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유학생의 스페인 생존기
첫 유럽 여행을 하고 많은 시간이 지났다. 그토록 원했던 스페인어과에 들어갔고, 군대도 다녀왔다. 군대를 다녀오니 2학년 2학기가 시작됐다. 군입대 전까지는 정말 즐거운 학교 생활이 이어졌다. 동아리 활동도 하고 연애도 해보고 좋아하는 축구와 야구도 보러 다니고... 힘든 입시를 보냈다는 보상 심리 때문인지 마음껏 놀았다. 무엇보다도 어차피 군대에 가야 하니 군대 갈 때까지는 즐기자는 마음이 컸다.
그런데 전역을 하고 보니 현실이 눈 앞에 펼쳐졌다. 한국 나이로 스물넷. 2학년 2학기가 시작되었고, 취업 준비는 무조건 일찍 시작해야 한다는 선배들의 말도 큰 압박으로 다가왔다.
취업 준비... 뭘 하지?'
졸업까지는 그래도 2년의 시간이 있었다. 재수를 했기 때문에 휴학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남들 다 하는 취업 준비는 해야 하는데 나는 일반 회사에 취직하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뚜렷한 꿈을 가진 것도 아닌 것이 문제였다. 하고 싶은 건 많았지만 구체적인 계획이 없었다. 졸업을 해서 취업을 하든 다른 길을 가든 '어차피 외국어와 유학 경험은 중요하니까 일단 지금은 여러 경험을 해보고 남은 2년 동안 뭔가를 찾아보자'는 생각으로 파견학생을 신청했다.
파견학생 선발 당시 면접을 진행하신 외국인 교수님께서 물어보셨다.
"학생은 어디로 파견학생을 가고 싶은가?"
"저는 스페인 마드리드에 가고 싶습니다."
교환학생이 아닌 파견학생 제도였기 때문에 나라와 도시는 내가 정할 수 있었다. 같은 과 선후배 중에는 중남미 국가로 가는 경우도 많았지만, 나는 다른 곳보다 5년 전에 갔던 스페인에 다시 가고 싶었다. 그렇게 5년 만에 다시 마드리드를 찾았다.
한 달 동안 뭐 하지?
마드리드에 도착한 느낌은 5년 전과는 확연히 달랐다. 나의 스페인어 실력도 꽤 늘었고, 이미 스페인에 간 선배들한테 들은 여러 정보를 통해 나름대로 준비하고 갔기 때문에 여유가 있었다. 앞으로 6개월 동안 어떤 재미있는 일이 펼쳐질지 기대가 됐다. 외국 대학교 생활, 스페인 축구 직관, 파티, 유럽 주변 국가 여행...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러나... 스페인에 도착한 뒤 셋째 날부터 몸이 아파서 끙끙 앓았다. 도착하자마자 묵은 민박집 난방이 되지 않아서 감기에 걸렸다. 그 와중에 시간을 헛되이 보내기는 싫어서 아픈 몸을 이끌고 앞으로 지낼 집을 보러 다녔다. 학교에서 가까우면서 괜찮은 집을 구하기란 쉽지 않았다. 민박집 체크아웃 날짜는 다가오고 조바심이 났다. 그렇다고 아무 집이나 계약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문제가 하나 있었다. 1월 말에 학기가 시작되는 줄 알고 1월 중순에 스페인에 도착했는데 2월 중순에나 다음 학기가 시작된 다는 것이었다. 아... 이건 계획에 없던 건데. 한 달 동안 뭐 하지?
그래도 다행인 건 먼저 스페인에 가 있던 선, 후배들이 있어서 초반에 도움을 많이 받았다. 민박집에서 나온 후 선배 집에서 지내면서 집을 구하러 다녔고, 다른 한국인 유학생을 만날 기회도 얻었다.
하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어!
한 번은 선배가 듣고 있는 대학교 수업에 같이 따라간 적이 있었다. 어차피 나도 대학 수업을 들어야 할 것이기 때문에 스페인 대학 수업은 어떤지 궁금하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내가 얼마나 알아들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수업에 들어갔다. '이만큼 공부했으면 뭐, 반 이상은 그래도 알아듣겠지?'
그런데 그 수업을 들으면서 큰 충격을 받았다. 수업 내용을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래도 스페인어 전공자로서 약 2년을 공부했기 때문에 나름의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지만, 대학교 수업은 역시 무리였다. 물론 스페인어 자체를 떠나서 수업 내용을 제대로 알지 못하니 이해하기 더 어려웠을 수도 있지만, 그런 차원이 아니었다. 마치 누군가가 나한테 '네 스페인어 실력은 고작 이 정도다'라고 알려주는 것 같았다. 이대로 가면 앞으로 나의 스페인 유학 생활은 정말 힘들어지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 날 충격을 받고 바로 마드리드 솔 광장 근처에 있는 어학원에 등록했다.
학원에서 반 배정 테스트를 받고, 운 좋게 이미 개강한 B2 반(중상급 수준)에 들어갔다. 우리 반에는 미국, 이탈리아, 브라질, 뉴질랜드 등 다양한 국적의 학생들이 있었다. 어학원 수업은 회화 위주로 진행됐다. 선생님은 '에스떼르 (Ester)'라는 이름의 여자분이셨는데 아주 활발하신 분이었다. 이 선생님한테서 정말 많이 배웠다. 스페인에 오면서 세운 가장 큰 목표는 '한국에서는 배울 수 없는 스페인어를 배우자'였는데, 에스떼르 선생님은 우리에게 스페인어 슬랭을 비롯한 실제 스페인 사람들이 사용하는 표현을 위주로 가르쳐 주셨다. 물론 대학 전공 수업을 듣기 위한 문법이나 어휘들은 내가 따로 공부를 해야 했지만, 유학이라는 게 학교 공부만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살아 있는 스페인어'를 배우고 싶었던 나에게는 아주 큰 도움이 됐다. 나중에 학기가 시작되면서 이 학원에는 더 이상 다니지 않았지만, 짧은 기간이었음에도 이때가 내 스페인어 실력이 아주 많이 향상된 시기였다.
그렇게 약 한 달 동안 학기가 시작되기를 기다리면서 어학원 공부뿐만 아니라 나의 큰 관심사인 축구 경기도 빼지 않고 봤다. 꿈에 그리던 레알 마드리드 VS 바르셀로나의 경기인 '엘 클라시코 (El Clásico)'를 드디어 직관했고, 집 주변 펍에 축구 경기도 보러 다니곤 했다. 아직 학교에 다니지도 않고, 스페인 친구도 없었지만, 스페인에서 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시간이었다. 그렇게 스페인 유학의 첫 한 달은 힘든 점도 있었지만 서서히 적응해나가는 기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