.

저 자식 뭐야. 왜 우리하고 있는 거야. 하고.


지각을 했는데, 제가 못올 데 온 느낌이랄까요.


참나.

저도 여기 오고싶어서 왔겠습니까.

이게 다 치사한 회수권 여학생때문인 거죠.

젠장할.


그때.

이런 좌중의 의문과 어색함을 풀려는 듯 어슬렁 체육쌤이 어깨가 축 처지고 우울한 표정의 제게 다가왔습니다.


"넌 왜 지각한 거냐? 표정은 또 왜 그래?"


  좌중의 시선이 일제히 제게 꽂혔어요.

그들은 제가 왜 지각을 했는지 정말 궁금한 겁니다.

비가 오고 있는 표정도 궁금하고요.


보면 모르나.

실연당했지. 아니, 회수권 뺏겼지.

못생겼다는 이유로.(원래 잘생겼는데)


그때 체육쌤의 얼굴이 훅 들어옵니다.


"뭐냐고. 왜 지각을 했냐고."

이를 바드득하며 험상궂게 말하네요.


아그그그. 깜딱이야.

사연들을 모르시니 이런 거겠죠.


그래서 대충 설명은 해야겠다 싶은데, 깜짝 놀라기도 하고, 좌중의 시선이 몰리니 긴장도 되고,

이렇게 우물거렸네.


"회수권이, 으 그러니까요, 돌려줘야 해서..."

저도 뭐라고 그러모르겠네요.


성질 급한 선생님은 참지 못하고 또 훅 들어오십니다.

"회수권이라고!!"

갑자기 버럭 소리치시네요.


아, 깜딱이야.

ktx를 삶아드셨나.


회수권에 혐오증이라도 있으신지.


왜 그러실까요?


선생님의 격앙에 아이들 눈도 초집중하고 있고요.


"너 이녀석!"

또 쌤께서 우당탕 소리치십니다.

원래 목소리가 크고, 조그만 일도 크게 만드시는 분이라 그러려니 합니다.

에고.

오늘 날 잡고 한마디 듣고 말아야겠습니다.

그애 말대로 나쁜 일이 생기면 한꺼번에 생긴다더니, 그짝이네요.


"너 이녀석 말이야!!"

잘못한 것 같은 분위기로 점점 몰아집니다.

영등포서 취조실 분위기네요.

으구구.

아이들은 더 웅성웅성대고요.


이런 식이며, 전 변호사 선임하고, 당분간 묵비권으로 갈테니, 하실테면 하시죠.

그러고 팔짱을 끼려는데.


"너 이녀석! 회수권이 없어서 걸어오는 바람에 지각을 했다는 거잖아!"


?

이건 무슨.

해석을.

뭐 이런 건강한 해석을.

통번역으로 하신대.


"이놈아! 뭐가 창피하다고. 괜찮아. 없이 살아도 기는 죽지말아라. 옛날에 나때는 말이야..."


잠깐만.

얘기가 이런 휴먼 스토리로 돌아가는 거라고.

이거. 이거. 또 이게 무슨.


그 뒤는 말해 뭣하겠습니까.

쌘님의 라떼는 말이야, 강원도 십리 산길을 보퉁이를 뒤에 매고, 어쩌고 저쩌고. 대충 그런 신파 스토리가 이어졌다는 거죠.


그리고 점심시간에 체육쌤이 절 교무실로 불렀고요.

뭔가 했더니, 제게 주셨습니다.


회수권 뭉테기를.


끄억.

(왜 다들 저한테 회수권을 주지 못해 안달이 난 거죠. 이것도 다시 돌려달라고 하신 않겠지요)


"이김정. 이걸로 다음부터 지각하지말고. 버스 타고 다녀. 임마. 힘내고!! 싸나이가 말이야."


선생님.

흑흑, 엉엉(속으로만.)


전 머리를 조아리고.

교무실 다른 선생님들은 무슨 영문인지 모른 채 쳐다보고.


아무튼 고마웠습니다.

선생님.


여기까진 스승의 날 기념 에세이이고요.

(이걸로 내년 스승의 날 공모 에세이라도 있으면 내려고 준비한 거고요.)



후일담입니다. 빠질 수 없죠.


회수권 뭉테기는 어떻게 됐을까요.

그걸로 버스 잘 타고요.

회수권 사라는 아무것도 모르시는 부모용돈은 따로 챙겨서,

우리가 또 누굽니까.

친구들이랑 맛있는 군만두 잘 사먹었습니다.

서비스로 떡볶기 한접시 받고요.

하하하.


냠냠냠.


감사합니다.

(회수권 소피 어쩌고 그 여학생은 잘먹고 잘 살고.)


여기까지 읽으신 분들께도 감사드립니다.


얼굴이 못생겨도(아니 잘생겼다니까요),

지각을 해도, 화이트 오랑우탄이 되어도,

회수권이 생겨 맛있는 군만두 먹었으니 괜찮은 거죠.


인생은 그렇게 좋은 일은 나쁜 일을, 나쁜 일은 좋은 일을 데리고 오는 거 아닐까요.

퉁 치면 다 거기서 거기라는 거죠.


오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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