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주 1장 지금 왜 세계관인가

1장 · 지금 왜 세계관인가 — 시대 인식과 IP의 등장

by 김동은WhtDrgon

디지털 전환 비용의 붕괴와 창작의 민주화

상상을 데이터로 실체화하는 데 드는 비용이 있다.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음악을 만들고, 영상을 편집하는 일은 오랫동안 고도의 기술적 숙련과 상당한 자본을 요구했다. 인쇄술이 등장하기 전, 책 한 권을 만드는 일은 필사자가 수개월을 소비해야 하는 작업이었다. 그 노동의 무게 때문에 필사본에는 장식이 가득했다. 만드는 것 자체가 너무 힘든 일이었으므로, 그 희소성에 걸맞은 공을 들이는 것이 당연했다. 총기 제작이 극도로 어렵던 시절, 총신에 용을 새기고 금박을 입힌 것도 같은 이유였다. 만드는 행위 자체의 무게가 곧 예술이 되었다.


산업화 이후 대량 생산과 매스미디어가 등장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만드는 비용이 낮아지자 장식은 줄었고, 생산의 효율이 곧 경쟁력이 되었다. 한국에서 매스미디어의 역사적 기점은 일제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조선총독부는 방송국 설립을 계획하여 총독부 체신국에서 1924년 11월부터 정기적인 시험 방송을 시작했다. 이것이 한국 최초의 라디오 방송이다.¹ 이 라디오 방송은 불특정 다수에게 동일한 콘텐츠를 동시에 전달하는 방식, 즉 브로드캐스팅의 시작이었다. 그전까지 정보는 필사된 문서로 물리적으로 전달되었다. 라디오와 이후 등장한 텔레비전은 그 전달 방식을 혁명적으로 바꾸었고, 이후 수십 년간 대중문화는 이 매스미디어 구조 위에서 작동했다.


¹ 정식 방송은 1927년 경성방송국(JODK) 개국으로 이어진다. 이후 텔레비전 방송은 1956년 HLKZ-TV의 개국으로 시작된다.


디지털 기술의 등장은 이 구조에 다시 한번 균열을 냈다. 처음에는 글이 디지털화되었고, 이어서 음악, 그림, 영상이 차례로 디지털 데이터가 되었다. 디지털 정보는 복제 비용이 거의 없다. 원본과 사본의 품질 차이가 없으며, 전송에 드는 비용도 사실상 0에 가깝다. 이 특성은 콘텐츠 산업의 구조를 근본적으로 뒤흔들었다. 음반을 제작하고 유통하는 데 드는 비용이 붕괴하자 음반사의 권력은 약해졌다. 영상 편집 장비가 소프트웨어로 대체되자, 방송국만이 가졌던 영상 제작 능력이 개인에게 이전되었다.


생성형 AI²의 등장은 이 흐름의 마지막이자 가장 급격한 단계이다. 이제 고도의 기술적 숙련 없이도 텍스트로 이미지를 만들고, 음악을 생성하고, 영상을 편집하고, 코드를 작성할 수 있다. 상상을 실체화하는 데 드는 디지털 전환 비용이 사실상 제로에 수렴하고 있다. 커피숍을 현실 공간에 차리는 데 드는 비용과, 그 커피숍을 디지털로 구현하는 데 드는 비용이 같았던 시절이 있었다. 그 등가성이 무너지고 있다. 그리스 올리브 농장을 배경으로 한 장면을 만들기 위해 비행기를 타고 날아갈 필요가 없어졌다.


² 생성형 AI(Generative AI): 텍스트, 이미지, 음악, 영상 등의 콘텐츠를 스스로 생성하는 인공지능. ChatGPT, 미드저니, 소라(Sora) 등이 대표적 사례이다. 사용자가 자연어로 요구사항을 입력하면 AI가 그에 맞는 결과물을 산출한다.


창작의 기술적 장벽이 낮아지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표현 기술을 갖춘 소수가 독점하던 창작의 권한이 아이디어와 관점을 가진 모든 사람에게 열린다. 창작의 핵심은 '어떻게 표현하는가'에서 '무엇을 설계하는가'로 이동한다. 이것이 창작의 민주화이다. 그리고 이 민주화가 세계관이라는 개념을 창작의 전면으로 끌어올린 첫 번째 조건이다.


[소결]

만드는 비용이 낮아질수록 창작의 핵심은 기술에서 설계로 이동한다.

디지털 전환 비용의 붕괴는 AI로 인해 사실상 완성 단계에 이르렀다.

누구나 표현할 수 있는 시대에 '무엇을 표현하는가'가 유일한 차별점이 된다.


콘텐츠 포화 — 하이퍼 어번던스와 알고리즘 문지기

만드는 비용이 낮아지면 생산량은 증가한다. 이것은 단순한 경제 원리이다. 그러나 현재 콘텐츠 생산의 증가 속도는 단순한 증가가 아니라 인간의 인지 한계를 기하급수적으로 초과하는 수준이다. 이를 하이퍼 어번던스³, 즉 극단적 풍요 상태라고 부른다.

³ 하이퍼 어번던스(Hyper-abundance): 공급이 수요를 압도적으로 초과하는 상태. 콘텐츠 맥락에서는 인간이 평생 소비해도 다 볼 수 없는 양의 콘텐츠가 실시간으로 생산되는 상황을 가리킨다.

동영상 플랫폼에는 매 분마다 수백 시간 분량의 영상이 업로드된다. 음악 스트리밍 서비스에는 매일 수만 곡이 추가된다. 웹소설 플랫폼에는 끊임없이 새로운 작품이 등록된다. 이 양은 한 인간이 평생을 소비해도 다 볼 수 없는 규모를 이미 오래전에 넘어섰다. '신작'이라는 시간적 프리미엄이 소멸한 것은 이 때문이다. 과거에는 새로 나온 것이라는 사실 자체가 주목받을 이유가 되었다. 지금은 그렇지 않다. 어느 플랫폼의 '신작' 코너를 열면, 새로운 항목이 올라오는 속도를 눈으로 쫓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이 환경에서 수용자는 능동적 탐색을 사실상 포기한다. 수백만 개의 콘텐츠 중에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직접 찾아나서는 행동은 너무 많은 에너지를 요구한다. 그 빈자리를 채우는 것이 알고리즘이다. 알고리즘은 사용자의 클릭 패턴, 시청 시간, 검색 기록, 체류 시간을 분석하여 취향 프로필을 구축하고, 그에 맞는 콘텐츠를 선별하여 배달한다. 알고리즘은 새로운 문지기이다.


과거의 문지기는 방송국 PD나 출판사 편집자였다. 이들은 자신의 심미적 판단과 시장 감각으로 어떤 작품이 대중에게 전달될지 결정했다. 알고리즘은 다르다. 알고리즘은 작품의 미학적 가치를 판단하지 않는다. 클릭되었는가, 얼마나 오래 보았는가, 공유되었는가. 소비자의 즉각적인 반응 데이터만이 알고리즘의 판단 기준이다. 이 구조에서 콘텐츠의 생존은 내재적 완성도보다 알고리즘이 선호하는 신호를 얼마나 강하게 발생시키는가에 달려 있다.


창작자에게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분명하다. 알고리즘이 식별하고 배달할 수 있는 명확한 정체성을 콘텐츠가 지녀야 한다. 모두에게 어느 정도 괜찮은 작품보다, 특정 취향을 가진 사람들에게 열광적인 반응을 일으키는 작품이 알고리즘 환경에서 훨씬 유리하다. 이것이 좁고 깊은 세계관 설계가 창작 전략으로 부상한 두 번째 이유이다.


[소결]

콘텐츠 공급이 인간의 인지 한계를 초과한 시대에 수용자는 알고리즘에 의존한다.

알고리즘은 미학이 아닌 반응 데이터로 콘텐츠를 판별하는 새로운 문지기이다.

살아남는 콘텐츠는 모두를 만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특정 집단에게 강한 신호를 보내는 것이다.


협송의 시대 — 취향 부족의 형성

방송(Broadcasting)은 불특정 다수에게 동일한 신호를 동시에 발신하는 방식이다. 협송(Narrowcasting)⁴은 그 반대이다. 알고리즘이 개별 사용자의 취향 데이터를 분석하여 그 사람만이 좋아할 콘텐츠를 정밀하게 조준해 배달하는 방식이다. 현재의 콘텐츠 유통 구조는 본질적으로 협송 체계이다.

⁴ 협송(Narrowcasting): 방송(Broadcasting)의 대어. 불특정 다수를 향한 일방적 송출이 아니라, 특정 취향과 관심사를 가진 집단을 정밀하게 겨냥하는 미디어 유통 방식. 알고리즘 기반 추천 시스템이 협송의 대표적 구현이다.

이 구조의 결과는 콘텐츠 소비의 극단적 개인화이다. 구독자 수백만 명을 가진 채널의 운영자를 그 사회의 구성원 대부분이 모르는 일이 벌어진다. 대한민국 인구 5천만 중 100만 명이 구독한다면 이론상 20명 중 1명은 알아야 할 것 같지만, 협송 구조에서 그 100만 명은 동일한 취향 프로필을 가진 사람들에게 집중적으로 노출된다. 나머지 인구에게는 그 채널이 존재하지 않는 것과 다름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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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메제웍스 CEO. 배니월드,BTS월드, 세계관제작자. '현명한NFT투자자' 저자. 본질은 환상문학-RPG-PC-모바일-쇼엔터-시네마틱-게임-문화를 바라보는 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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