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 메제웍스(meje.kr) 가 만든 콘텐츠는 지금 169개국에서 팔립니다. 기본은 39개 언어, 많을 때는 70개 언어로 옮겨집니다. 그렇게 매일 어딘가의 누군가는 우리가 한국어로 만든 캐릭터를 자기 모국어로 만나고 있습니다. 그 일을 우리가 책임집니다.
저희를 잠깐 소개하겠습니다. MEJE Works Corp.는 2021년에 문을 열었습니다. 처음에는 LG전자, LG생활건강, 그라비티 같은 회사의 IP 라이브러리를 함께 짓는 일을 했습니다. B2B라고 합니다.
그러다 2024년부터는 K-POP을 중심으로 하는 세계관 IP를 직접 만들기 시작했고, 그 IP를 기반으로 한 캐릭터와 "팬덤 액티비티"라고 명명한 데일리 콘텐츠의 제작 사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 일을 하다 보면 외국어와 만나지 않을 도리가 없습니다. 제가 한국어로 쓴 한 줄이 영어로 옮겨지고, 일본어로 옮겨지고, 스페인어로 옮겨지고, 인도네시아어로 옮겨집니다.
그 한 줄이 어떤 언어에서는 잘못 가닿을 수 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작은 어긋남이 169번 누적되면 캐릭터의 얼굴이 다르게 굳어 버립니다. 그래서 우리는 외국어를 그냥 "옮겨지는 것"으로 보지 않고, 고유한 별도의 키워드로 봅니다.
스푼과 수저는 다릅니다. 스푼은 양식 식기이고, 수저는 한식 식기입니다. 모양이 비슷해도 쓰임새가 다르고, 식탁 위에서 갖는 자리가 다르고, 손에 쥘 때의 감각이 다릅니다. 인쇄기와 프린터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쇄기라고 부르면 신문사 윤전기가 떠오르고, 프린터라고 부르면 책상 위 잉크젯이 떠오릅니다.
그렇다면 사과는요? 사과는 애플이 아닙니다. 그저 대응할 뿐입니다. 우리가 "사과 한 알"이라고 말할 때 떠오르는 빨갛고 단단하고 얇은 껍질의 그 과일은, 영어 "apple"의 그림과 완전히 일치하지 않습니다. 미국인이 "apple pie"를 말할 때 떠올리는 색과 향과 가족적 정서는, 한국인이 "사과파이"를 말할 때 떠올리는 그것과 다릅니다.
Pear를 한국어로 옮기면 "배"입니다. 사전이 그렇게 말합니다. 그런데 한국 사람이 알고 있는 그 시원하고 단맛이 강한 큼직한 배를, Pear는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영국식 정원의 Pear는 살짝 떫고, 사이즈는 우리 배보다 작고, 흔히 잼이나 디저트 재료로 들어갑니다.
Pear는 배만큼 맛있지 않습니다.
저희가 외국어를 다루는 자세는 이 한 문장으로 압축됩니다. 단어 하나하나는 자기만의 무게가 있고, 우리는 그 무게를 옮길 때 무게를 함께 옮겨야 한다.
이 자세는 좋지만 손이 많이 갑니다. 단어 하나하나의 무게를 다 살피려면 자료가 필요하고, 자료를 만들려면 사람이 붙어야 하고, 사람이 붙으면 시간이 듭니다.
저희가 처음 이 일을 시작했을 때 , 정확히는 저희 팀의 멤버들이 이런 작업을 시작했던 5년전 한 권의 책 또는 한 세트의 IP를 외국어로 정합하게 옮길 자료를 갖추는 데 6개월 이상이 걸렸습니다. 사람이 책을 한 줄 한 줄 읽고, 단어를 뽑고, 사전을 뒤지고, 시대를 조사하고, 문서를 직접 손으로 쓰던 시절입니다.
그게 줄었습니다. 한동안은 13주의 공정으로 진행했습니다. 작업 절차를 표준화하고, 분담을 정밀화하고, 도구를 일부 도입한 결과였습니다. 13주는 그래도 깁니다.
지금 우리의 표준은 2주입니다. 약식 공정을 쓰면 (정말 급하다면) 2시간 안에 끝낼 수 있습니다. 6개월에서 2시간이 됐다는 말에 놀라실 수도 있는데, 솔직히 말해 저희도 처음엔 놀랐습니다. 다만 이 단축이 사람을 빼고 기계만 돌렸기 때문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히 해 두고 싶습니다. 저희는 여전히 사람의 판단을 가장 앞에 두고 있고, 다만 그 판단이 닿아야 하는 자리를 정확히 분리해 둔 결과로 이 시간이 나왔습니다.
이 단축의 일부를 공개하려고 합니다. 그게 이 글의 목적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저희가 하는 일은 "번역"이라기보다 "세계관을 짓고 그 안의 키워드 의미를 정밀하게 다듬는 데이터 작업"입니다.
번역가는 이미 만들어진 텍스트를 다른 언어로 옮기는 사람입니다. 저희는 다릅니다. 저희는 텍스트를 옮기기 전에 그 텍스트가 살고 있는 세계 자체를 한 번 다시 짓습니다. 누가 누구이고, 무슨 사건이 어떤 순서로 벌어졌고, 그 시대 사람들은 점심을 몇 시에 먹었으며, "civility"라는 단어가 1813년 영국에서 정확히 어떤 무게였는가를 자료로 만듭니다. 그 자료가 있어야 비로소 번역이 정합해집니다.
우리는 이 자료 작업에 이름을 붙였습니다.
<서연각>(書筵閣).
서연(書筵)은 임금이 학자와 함께 책을 깊이 읽던 자리를 가리키는 옛말입니다. 각(閣)은 자료를 보관하는 누각입니다. 책을 함께 깊이 읽고, 거기서 얻은 것을 보관해 두는 작업 공간. 그것이 우리가 외국어 콘텐츠를 다루기 전에 들어서는 자리입니다. 본 작업(번역·각색·로컬라이즈)이 시작되기 전에 거치는 모든 사전 작업이 이 자리에서 이뤄집니다.
이 글은 그 <서연각>이라는 작업을 한 권의 책에 적용한 전 과정의 기록입니다.
이 글은 한 작품을 처음부터 끝까지 따라가며 <서연각>의 전 과정을 보여드릴 겁니다. 사례 작품으로 골라낸 것은 제인 오스틴의 Pride and Prejudice (1813)입니다. 우리말 제목으로는 흔히 오만과 편견입니다.
이 책은 Project Gutenberg(www.gutenberg.org)에서 무료로 다운로드 받으실 수 있습니다. 검색창에 "Pride and Prejudice"라고 치면 첫 결과로 나옵니다. PG 번호는 1342번입니다. 제 손 옆에 책 한 권을 펴 두시고 이 글을 읽으셔도 좋고, 그러지 않으셔도 글의 흐름은 따라오실 수 있습니다. 다만 펴 두면 한 줄 한 줄이 더 살아납니다.
같은 절차를 다른 작품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 멜빌의 모비 딕,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등등 작품마다 자료의 종류와 분량이 다르지만 골격은 같습니다. 다만 한 글에서 여러 작품을 동시에 다루면 어느 자료 하나도 제대로 보여드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한 권에 집중하기로 했습니다.
오만과 편견을 고른 이유는 세 가지입니다.
첫째, 한국 독자에게 충분히 친숙합니다. 둘째, 작품 안에 사회적 컨텍스트가 풍부합니다. 계급, 결혼 풍속, 시대 관습이 자료의 종류를 자연스럽게 끌어냅니다. 셋째, 자유간접화법(free indirect discourse)이라는 까다로운 서술 기법이 있습니다. 이 기법은 번역에서 가장 자주 어긋나는 자리이며, 그래서 번역 난이도의 표본으로 삼기에 적합합니다.
이 글은 매주 한 회씩, 모두 13회로 이어집니다. 큰 흐름은 이렇습니다.
1편 (1~3회)에서는 <서연각>의 자리와 골격을 잡습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하는지(이번 회), 그 일이 6단계로 어떻게 진행되는지(2회), 그 6단계 중 가장 손이 많이 가는 자료 작업이 30여 종으로 어떻게 분류되는지 (3회).
2편 (4~6회)에서는 오만과 편견 작업의 안쪽을 직접 들여다봅니다. 작업 폴더의 외형(4회), 그 안의 구간별 표와 사건 인덱스 한 꼭지(5회), 35종의 자료가 결정된 경로(6회).
3편 (7~9회)에서는 35종 자료를 한 종씩 펼쳐 봅니다. 모든 작품의 뼈대인 공통 자료와 소설용 자료(7회), 오만과 편견 시대인 리젠시의 백과와 모티프 자료(8회), 이 작품 고유의 보강 자료(9회).
4편 (10~12회)에서는 인물 노트와 폴더의 마지막 모습을 봅니다. 주인공 엘리자베스 베넷(10회), 조연 샬럿 루카스(11회), 단역 미세스 레이놀즈와 함께 분업의 기술과 부속 파일들(12회).
5편 (13회)에서는 자료의 무결성을 어떻게 보장하는가의 마지막 단계와 함께, 13회의 연재를 닫습니다.
13회를 함께 해 주신다면, 한 권의 책이 번역에 들어가기 전에 우리 사이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림을 차리는지를 끝까지 보시게 될 겁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를 더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 글은 자랑이 아닙니다. 우리가 가진 도구가 좋다거나 우리 절차가 우월하다는 식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보다는, 한 권의 책을 다른 언어의 독자에게 전할 때 우리가 어떤 자세로 책 앞에 앉는가에 대한 보고에 가깝습니다.
사과는 애플이 아닙니다. Pear는 배만큼 맛있지 않습니다. 이 사실을 매번 새로 인정하면서, 단어 하나하나를 다시 들여다보고, 그 무게를 자료로 옮겨 두는 일. 그 일이 <서연각>입니다.
다음 회에서는, 이 작업이 실제로 어떤 6단계로 진행되는지를 차근차근 보여드리겠습니다.
20260424 하얀용WhtDrgon. (주)메제웍스의 세계관 제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