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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회자정리 Feb 08. 2023

기획자가 되고 싶었다.

기억의 편린

 대학 졸업을 앞두고, 내가 하고 싶은 것보다는 오로지 취업이 목표가 되는 것이 보통이다. 회사에서 무슨 일을 하게 될지? 맡은 직무가 나에게 맞는지, 또 해낼 수 있을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또, 마땅히 사전에 알 수 있는 방법도 없다. 보고 듣고 자란 삶의 배경에 몇몇 아르바이트 경험. 그리고 학교에서 배운 전공을 살리느냐 혹은 어디든 취업만 목표를 두느냐의 선택이었던 것 같다. 


 내 전공은 수학. 의외의 학문이긴 하지만 시작은 괜찮았다. 그러나 대학교의 수학과의 수학은 계산이 아니라 논리적 증명에 훨씬 더 가깝다. 쉽게 설명하면 숫자, 기호, 정의, 정리를 가지고 증명이라는 형태의 수리적 글짓기를 하는 느낌이랄까? 


 어쨌든, 수학은 말 그대로 전공이었고, 부전공이었던 경영학에 훨씬 더 관심이 많았다. 열심히 했고, 당시는 각종 디지털 산업의 태동기 즈음이라 전통적인 경영, 마케팅의 영역에 IT라는 산업적 융화가 서서히 꿈틀거리던 때였다. 



 사실, 경영학을 부전공으로 선택했던 가장 큰 이유는 취업 때문이었다. 그때는 이과생들이 경영, 경제학 등을 부전공으로 많이 했고, 경영학 부전공을 방패 삼아 이력서를 두루두루 걸쳐 제출하던 시절이었다.


 이미 능력치 한계를 넘어선 수학보다는 경영학이 더 재미있었다. 실제 전공이 아니고 부전공이니 깊이가 적어 더 그랬는지도 모르겠지만, 재미있고 관심이 가다 보니 더 열심히 했다. 하지만, 경영학 관련 수업을 듣다 보면 힘든 점이 있었다. 


 경영학 수업을 수강하는 것도 경쟁이 심했고, 운 좋게 듣고 싶은 수업을 수강하더라도 팀과제를 위한 팀을 짜기가 쉽지 않았다. 경영학과 학부생 입장에서는 타 복수전공자나 부전공자를 기피하기 마련이었다. 객관적으로 그들의 전력은 확인되지 않았고, 신뢰할 수 없었으니 당연했다. 


 깍두기 취급을 받으며 경영학 전공자 몇 명과 팀플을 하게 되는 경우도 있었고,  반대로 경영학과 전공자가 전혀 없는 인력만으로 팀을 짜기도 했었다. 어쨌든 경영학과 전공자가 팀에 있건 없건 간에 PPT 발표 문서만큼은 내가 작성했다. 과 내에 템플릿이 잠깐 돌기도 했고, 심지어 한 교수가 제출한 PPT 문서를 보면서 강의 시간에 이런 말을 했었다. 


'O조? 이 PPT 만든 사람이 누구야?'

주변에 같이 앉아 있던 팀원들이 날 쳐다봤다. 뭔가 잘 못 된 건가라는 표정으로 내가 손을 들었다. 그때 교수가 말하길, 


 누나나 형이 에이전시*라도 다니나?

 



 실제로는? 형과 누나가 있지만 에이전시를 다니지는 않았다. 지금 돌아보면 색감을 너무 많이 썼던 문서로 다시 만들라면 절대 그렇게 만들지 않겠지만 대학생 수준에서는 어깨를 으쓱하게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회사에 입사하여 수많은 제안, 전략, 기획서 등을 썼다. 어떤 단어가 붙느냐에 따라 결이 달라지지만 어쨌든 주장을 담고 누군가를 설득하는 과정의 하나였다. 


 PPT를 만들 때, 텍스트와 도형 그리고 색으로 표현하는 나의 언어와 주장이 좋았다. 기획에 대한 의미가 명확 치는 않았지만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 그런 일들이 하고 싶었다. 기획의 정의가 사람마다 조금씩은 다를지언정 결국 무언가를 이루기 위한 밑그림 정도가 아닐까? 실제 국어사전에 기획이란, '일을 꾀하여 계획함'이라고 아주 간단명료하게 설명하고 있다.


 어느 정도 연차가 쌓이고 신입사원이 들어오면 관련 부서의 업무 브리핑을 해야 할 때가 종종 있었다. 매번 소속되어 있던 팀은 대부분 기획팀이었으니 여러 가지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뉴비들에게 늘 묻던 질문이 있었다. 바로, '본인들이 생각하시는 기획은 무엇인가요?'

 

뜬구름 [출처: pixabay.com]


 내 질문에 대한 답들은 비슷하면서도 다양했고, 다 맞는 말이었다. 명확한 정답은 없으니까. 그리고 내가 그들에 들려준 대답은, 생각은 이랬다. '뜬 구름의 형상화'. 기획이란 분야를 막론하고 아직 구체화되지 않는 그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 과정이라 생각했었다. 지금도 본질적으로는 보이지 않는 사용자의 니즈를 형상화한다는 측면에서는 크게 변함이 없으리라.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새로운 것을 담아내고, 만들어 내는 것에 가장 흥미를 느낀다. 그렇게 나는 기획이 하고 싶었고, 기획자가 되고 싶었다.




 기획자란 애매함과 전전후의 사이라는 매거진은 기획을 잘하는 방법이나 노하우에 대한 글이 아니다. 기획자로 살아온 기억의 편린을 몇 개 꺼내 볼 요량이다. 일종의 나이 든 기획자의 일과 인생에 대한 넋두리랄까? 



* 에이전시(agency) - IT 업계에서 마케팅이나 SI 구축을 위한 대행사를 통칭해 에이전시라 부른다. 프로젝트 제안을 따기 위해 제안서를 제출하는데 에이전시에서 제안을 많이 제출하다 보니 문서를 보통 예쁘고 구조적으로 잘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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