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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승환 Jan 26. 2017

사회적 환상과 알레고리 산문시

―보들레르와 랭보, 김성규와 김중일의 시

시의 위기와 산문시     


샤를 보들레르가 현대시의 역사에서 『파리의 우울』(1869)을 통해 드러낸 것은 ‘대도시의 일상을 담아낼 수 없는 시의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라는 문제의식이다. 보들레르는 19세기의 수도, 파리에서 발생하는 복잡하고 기이한 대도시의 삶과 대중사회의 군중 심리를 포착하기 어려운 전통적 형식의 4연 14행으로 구성된 소네트(Sonnet) 대신 규칙적인 리듬과 각운으로부터 해방된 산문시로 창작함으로써 시의 위기를 돌파하고자 하였다. 1866년 1월 생트-뵈브에게 보낸 편지에서 보들레르가 도시 산책에서 마주친 모든 사건들로부터 “어떤 불쾌한 모랄(une morale désagréable)”을 추출하겠다고 말한 바와 같이 보들레르의 산문시는, 대도시에서 마주치는 군중의 우연한 만남과 대도시의 인공적이고 현대적인 삶을 “몽상의 파동에, 의식의 소스라침에” 담아내려는 시적 모험을 감행한다. 그리하여 보들레르는 『악의 꽃』에서 보여준 운문시와도 다르며 실용적 메시지의 단순한 전달인 르포르타주(reportage)와도 다른 산문시를 창작하는데, 산문소시집 『파리의 우울』에서 「저마다 제 시메르를Chacun sa chimère」은 그가 사유한 산문시의 한 지점을 제시한다.     

막막한 잿빛 하늘 아래, 길도, 잔디도, 엉겅퀴 한 포기도, 쐐기풀 한 포기도 없이, 먼지로 뒤덮인 막막한 벌판에서, 나는 몸을 구부리고 걸어가는 사람들을 숱하게 만났다.


그들은 저마다 커다란 시메르(Chimère)를 한 마리씩 등에 짊어지고 있었으니, 무겁기가 밀가루나 석탄 부대, 또는 로마제국 보병의 군장 못지 않았다.

그런데 이 괴물 짐승은 생명 없는 하중이 아니라, 오히려 그 탄탄하고 억센 근육으로 사람을 덮어 누르고 있었다. 괴수는 그 거창한 갈퀴 발톱 두 개로 저를 태우고 가는 생명의 가슴팍을 움켜쥐고 있었으며, 그 전설적인 머리는 사람의 이마 위로 솟아올라, 그 모양새가 마치 고대의 전사들이 적군의 공포감을 더욱 부추겨주길 바라면서 썼던 그 무시무시한 투구 가운데 하나처럼 보였다.

나는 그 가운데 한 사람에게 질문을 하였던 바, 어디를 이렇게 가고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전혀 알지 못한다고, 자기도 다른 사람들도 그에 관해 아는 것이 없다고, 그러나 걸어가려는 거역할 수 없는 욕구에 쫓기고 있는 것으로 보아, 분명히 어디론가 가고 있다고 대답했다.

기록해두어야 할 특이한 사실 : 이 나그네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제 목에 매달리고 제 등에 엉겨붙어 있는 이 흉포한 짐승에 대해 분노하는 모습이 아니었으니, 이 짐승이 자기 자신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고 여기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그 피곤하고 진지한 얼굴 하나하나에는 아무런 절망의 낌새도 비치지 않았거니와, 하늘의 우울한 궁륭 아래, 그 하늘처럼 황량한 땅의 먼지 속에 발을 파묻으며, 그들은 끝없이 희망을 품도록 벌받은 자들이 지어 마땅한 그런 체념 어린 표정을 지으며 나아가고 있었다.

그리하여 행렬은 내 옆을 지나 지평선의 대기 속으로, 이 행성의 둥근 표면이 인간 시선의 호기심으로부터 벗어나는 그곳으로 잠겨들었다.

그래서 잠시 동안 나는 이 신비로운 현상을 이해하려고 애써보았으나, 이내 억제할 수 없는 무관심(Indifférence)이 나를 덮쳤으며, 그 바람에 나는 바로 그 사람들이 막강한 시메르에 짓눌리는 것보다 더 무겁게 짓눌리었다.

― 샤를 보들레르의 「저마다 제 시메르를」 전문     

(샤를 보들레르, 『파리의 우울』, 황현산 옮김, 문학동네, 2015, p.10. 이하 인용은 동일한 책이다.)


‘시메르(chimère)’는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소아시아 리키아의 상상 동물, 키마이라(Khimaira)에 해당하는 프랑스어이다. 시메르는 사자의 머리, 산양의 몸, 뱀의 꼬리 등 다양한 동물들의 신체 부위로 구성되었으며 무서운 불길을 입에서 토해내는 괴물이어서 ‘분화수(噴火獸)’로 번역된 적도 있다. 프랑스어 여성명사 chimère는 ‘공상, 망상, 몽상’의 뜻뿐만 아니라 ‘환상(illusion), 꿈(rêve)’의 뜻도 지니는데, 원문에서 대문자로 표기된 “시메르(Chimère)”는 황현산의 주해가 설명한 바와 같이, 표면적으로 ‘분화수’를 의미하지만 배면으로는 본문 마지막에 등장하는 대문자 “무관심(Indifférence)”과 매개되어 ‘망상’의 의미에 근접하고 있기에 중의적인 ‘시메르(chimère)’ 자체로 번역하고 읽는 것이 타당하다. 

「저마다 제 시메르를」은 막막한 벌판에서 실재하지 않는 환상의 괴물을 짊어지고 걸어가는 사람들을 묘사한다. 어디로 가느냐는 나의 질문에 각자의 시메르를 짊어진 사람들은 “분명히 어디론가 가고 있”지만 “전혀 알지 못”한다고 대답한다. 시메르에게 짓눌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분노하거나 절망하지 않고 체념 어린 표정으로 나아간다. 화자인 나는 “이 신비로운 현상을 이해하려고 애써보”지만 이내 시메르보다 더한 “무관심(Indifférence)”에 무겁게 짓눌렸음을 고백한다. 

보들레르의 「저마다 제 시메르를」은 막막한 벌판을 배경으로 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도시를 배경으로 삼고 있는 환상적 알레고리 산문시로 읽힌다. 시메르를 짊어진 사람들은 매우 빠른 속도로 매번 충격을 안겨주는 대도시에서 ‘망각’의 삶을 짊어진 군중들과 다르지 않다. 대도시의 우연한 만남과 반복적으로 노동하는 삶은 익명의 군중들에게 무관심과 망각과 권태를 불어넣는다. 역사적으로는 1848년 2월 혁명으로 성공한 공화정이 제2제정시대(1852-1870)의 등장과 함께 실패로 끝남에 따라 삶의 방향성을 상실하고 다른 세계에 대한 전망을 ‘망각’하고 ‘무관심’해진 당대의 삶에 대한 알레고리이다. 그런 점에서 보들레르의 「저마다 제 시메르를」은 산문시를 구성하는 요건 중의 하나가 대도시의 삶을 풍자하는 환상적 알레고리임을 암시한다.      



숨결 하나가 칸막이벽들에 오페라적인 틈들을 열고, - 부식한 지붕들의 회전을 뒤흔들며, - 난로들의 경계들을 흩뜨리고, - 십자형 유리창들을 지운다. - 포도밭을 따라, 이무깃돌에 발을 걸쳐 놓고, - 볼록거울들, 불쑥 튀어나온 판자들 그리고 뒤틀린 소파들로 시대가 웬만큼 드러나는 그 마차로 내려갔다 - 고립된, 내 잠의 영구차, 내 어리석음의 목동의 집인 짐마차가 사라진 큰길의 잔디 위에서 회전하고 있다; 그리고 오른쪽 유리창 위 오목한 곳에서는 창백한 달 같은 형상들, 잎들, 가슴들이 돌고 있다.

- 아주 진한 초록과 파랑색이 이미지를 뒤덮는다. 자갈 자국이 있는 주변에 말을 수레에서 풀어 놓기.

- 여기서, 우린 폭풍우를 위해 휘파람을 불 것이다, 그리고 소돔들(les Sodomes), - 그리고 솔림들(les Solymes), - 그리고 사나운 짐승들과 군대들을 위해,

- (꿈속의 마부와 짐승들 그들은, 비단 같은 샘물 속에 나를 두 눈까지 빠지게 하기 위해, 가장 숨 막히는 나무숲 아래에서 다시 원기를 찾을 것이다.)

- 그리고 찰랑거리는 물과 널리 퍼져 있는 음료들을 통해 채찍질당한 우리를 개들 짖는 소리에 뒹굴도록 보내기 위해….

- 숨결 하나가 난로의 경계들을 흩뜨린다(Un souffle disperse les limites du foyer).

― 아르뛰르 랭보의 「저속한 야상곡Nocturne vulgaire」 전문     

(아르뛰르 랭보, 『랭보 시선』, 곽민석 옮김, 지식을만드는지식, 2010, pp.162-163. 제목 일부 재번역.)



보들레르가 「저마다 제 시메르를」을 통해 1848년 2월 혁명의 실패 이후 다른 세계의 가능성을 상실한 제2제정시대의 대도시, 파리의 삶에 대한 모랄을 환상적 알레고리 산문시로 썼다면, 랭보는 파리 코뮌(1871.3.18.-5.28), 그 혁명의 「대홍수 뒤에Après le Déluge」 오는 ‘권태’와 안정된 삶을 뒤흔드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환상의 감각을 산문시집 『일뤼미나시옹Les Illuminations, 1873-1875』에 담는다. 그 중에서 랭보의 「저속한 야상곡」은 「대홍수 뒤에」보다 더욱 몽환적이며 동화적인 환상을 그려내면서도 자연의 재난과 신의 폭력이 권태로운 현실의 경계 너머까지 틈입하는 환상을 포착한다. 

「저속한 야상곡」에서 “숨결(Un souffle)”은 한 줄기 바람이자 몽환을 일으키는 불길의 숨결이다. 그 불길이 타오르는 난롯가는 세계에서 가장 비속하고 저속한 가장자리이며 동시에 세계의 끝에서 정신을 잃고 다른 삶과 다른 세계를 꿈꾸는 장소이다. 랭보는 몽환적인 불길이 타오르는 난롯가, 그 벽이 흩뜨려지면서 구멍 나는 경계에서 몽상과 환상의 여행을 출발한다. 몽환적인 여행에서 발생하는 사건의 궤적과 흩어짐을 환상적인 감각으로 표현한다. 나는 현실과 미지의 경계를 흩뜨리는 불길 너머 포도밭을 지나고 이무깃돌-빗물 홈통 주둥이 석상-에 다리를 걸쳐놓고 환상 속의 마차로 내려간다. “고립된, 내 잠의 영구차”, 그 마차는 길이 지워진 큰 길에서 방향을 바꾸며 회전하고 있다. “창백한 달 같은 형상들, 잎들, 가슴들이 돌고” 있다. 환상 속에서 방향을 바꾸며 회전하고 있는 것들은 숲과 바다를 상징하는 “아주 진한 초록과 파랑색”인데, 그 색채 상징이 환상을 지배한다. 그것은 자연의 질서와 조화의 상태가 아니라 곧 현실로 도래할 자연의 폭풍우이며 자연이 일으키는 폭력의 빛깔이다. 환상 속에서 나는 교만과 나태와 죄악으로 가득 찬 소돔과 솔림(예루살렘), 그 도시들을 파멸시킨 신의 폭력과도 같은 ‘폭풍우-맹수들과 군대’를 부르기 위해 휘파람을 부르려 한다. 환상의 마부와 짐승들이 “비단 같은 샘물 속”에 나를 처박을 것이라고 예견한다. 파도와 넘치는 물이 권태로운 현실을 쓸어버리는 것을 투시한다. 나는 “가장 숨 막히는 나무숲 아래에서 다시 원기를 찾을 것”이라고 예언한다. 그러나 나는 개 짓는 소리를 듣고 환상에서 깨어난다. “숨결 하나가 난로의 경계들을 흩뜨린다”는 마지막 문장은 환상에서 현실로 깨어나는 장면과 현실에서 환상으로 넘어가는 장면을 압축적으로 표현한 시구로서 산문시의 시작과 끝을 반복하고 변주하면서 음악성을 작동시키는 랭보 산문시의 계시(illumination)를 드러낸다. 「저속한 야상곡」에 등장하는 환상의 ‘폭풍우’와 ‘맹수들과 군대’는 권태와 교만과 죄악에 물든 현실의 삶을 쓸어버리는 자연의 폭력이라는 점에서 산문시 「대홍수 뒤에」의 ‘대홍수’와 다르지 않다. 그것은 인간의 역사를 정지시키는 예외적 상황의 신의 폭력이며 역사적으로는 파리 코뮌 같은 혁명의 알레고리이다. 랭보의 「저속한 야상곡」은 인간의 법과 질서로 구축한 국가와 권태롭게 안주하는 삶을 전복하는 혁명을 꿈꾸는 환상적 알레고리 산문시의 극지를 제시한다. 보들레르가 『파리의 우울』을 통해 모랄과 반모랄, 비모랄의 환상적 알레고리 산문시를 발명했다면 랭보는 『일뤼미나시옹』을 통해 끝없이 미지의 세계를 지향하는 환상적 감각의 알레고리 산문시를 발견한 것이다.   


  

사회적 환상과 알레고리 산문시      


2000년대 한국시에 등단한 일군의 1970년대산 시인들은 1998년부터 2007년에 이르는 한국의 정치적 상황과 경제적 토대에 근거를 두고 등장하였다. 그들은 1987년 민주화운동의 열기가 식고 일상의 삶에 자리잡은 세대의 후속 세대로서 형식적이나마 안정적으로 실현되는 대의제 민주주의를 목격하였고 외환위기로 인한 국제통화기금(IMF)의 차관이 도입되어 실행된 대규모의 구조 조정과 실업을 직접 체험하였다. 그들은 현실 너머 다른 세계의 전망을 상실하고 국가의 공권력 대신 초국적 자본의 권력이 공동체와 가족을 해체하고 개인의 불안을 심화시키는 사태 앞에서 시쓰기를 감행한 것이다. 그 역사적 배경 속에서 그들의 시는 ‘지금-여기’가 아닌 다른 삶과 다른 세계에 대한 전망이 부재한 시대의 수사학으로서 알레고리 산문시를 (무)의식적으로 다수가 선택하였다. 강성은, 김성규, 김중일, 박장호, 송기영, 신영배, 유형진, 황병승, 황성희 등의 시가 대표적이다. 그 중에서도 김성규는 자연 재해와 원시적 자연의 폭력 앞에 놓인 가족의 삶을 환상적 알레고리 산문시로 제시한 바 있으며 김중일은 전망 없는 도시 속에 갇힌 비극적 삶과 천천히 죽어가고 있는 삶을 환상적 알레고리 산문시로 구현한 바 있다. 두 시인의 시는 랭보의 산문시보다 보들레르의 산문시가 보여주는 모랄의 편에 서서 사회학적 상상력과 반성적 사유를 담아낸 1950년대 김구용의 산문시 계보에 속하는 환상적 알레고리 산문시의 특성을 보여준다.      


옆집도 소용돌이에 떠밀려 천천히 대기권 위로 떠올랐어요 집들이 하늘을 날아다니고 있었어요 화장실 문을 열다 나는 떨어질 뻔했지요 이불을  뜯어라 낙하산을 만들어야지 어머니는 서둘러 바느질을 시작했어요 거대한 나무가 구름 위로 솟아올랐어요 저기에 매달리면 더 높은 곳으로 날아갈 텐데 동생이 말했어요 누나가 머리를 쥐어박았지요 밀가루 반죽 같은 구름을 둘둘 말아 빵을 구워 먹으면 좋겠다 아버지는 또 취해서 정신이 없었어요 폭풍이 멈추면 어떻게 하지? 그러면 우리는 바삭콩이 되는 거야     

삼촌은 도표를 그리기 시작했어요 마을 전체가 알 수 없는 땅으로 날아가는 거야, 신난다! 동생이 소리쳤어요 하늘을 보며 기도합시다 하수도관을 타고 동네 목사님의 설교가 시작됐어요 모두들 넋을 놓고 하늘을 봤어요 이곳이 곧 하늘이란다 삼촌은 컴퍼스를 돌리며 말했어요     

더 바라볼 하늘이 없었어요, 이 폭풍이 언제 멈출지는 아무도 몰라     

집에 있는 것을 모조리 던져버려라 어머니가 소리쳤어요 안돼! 지금은 공기의 저항을 최대한 받아야 합니다 적당한 무게를 가지고 있어야 소용돌이에서 벗어나지 않아요 삼촌은 물리학의 자장에 대해 설명했어요 어머니는 돈을 빌리다 거절당한 표정을 지으며 울었어요     

차라리 재앙이 계속되어야 해 올라갈 곳은 없고 오직 떨어질 일만 남았지     

바느질을 멈춘 어머니, 몸을 말고 자는 아버지, 지붕 위에서 사방을 바라보는 동생, 기도하는 누나와 잠에서 막 깬 나는 책상에서 볼펜을 놓지 않는 삼촌을 바라봤어요 재앙이 끝나면 우리는 어디로 떨어질까요     

천국 아니면 지옥이겠지 너희들 좌석은 예약되어 있지 않단다 부자들의 창문 옆으로는 벌써 헬기들이 잠자리떼처럼 몰려다녔어요 어째서 우리집이 폭풍에 휘말렸을까

―김성규의 「폭풍 속으로의 긴 여행」 전문(『천국은 언제쯤 망가진 자들을 수거해가나』, 창비, 2013)   

  

김성규의 두 번째 시집에 수록된 「폭풍 속으로의 긴 여행」은 “폭풍”이라는 자연의 재앙 앞에서 무력하고 가난한 가족의 삶을 환상적 알레고리 산문시로 보여준다. ‘폭풍’은 “옆집도” “천천히 대기권 위로 떠”올릴 뿐만 아니라 “부자들”의 집도 떠올린다는 점에서 한 가족에게만 밀어닥친 자연의 재난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폭풍은 합리성과 합법성으로 지칭되는 법과 질서로 건설한 국가, 그 공동체의 삶을 단번에 파괴한다는 점에서 신이 인간에게 내렸던 ‘대홍수’와 다르지 않다. 대홍수는 인간의 죄악과 타락을 벌하기 위한 신적 폭력으로서 인간이 구축한 법과 국가의 외부에서 세계의 모든 생명을 쓸어버리고 절멸시킨다. 신은 인간의 죄악과 타락으로 물든 세계를 대홍수를 통해 정화시킨다. 대홍수 앞에서 예외적으로 신으로부터 구원받는 사람은 고결하고 정의로운 ‘노아’와 직계 가족뿐이다. 그런데 신의 대홍수를 통한 세계의 정화와 구원은 현실에서 불가능하다. 성경의 신학에서만 가능하다. 「폭풍 속으로의 긴 여행」에서 구원은 노아 같은 선인에게 집행되는 신의 말씀이 아니라 “부자들의 창문 옆으로” “벌써 잠자리떼처럼 몰려”온 “헬기”에 의해 이뤄진다. 21세기 전지구의 초국적 자본주의가 지배하고 있는 현실에서 구원은 계급적이며 부자들의 생명이 선차적이다. 대홍수 또는, 폭풍 같은 자연의 재앙 앞에서 모든 생명은 귀한 것이 아니라 자본을 소유한 부자의 생명이 보다 고귀하다. 자본주의 현실에서 ‘하늘’은 구원의 기적을 행하는 신을 더 이상 함의하지 않는다. “더 바라볼 하늘”이 없으며 “오직 떨어질 일만 남”았다. 구원은 불가능하다. 

다른 한편으로 폭풍은 지상의 모든 사람들을 그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는다는 점에서 자연의 얼굴을 가진 자본의 폭력과 속도의 알레고리로도 읽힌다. 자본의 폭력과 속도 앞에서 힘없는 “아버지는 또 취해서 정신이 없”다. 가난한 사람들은 물론 부자들도 폭풍처럼 소용돌이치는 자본의 속도와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더 많은 자본과 더 빠른 속도로 순환하는 자본을 가진 부자만이 지금, 자본의 속도에 맞춰서 “공기의 저항을 최대한 받”으면서 “적당한 무게를 가지고 있어야” 자본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다. 자본은 순환을 통해 이윤을 창출하기에 자본의 순환이 멈추면 세계는 파산하고 삶은 정지한다. 그런 이유로 “차라리 재앙이 계속되어야” 한다. “폭풍이 언제 멈출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처럼 인간의 통제를 벗어난 자본의 폭력은 언제 멈출지 아무도 모른다. 현대의 삶은 자본, 그 ‘폭풍 속으로의 긴 여행’에 다름 아니다. 김성규의 환상적 알레고리 산문시 「폭풍 속으로의 긴 여행」은 자연의 재앙을 얼굴로 삼은 자본의 폭력 앞에서 무력한 현대적 삶에 대한 비판적 사유를 보여주고 있다.      


흐린 책을 읽고 나는 계절이 뒤바뀌는 소리를 듣지 과연 밤낮은 무엇인가 흐린 책을 읽는 밤엔 고대하던 깊은 잠을 잘 수 있지 비는 밤새 이불로 조금씩 스며들어 대낮의 꿈속으로 뚝뚝 떨어지고 홑겹의 잠 속에서 내가 다시 흐린 책을 펼치자마자 페이지에 기록된 폭발의 연대기에 기함하며 기절하지 기절 속에서도 나는 흐린 책을 보네 힘겹게 다시 한 세기의 페이지를 넘기며 오는 너를 만나지 너는 오늘 새처럼 철탑 위에 앉은 사람 촛불로 공중에 제 얼굴을 조각하는 사람 몇초간의 폭격으로 어린 딸을 잃은 사람 태양이 오늘의 바람 속에 드리웠던 흰 그물을 거둘 시간 무수한 목숨과 한권의 낡고 흐린 책이 책장을 지느러미처럼 파닥이며 저녁의 수면 위로 끌려나오네 오늘의 날씨는 흐림 흐린 책 위로 난민들의 난파된 목선 잔해 같은 문장들이 시커멓게 떠내려오네 바다를 비행 중에 하늘에서 숨 끊긴 새들이 책장 위로 후드득 떨어지네 우박처럼 새들이 불현듯 내 이마로 날아들지 통찰! 과연 그런 게 있다면 그런 건 없다는 사실 한가지뿐 다음 페이지가 해일처럼 부풀어오르며 밀려오고 페이지와 페이지 틈으로 벼락이 치고 지진이 나고 크레바스가 패고 지난 페이지가 유빙처럼 찢겨 떠내려가네 구름 속에 가지런히 펼쳐진 나의 두 손 사이로 파도처럼 넘겨졌던 페이지는 다 찢겨나갔네 흐린 책을 읽고 나는 시간이 뒤바뀌는 소리를 듣지 대체 이 계절은 어디서 왔는가 나의 빈손이 마지막 두 장의 페이지처럼 찢기고 떨어지는 계절 조용히 흐린 책을 지르밟고 가는 무심한 새들의 발걸음

―김중일의 「흐린 책」 전문(『내가 살아갈 사람』, 창비, 2015)     


김중일의 세 번째 시집에 수록된 환상적 알레고리 산문시 「흐린 책」은 “책”을 읽는 독서 행위를 통해 직면하는 폭력적인 현실과 시인의 윤리를 성찰한다. 시인이 읽는 책은 흐리다. 책이 ‘흐린’ 이유는 “난민들의 난파된 목선 잔해 같은 문장들이 시커멓게 떠내려오”기 때문이다. “책을 펼치자마자 페이지에 기록된 폭발의 연대기”가 펼쳐지기 때문이다. 시커먼 문장들은 죽음의 빛깔이기 때문이다. 고통스러운 페이지를 계속 넘기면 오늘의 세계는 직장에서 해고되어 굴뚝과 “철탑 위에 앉은 사람”, 강제 철거당한 사람, “몇초간의 폭격으로 어린 딸을 잃은 사람”, 파도에 밀려와 터키 해변에서 죽은 세 살 난민 아일란 쿠르디,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에 대한 무자비한 폭격과 “무수한 목숨”의 무고한 죽음, 세월호와 함께 수장된 304명의 죽음……. “오늘의 날씨는 흐림”. “계절이 뒤바뀌는 소리를” 들어도 폭력적인 현실의 페이지는 멈추지 않는다. 

시인이 읽는 책은 단지 종이로 묶인 책이 아니라 폭력적인 세계의 알레고리로서의 책이다. 폭력적인 세계의 참상을 담고 있는 ‘흐린 책’의 독서를 통해 시인이 도달한 것은 “통찰! 과연 그런 게 있다면 그런 건 없다는 사실 한가지뿐”이다. 시인은 우리가 살고 있는 ‘흐린’ 세계를 맑고 투명한 삶이라고 치부하지 않는다. 새들은 조용히 흐린 책을 “지르밟고” 무심히 지나가지만 시인은 흐린 책의 폭력적인 세계를 외면하지 않는다. “페이지에 기록된 폭발의 연대기에 기함하며 기절하”면서도 ‘흐린 책’ 읽기를 멈추지 않는다. 맑고 투명하며 평화롭게 보이는 일상 너머 폭력적이며 고통스러운 세계가 실재하고 있음을 투시하고 증언한다. “대체 이 계절은 어디서 왔는가” 묻는다. 시인은 폭력적인 현실에 무력한 시쓰기에 대해 절망하며 “나의 빈손”이 찢기고 떨어지는 고통을 느낀다. 그리하여 책의 ‘흐림’은 폭력적인 세계에 대한 성찰과 연대의 손길을 내미는 시인의 독서 행위 속에서 보이지 않는 세계의 고통까지 드러내며 시의 윤리가 제기하는 ‘어떻게 살 것이며 어떻게 쓸 것인가’라는 물음과 만나게 한다. 

지금까지 읽은 보들레르와 랭보, 김중일과 김성규의 산문시는 모두 다른 삶과 다른 세계의 가능성을 상실한 현대적 삶을 알레고리로 묘사하면서 풍자하고 비판하는 환상성을 내보인다. 그 환상의 빛깔과 두께는 각각 상이하지만 그 환상들은 공통적으로 현대적 삶 속에서 억압된 것이 귀환한 (무)의식적 증상으로서 개인적 차원을 넘어서는 사회적 증상으로서의 성격을 지닌다. 그런 점에서 환상적 알레고리는 복잡하고 기이하며 폭력적이면서 권태로운 대도시의 현대적 삶을 담아내려는 산문시의 주요한 경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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