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븐일레븐의 추억 /
입사 후 첫 삼 년간은 야근을 밥 먹듯이 했다. 아침 여덟 시에 일을 시작해서 저녁 여덟 시에 집에 가면 그나마 양호한 날이었고 열 시, 열한 시 퇴근도 흔한 일이었다. 가끔 점심 먹고 사무실에 들어오는 길에 편의점 ‘세븐일레븐'의 간판을 보면 흠칫했다. 저것은 일곱 시에 출근해서 밤 열한 시에 집에 가는 우리네의 삶을 표현한 것인가. 그렇게 진탕 야근을 한 날이면 택시 타고 집에 오자마자 씻고 쓰러져 다음 날 가까스로 일어나 또 택시를 타고 부랴부랴 출근했다. 프로젝트 마감 기간에는 경영자에게 보고할 PPT를 만드느라 이박 삼 일 간, 하루에 딱 두 시간씩만 눈 붙이고 일한 적도 있다. 신혼 초에는 허즈번과 함께 갔던 제주도 여행길에 노트북을 챙겨가서 비행기 안에서 일한 적도 있다. 돌이켜보니 입사 첫 3년은 정말 회사일을 위해, 일 잘하는 회사원이 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며 살았던 것 같다.
/ 그렇게 할 수 있었던 동력 /
그렇게까지 회사일에 열정과 시간을 쏟을 수 있었던 동력은 무엇이었을까? 첫 번째 동력은 ‘인정'이었다. 지금 돌이켜보니 나는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컸다. 팀원이었을 때는 나의 담당 프로젝트 매니저에게 인정받고 싶었고, 내가 프로젝트 매니저가 되었을 때는 팀장과 부서장에게 그리고 나의 팀원들에게도 인정받고 싶은 욕심쟁이였다 사실 내가 했던 프로젝트 매니저 일은 업무와 시간 활용의 자율성이 꽤나 높은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야근을 했던 것은 프로젝트 매니저로서 더 좋은 결과를 만들고 인정받고 싶은 나의 욕심 때문이었다.
두 번째 동력은 ‘성장’이었다. 입사 후 일 년 반 정도는 프로젝트 팀의 팀원으로서 일했고 그 뒤 일 년 반은 프로젝트 매니저로 일했는데 늘 나의 실력이 부족해서 더 열심히 일하며 배워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다. 팀원일 때는 엑셀 수식도 잘 쓸 줄 모르고 수치 분석도 내게는 생소한 일이었기에 하나하나 배우며 일을 하니 시간이 오래 걸렸다. 프로젝트 매니저가 된 다음에는 더 많은 것을 배워야 했다. 각 의사소통 주체들 사이에서 보고하고 결정을 이끌어내야 할 이슈들을 일목 요연하게 정리해서 의사소통하는 일, 프로젝트 주요 내용을 최종 보고서로 정리하는 일, 팀원 관리 등. 모든 것이 처음이었고 시간이 걸렸고, 또 좌충우돌 매일같이 새로운 문제에 부딪혔는데, 이 과정을 일 년 반 동안 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 회사 일에 많은 시간을 쏟았지만 단지 회사만을 위해서 일한 것이 아니라 개인적으로도 많은 것을 배웠으므로 솔직히 말해서 후회는 없다.
/ 생각의 변화, 터닝포인트 /
그런데 이렇게 ‘회사원으로서의 나'가 전부인 줄 믿고 살던 나에게 직장생활 4년 차쯤 변화가 찾아왔다. 시간이 흐르면서 회사에서 경험하는 ‘성장과 인정'의 효용 곡선이 완만해지면서부터였다. ‘성장'은 내 시간을 전부 회사에 써도 아깝지 않게 해주는 동력이었지만 언제까지나 회사가 나를 성장시켜주는 것은 아니었다. 입사 초에는 워낙 할 줄 아는 게 없어서 회사 일만 따라가도 배우는 게 컸는데, 어느 시점부터는 자기 계발은 ‘자기가 알아서 해야 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인정' 또한 회사생활의 수많은 어려움을 견디게 해 준 동력이었지만 이제는 ‘누구에게 칭찬받는 인정'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나 자신에 대해서 ‘주체적인 삶을 살고 있다'라고 인정해줄 수 있느냐가 더 중요해졌다.
이런 생각의 변화를 겪는 과정이 쉽지만은 않았다. 입사 4년 차에 접어들었을 때 내가 속한 조직은 여러 가지 이유로 ‘혼란기'에 접어들었고 자연스럽게 내가 하는 일들도 그 혼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이리저리 흔들렸다. 나름대로 보람 있게 일했던 때도 있었는데 다시는 그렇게 일할 수 없는 건가라는 불안감이 들었고 어떨 때는 나를 둘러싼 주변 환경을 탓하다가 어떨 때는 내가 능력치가 작아서 그렇다고 나 자신을 탓했다. 퇴근 후에도 이런 걱정이 나를 떠나지 않았다. 이렇게 ‘회사일에 일희일비'하는 태도는 나에게도 도움이 안 됐고 회사일을 하는데도 도움이 안 됐다. 나 자신이 출구를 모르는 수렁에 빠진 것 같았고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다. 하지만 나는 계속해서 돌파구를 찾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던 와중에 터닝포인트를 만났다. 정말 의외의 통로를 통해. 그것은 한 권의 책이었다. 회사에서 도쿄에 출장을 가게 되어 이런저런 자료를 수집하던 차에 서점에서 우연히 ‘퇴사 준비생의 도쿄'라는 책을 발견했다. 이것은 퇴사에 관한 책인가 도쿄 여행에 관한 책인가 궁금해져서 책을 펼쳤는데 직장을 다니는 우리 모두는 ‘퇴사 준비생'이라는 개념을 접하고 나는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이 책에 의하면 회사에 들어오기 전에는 ‘입사 준비생'이지만 회사에 들어가는 순간부터는 모두 ‘퇴사 준비생'이란다. 여기까지는 ‘그렇지 그렇지 많은 신입사원들이 그렇게 열심히 취직 준비해놓고 바로 퇴사준비를 하지’하고 읽었다. 그런데 핵심은 그게 아니었다. 신입사원 때 자의로 그만두던 평생 다니고 ‘정년퇴직'을 하던 모두 같은 ‘퇴사 준비생'이라는 것이다. 심지어 ‘전문 경영인'도 퇴사 준비생이다(오너는 아니니까). 이 회사는 ‘내 것'이 아니고 나는 언젠가는 나갈 수밖에 없다. 다만 언제 나가느냐의 차이, 얼마나 잘 준비해서 나갔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인 것이다.
베이비붐 세대까지는 평생직장이 있다고 믿었고 실제로 그런 삶을 직접 실천하고 회사에 한 획을 그으신 분들도 많다. 하지만 우리 밀레니얼 세대에게는 평생직장은 없어졌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사회에서 살아가기 위해 ‘나만의 경쟁력'을 갖추는 것이 중요해졌다. 이것은 부정할 수 없는 시대적인 흐름이다. 그런데 나는 그동안 내가 ‘퇴사 준비생'이라는 불편한 진실을 보려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당장 퇴사하겠다는 이야기는 절대 아니다. 이 책은 ‘준비되지 않은 퇴사'를 장려하지 않는다. 이 책이 나에게 말해준 것은 ‘내 인생은 내가 주체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회사에서 인정받으면 내 인생이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안일함’을 넘어 ‘내 인생에 대한 무책임'이라는 것을 이 책이 알려줬다. 돌아보니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지'에 대해 스스로 고민하는 습관도 용기도 없었다. 그저 조직 순응적인 모범생이었다. 학교 다닐 때도 그랬고 회사 다녔을 때도 그랬다. 인정만 받으면 내 인생도 어디 좋은데로 흘러가겠거니. 이제는 그러면 안될 것 같다. 회사에서의 인정보다 지속적인 ‘나의 성장'이 더욱 중요하다는 사실을 스물아홉 살에 알게 됐다.
/ 하루아침에 되지 않는 모드 전환, 잠시 멈춤(PAUSE)이 필요했다 /
알게 된 것은 알게 된 것이고, 실천은 별개이다. 인생의 큰 진리를 깨달은 것 같았지만 내 생활에 당장 눈에 띄게 변한 것은 없었다. 다음 날 여전히 출근을 했고 여전히 회사와 회사일이 나의 하루를 꽉 채웠다. 나는 여전히 흔들리고 있었다. 모드 전환이라는 것이 하루아침에 되지 않는다. 마음만 바꾼다고 되는 것도 아닌 것 같았다. 그래 회사가 내 인생 책임져주지 않지. 그래서 이제부터 무엇을 시작할건데?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 다음 단계가 되었다. 일단 꼭 먹고사는 데 필요한 기술, 스펙을 떠나서 회사 밖의 나의 관심사, 취미를 갖고 싶었다. 몇 달 전 꽃다발을 사면서 직접 꽃의 종류와 색깔을 고르며 내가 직접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 기억 나서 ‘플라워 디자인 주말반'을 등록했다. 주말에는 먹고, 쇼핑하고, 그냥 쉬는 것에 익숙한 터라 무언가를 배우니 몸은 정말 피곤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꽃을 배운 후 월요일에 출근하는 것이 정신적으로는 덜 힘들게 느껴졌다. ‘꽃을 만지는 나'의 존재가 ‘회사를 가는 나'에게 힘을 주고 위로를 주는, 조금 신기한 감정을 느꼈다.
또 무엇을 해야 할까? 이런 고민을 하는 나에게 ‘잠시 멈출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그것은 바로 허즈번의 영국 석사로 인해 얻게 된 ‘휴직의 기회'였다. 프롤로그 글에 소개했던 것처럼 고민 끝에 휴직을 하게 되었다. 나는 지난 5년간 회사에만 열중하느라 ‘지속적으로 나 자신을 성장시키는 습관'을 만들지 못했다. 몸도 마음도 지쳐있는 내가 하루아침에 내 인생에 대한 주체적인 태도와 자기 성장 습관을 갖기는 어려웠다. 잠시 일을 내려놓고, 영국 중북부 도시 ‘리즈'라는 낯설고 낯선 도시에 나를 갖다 놓으면 그곳에서는 새롭게 나를 빚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영국에 와 있는 지금 이 시간, 행복하고 감사하다.
이 시간이 끝나고 다시 회사로 돌아갔을 때는 좀 더 쿨-한 마음으로 회사를 다니고 싶다.
“회사에서는 일 열심히 하고 일한 만큼 성과 내고 월급 받고 살아요. 성장이요? 그건 퇴근하고, 주말에 제가 직접 해요. 제 행복은 제가 만듭니다. 저는 제 삶에 만족해요”
이렇게 멋지게 말하고 싶다.
지난 20대를 돌아보면 많은 파도를 만났고 부딪히며 숱하게 깨졌다.
올해 나는 서른이 되었다.
30대에는 새로운 파도를 만나도 휩쓸리기보다는,
그 파도를 올라타 서핑을 하는 '내공과 여유'가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