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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현진 Mar 11. 2024

먼지 쌓인 책


20년 겨울, 책 <식물 문답>의 마지막 부분을 쓰면서 쓸쓸한 풍경을 상상했다. 잘 팔리지 않아 서점 한 구석에서 먼지가 뽀얗게 쌓여버린 책, 악성 재고로 분류되어 서점이 아니라 곧장 쓰레기처리장으로 보내지는 모습, 그리고 멀쩡한 새 책을 빨아들이는 파쇄기의 새까만 입. 지금까지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려 책을 준비하는 일은 즐거웠지만, 이제 이 원고를 마무리해 보내고 나면 이런 일들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멈추기 어려웠다.


고백하자면, 책의 마지막에 실린 꼭지 '좋은 시절이 끝날 때'는 이 생각들을 뿌리치려고 쓴 글이다. 만약 이 책이 크게 실패해도 괜찮기를 바라는 마음 혹은 다짐. 이게 위안이 되었던 걸까? 이후로 쓸쓸한 풍경은 별로 떠올리지 않았지만, 조금 부끄러웠다. 독자가 아니라 나를 위한 글을 책으로 냈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래서 이 글을 기억에 남는 부분으로 꼽는 독자를 만나면, 지금도 얼굴이 뜨거워진다.


여전히 어떤 걱정이 생기면, 나에게 필요한 이야기를 노트에 적거나 그려 둔다. 그렇게 노트를 채우고 나면 책장 구석에 꽂아두고 잊어버린다. 먼지가 뽀얗게 쌓이도록. 언젠가, 노트 한 권을 꺼내 먼지를 후 불어내고, '나를 위해서라면 좀 어때? 이 이야기가 누군가에게 가 닿을 수 있기만 하다면' 이라고 적을 수 있기를 바란다. 


*월간 <환경과 조경(Landscape Architecture Korea)>에 2023년 1월호에 실린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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