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아티스트 IP] 예술의 오마카세: 거장을 한 입 크기로
중세 시대 예술은 벽에 있었습니다. 교회 천장화, 궁전 벽화. 예술은 부동산이었고, 교회와 왕족의 소유물이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그 건물에 들어가야만 예술을 볼 수 있었죠.
르네상스가 캔버스를 발명했습니다. 벽에서 떼어낼 수 있는 그림. 예술이 동산이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이제 그림을 사고 팔 수 있게 됐습니다. 19세기가 되자 액자의 규격이 생겼습니다. 10호, 20호, 100호. 시장이 형성됐고, 화랑이 생겼고, 부르주아가 집에 그림을 걸었습니다.
고흐와 고갱이 야외로 나간 것도 이 맥락입니다. 벽화는 건물 안에 갇혀 있지만, 캔버스는 들고 나갈 수 있었습니다. 들판에서 해바라기를 그리고, 항구에서 배를 그렸습니다. 예술이 움직이기 시작한 겁니다.
20세기는 더 나아갔습니다. 엽서, 포스터, 달력. 모나리자를 루브르에 가지 않아도 볼 수 있게 됐습니다. 세계 명화는 엽서로 가장 많이 인쇄됐습니다. 예술이 대중의 소비재가 된 순간입니다.
이제 21세기입니다. 예술은 어디로 가야 할까요? 답은 명확합니다. 15초 화면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루브르 박물관 모나리자 앞을 관찰해봅시다. 사람들이 그림 앞에서 머무는 시간은 평균 3초입니다. 그마저도 그림을 보는 게 아니라 인증샷을 찍습니다. 사진 찍고, 확인하고, 떠납니다.
인스타그램 릴스는 평균 15초입니다. 틱톡도 마찬가지입니다. 유튜브 쇼츠도 60초를 넘기지 않습니다. 이것이 현대인의 소비 상자입니다. 15초 안에 들어가지 않으면 소비되지 않습니다.
예술계는 이것을 저항해왔습니다. "예술은 깊이 감상해야 한다", "시간을 들여 사유해야 한다", "빠른 소비는 예술에 대한 모독이다." 하지만 현실은 냉정합니다. 대중은 3초만 머뭅니다.
메제웍스는 저항하지 않습니다. 적응합니다. 대중의 소비 상자가 15초라면, 예술도 15초 안에 들어가면 됩니다. 다만 그 15초를 100일간 반복하면, 결국 1,500초, 25분의 감상 시간이 확보됩니다. 한 번에 25분을 요구하지 말고, 15초씩 100번 나눠서 주는 겁니다.
예술이 꼭 캔버스에 있을 필요는 없습니다. 벽에서 캔버스로 이동했듯이, 이제 화면으로 이동하면 됩니다.
미술관의 딜레마는 명확합니다. "어렵다, 모르겠다, 멀다." 사람들은 작품 앞에 서지만 이해하지 못합니다. 설명문은 읽지 않습니다. 너무 길고, 어렵고, 지루하기 때문입니다.
오디오 가이드를 틀어봅니다. "이 작품은 1888년 아를에서 제작됐으며, 후기 인상주의의 특징인 강렬한 색채 대비와..." 2분 듣다가 끕니다. 지루합니다.
문제의 핵심은 이겁니다. 작품의 아우라는 현장에 있지만, 이해와 공감은 현장에서 일어나기 힘듭니다. Context가 없기 때문입니다. 고흐가 왜 귀를 잘랐는지, 그 그림을 그릴 때 무슨 생각을 했는지, 그게 내 삶과 무슨 관계인지. 이런 맥락 없이 그냥 그림만 봐서는 감동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유명한 작품 앞에서 사진만 찍습니다. 봤다는 인증만 남기고 떠납니다. 감상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메제웍스의 해법은 시간을 확장하는 것입니다. 미술관에 가기 전 100일, 다녀온 후 100일. 전후 200일간 그 작가와 함께 살면서, 작품을 조금씩 이해하고, 친구가 되고, 그러고 나서 현장에 가는 겁니다. 그때는 3초가 아니라 30분을 머뭅니다. 이미 아는 친구를 만나러 가는 거니까요.
1919년 독일 바이마르, 발터 그로피우스가 바우하우스를 세우며 선언했습니다. "예술가와 기술자의 구분을 없애라." 이곳에서 바실리 칸딘스키는 회화를 가르치지 않고 색채 문법을 연구했습니다. 파울 클레는 그림을 그리지 않고 형태의 문법을 체계화했습니다.
이들이 발견한 것은 예술이 마법이 아니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예술에는 문법이 있습니다. 노란색은 트럼펫 소리를 내고, 파란색은 첼로 소리를 냅니다. 수평선은 안정을 주고, 대각선은 긴장을 만듭니다. 이것은 작가의 천재적 직관이 아니라 학습 가능한 규칙입니다.
메제웍스는 현대판 바우하우스입니다. 작가의 직관을 데이터로 번역합니다. 고흐의 붓터치 패턴을 분석하고, 모네의 색채 배치를 수치화하고, 피카소의 형태 변형 규칙을 알고리즘으로 만듭니다.
이것은 예술을 모독하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예술을 민주화하는 것입니다. 천재만이 예술을 이해하는 게 아니라, 누구나 그 문법을 배우고 활용할 수 있게 만드는 겁니다.
바우하우스는 100년 전에 이것을 시도했지만, 당시 기술로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이제 우리에게는 AI가 있습니다. 수백만 개의 붓터치를 학습하고, 패턴을 추출하고, 재현할 수 있습니다.
1970년대 브롱크스, DJ들이 기존 음반에서 드럼 비트 4마디만 잘라냈습니다. 그 4마디를 반복하고, 위에 랩을 얹었습니다. 힙합의 탄생입니다.
이것은 도둑질이 아니었습니다. 샘플링(Sampling)이었습니다. 기존 예술의 특정 요소를 추출해서, 새로운 맥락에 배치하고, 전혀 다른 의미를 만들어내는 것. 예술의 창조는 무에서 유가 아니라 기존 요소의 재배치라는 사실을 증명한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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