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레트로 감성 듬뿍, 스페인 시골 마을의 간판들

스페인 친촌에서

by 이베리코 Mar 29. 2025
아래로

나는 스페인의 진짜 매력은 시골에 있다고 생각한다. 스페인 시골은 도시의 세련됨 대신 거칠고 솔직한 매력을 보여준다. 오랫동안 방치되어 곳곳에 벗겨진 건물들, 도배를 한 게 언제인지 가늠조차 안될 정도로 얼룩덜룩한 벽들은 '중세 시대 풍경'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채 대충 널브러져 있는 공사 현장은 스페인 사람들의 느긋한 성격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런 투박함 속에서 풍겨 나오는 순박한 인심은 거칠지만 따뜻한 매력을 느끼게 해 준다. '날씨 금수저' 나라답게 날씨는 끝내주게 좋아, 허름함마저 여유롭고 낭만적으로 보이는데 한 몫한다.


작년 7월 무더운 여름날, 아내와 함께 마드리드 근처의 '친촌(Chinchón)이라는 작은 마을에 다녀왔다. 이 마을은 스페인 전통 모습과 문화를 잘 보존하고 있어, 스페인 정부로부터 역사예술지구(Conjunto histórico-artístico)로 선정된 곳이다. 스페인 3대 화가 중 한 명인 프란시스코 고야가 잠시 머물며 작품을 남긴 곳이기도 하다.


친촌의 정중앙에 자리 잡고 있는 마요르 광장(Plaza Mayor)이 마을의 전부이다. 이 광장은 15세기부터 현재까지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작은 마을에 어울리지 않게 광장이 굉장히 크다. 무대와 같은 광장을 중심으로 오래된 집들이 둘러싸여 있는 풍경은 마치 영화 세트장 같이 보였다. 마을의 또 다른 주연 배우인 발코니도 아주 앤틱 해 보인다. 동그란 광장을 따라 층층이 늘어선 작은 발코니들은 마치 VIP 관객석 같았다. 과거 이 광장에서 투우와 축제가 열렸고, 지금도 여전히 친촌의 핫플레이스다.

사실상 친촌 볼거리의 전부, 마요르 광장(Plaza Mayor)

천천히 광장을 둘러보다 보니, 상점과 식당의 간판들이 내 눈길을 끌었다. 유려한 스페인어 필체가 멋지긴 한데, 어딘가 2% 부족해 보였다. 삐뚤빼뚤한 손글씨에 삐딱하게 걸린 간판들, 가독성 보다 예술성에 올인한 듯한 디자인들이 재미있었다. 무질서하게 만들어진 작은 골목길들이 개성 넘치는 간판들과 만나 힙한 풍경을 보여주었다.


한국에서는 간판 하면 흔히 떠오르는 특유의 이미지가 있다. 밝은 LED 조명, 네모 박스 안에 가독성을 높이기 위해 컴퓨터 폰트로 작성된 딱딱한 단어들이 그런 것이다. 효율적이긴 하지만 낭만과는 거리가 멀다. 요즘 레트로가 대세라고 하던데, 친촌의 클래식한 간판들은 '힙(hip)'함을 넘어 세월의 '딥(deep)'함을 자랑하고 있었다.


아래 사진의 Restaurante La Balconada라는 식당은 벽과 나무 서까래에 각각 다른 디자인으로 2개의 간판이 걸려있다. 그것도 부족했는지 벽에도 식당 이름을 크게 적어놓았다. 아마도 세월이 지나면서 예전 간판을 떼지 않고 새로운 간판을 여기저기 추가로 거는 것 같다. 식당 주인은 오래된 간판들을 통해 식당의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고 싶은 것 같다.

아래 사진의 Fuentearriba라는 식당의 간판은 가독성이 매우 떨어진다. 간판 속 식당 이름 뒤에 꼭 분수대 그림을 그렸어야 했나 싶다. 분수대 색깔과 폰트 색깔이 거의 같아 식당 이름이 잘 보이지 않는다. 왜 저렇게 했을까 생각하다가, 아마도 오래전에 손으로 만든 간판이라 포토샵, ppt처럼 배경을 흐리게 할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라고 생각했다.

아래 간판들은 한 가게에서 여러 개의 간판을 쭉 걸어 놓은 형태이다. 낡은 나무 기둥 위에 선명한 글씨로 쓰인 간판들이 여러 개 걸려 있는 것이 신기해 보였다. 우리나라는 보통 가게 하나당 간판이 한 개만 걸려있다. 이쯤 되면 친촌 마을 가게 사장님들은 간판을 가게 홍보용으로 거는 것이 아니라 간판을 수집하는 취미가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마을 언덕 위에서 작고 귀여운 친촌 마을을 내려보았다. 처음에는 다소 초라해 보였던 풍경이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더 정겹게 느껴졌다. 대도시처럼 화려하지 않아도, 구석구석 오래 보아야 아름다운 마을이었다. 진짜 스페인의 풍경이 궁금하다면 친촌에 한번쯤 방문해 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될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왕좌의 게임'이 선택한 스페인 중세시대의 성

브런치 로그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