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Olivia May 16. 2021

우리는 너무 쉽게 혐오를 말한다

나는 우리 모두가 어떤 것에 대한 혐오와 차별을 갖는다고 생각한다. 면죄부가 되는 것은 그것을 드러내느냐, 그것을 끊임없이 바로 잡으려 자각하고 고칠 의지가 있느냐의 차이다. 또한 ‘난 그 어떤 것에 대한 혐오도, 차별도 없는 합리적인 평화주의자다’라고 거만한 생각을 하는지 안 하는지의 차이다.


작은 범주이긴 하지만 하물며 우리는 민트 초코, 오이, 가지 등의 것을 혐오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는 분명한 표현의 자유다. 하지만 이런 작고 웃으며 넘기는 범주를 넘어선 굵직한 주제들에 대해서도 ‘표현의 자유’를 핑계로 너무 쉽게 혐오를 말하기도 한다. 가장 심각한 것은 본인이 가진 생각이 혐오라고 인지하지 못하는 무지다.


나는 스페인에 살면서 스페인 사람들에게 인종 차별을 당한 적 있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는 편이다. 나의 마이너리티 한 부분을 굳이 강조하고 싶지도 않고, 어차피 당해본 적 없는 이들이 진심 어린 공감을 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친한 친구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들이 나에게 직접적으로 경험을 물었거나 장면을 목격했을 때다.


내 이야기를 들은 후 이들의 반응은 똑같다. “다음에 또 그런 일이 있다면 나에게 꼭 말해줘. 난 너의 편이야” 혹은 “그런 바보 같은 사람들 너무 많지. 그래도 우리는 널 좋아해”라고 일괄적인 대답이 나온다.


이들이 나를 진심으로 위하고 걱정돼서 하는 말이란 것도, ‘적어도’ 이들이 나에겐 인종차별을 하지 않을 것이란 사실도 알고 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나에게 한정된 말이다. 그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내 친구’를 제외한 다른 인종에게, 다른 종교와 문화, 성별에게 차별과 혐오의 말을 건네고 있다.


친구들과 동네를 산책하던 중, 열 살 남짓 꼬마 아이가 지나가며 나를 유심히 보더니 이내 “니하오”라고 말한 후 도망쳤다. 어린아이였고 혼자 있었다면 참고 넘어갈 수 있었지만 친구들과 함께였기 때문에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이미 도망가버린 그 아이를 붙잡고 말할 순 없었지만, 그 소리를 들은 친구들에겐 내 입장을 확실히 밝혀야 했다. 나는 왜 동양인에게 무턱대고 “니하오”라고 하면 안 되는지, 저 아이가 특정 의도를 갖고 했다기보단 어떤 미디어나 타인의 행동을 보고 답습한 것이겠지만 그럼에도 저런 행동은 잘못된 것임을 명백히 밝혔다. 친구 A는 내가 이렇게 강하고 확신에 차 이야기하는 모습을 처음 본다고 했다. 친구 B는 “니하오”가 뭔지도 몰랐지만 자기는 절대 그럴 일이 없을 거라고 말했다.


하지만 고작 5분 후, 친구 B는 자신의 말에 책임지지 못했다. 같은 주제의 대화를 이어오던 중, 별안간 친구 B는 한국인과 중국인은 생긴 게 다르다고 했다. 그는 나에게 “내가 본 한국인은 너밖에 없지만 넌 중국인처럼 안 생겼잖아. 너 눈은 동그랗고 큰데 중국인들은 눈이 찢어졌어”라며 눈 찢는 제스처까지 취했다.


5 넘게 동양인을 특정 나라에 국한시켜 판단하는 것이  인종차별인 행위이고, 겉모습만 보고 스스로 결론을 짓는 것이 얼마나 위험하고 상대에 대한 존중 없는 태도인 것인지 설명한  앞에서 그는 너무도 당당하게 눈을 찢었다. 서양에서 대표적으로 동양인을 차별할 때 행하는 행동을  것도 충격이었지만,  친구 스스로  행위를 하며 차별임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는 것에  충격을 받았다.


이 친구를 포함해 몇몇 이들과 비슷한 주제에 대해 여러 번 대화를 나눴다. 그때마다 이 친구는 처음 듣는다는 반응을 보였다. “니하오라고 하면 왜 안되는 건데?”라는 질문을 정말 모르겠다는 표정을 하고, 이 주제가 나올 때마다 두 번, 세 번 되물었다. “너한테 무턱대고 라틴사람이라고 하는 거랑 똑같은 거야. 넌 스페인 사람인데 정체성을 부정하고 자기 마음대로 단정 짓는 거잖아. 너도 기분 나쁘잖아?” 다른 친구가 이렇게 말하자 그제야 그거 기분 나쁜 일이네, 하고 맞장구를 쳤다. 몇 달 뒤 이 친구와 같은 주제로 얘기를 나눴을 때, 그때는 그가 기억할 수 있을까.


특정 나라의 여행 이야기를 하던 중 나에게 음식이 어땠는지 물었다. 나는 입에 안 맞는 음식도 있었지만 대부분 맛있게 먹었다고 답했다. 친구 B는 나의 “입에 안 맞는 음식도 있었”까지 듣고 “그렇지? 난 정말 역겨웠어”라고 내 말을 가로챘다. 그는 그게 혐오의 표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나와 여행 이야기로 공감대를 형성한 것이라고 여겼다.


질문을 빙자한 혐오의 대상을 찾기도 한다. 대부분 본인과 다른, 본인이 살면서 절대 겪고 싶지 않은 일이다. 이를테면 “어느 나라에선 어떤 벌레를 먹는다”와 같은 이야기다. 단순히 텍스트의 나열이 아닌, 찌푸린 표정과 역겨움이 드러나는 말투를 동반한다. 하지만 이들은 그저 화두를 던졌다고 생각할 뿐이다.


특정 종교에 대해 직설적으로 “나쁘다”라고 한다. 아니라는 반박에 “난 그들을 존중해. 하지만...”이라며 존중이라는 베이스 아래 혐오를 드러낸다. 생각을 드러내는 것은 문제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점을 드러내는 방식엔 문제가 있기도 하다.


어학원을 다닐  가장 많이 하는 수업  하나는  나라의 스테레오 타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었다. 다양한 나라와 문화에서 모인 이들을 대상으로 언어 실력을 늘리기 최적의 주제인  같지만, 특정 나라에 대한 혐오감을 조장하기  좋은 주제이기도 하다. 그때 수업을 맡은 선생은 특정 나라 여성의 외모 수준이 매우 낮다는 것을  나라의 스테레오 타입으로 삼았다. 같은 유럽 대륙 출신의 다른 학생은 본인도 알고 있는 “이라고 공감했다. 나를 포함한 몇몇 학생이 이해하지 못하자 선생은 직접 핸드폰을 꺼내 검색창을 열었다. “못생긴 ㅇㅇ나라 여자라고 검색하자 수많은, 하지만 비슷한 이미지가 쏟아져 나왔고 모든 이들이 왠지 알겠다며 깔깔대고 웃었다. 전혀 웃기지 않았다.


이들이 나쁜 사람이라서 그런 것은 절대 아니라고 자신할 수 있다. 누구보다 착하고 배려심 넘친다. 하지만 그들은 모른다. 무심코 내뱉는 말들과 행동에 나와 다른 이들을 향한 혐오가 포함돼있다는 사실을.


나 역시 한국에 있을 때 무지에서 비롯한 혐오의 표현을 서슴없이 내뱉기도 했다. 다수에 섞여 있을 때, 소수가 되어보지 않았을 땐 그 어떤 소수의 입장도 이해하지 못한다. 무엇이 옳고 그른 일인지, 어떤 말과 행동을 하면 안 되는지, 당하는 사람이 어떤 기분인지는 알고 있지만 절대 그 기분과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렇기에 내 친구들은, 약자가 되어 보지 못한 많은 이들은 혐오를 쉽게 말하는 실수를 범하고 있다.




작가의 이전글 내가 흘려버린 꿈은 무엇일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