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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윤혜 Jul 02. 2021

우리 시대의 미켈란젤로

제19회 리옹 댄스 비엔날레-2

전편에서 이어집니다. 전편에서는 리옹의 전반적인 분위기와 댄스 비엔날레, 그리고 비엔날레의 화제작이었던 디미트리스 파파이오아누의 신작을 다루기 앞서 파파이오아누에 대한 간략한 소개를 했습니다. 본편에서는 그의 신작 '트랜스버스 오리엔테이션'과 그 외 작품에 대한 리뷰를 싣습니다.




촛불의 아름다움으로 나방을 판단하라

‘트랜스버스 오리엔테이션’은 나방이 빛을 향해 날아가듯, 생명체가 광원(光原)을 향해 일정하게 각도를 맞추어 움직이는 행위를 뜻한다. 빛은 생명체가 이를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끊임없이 보내는 신호다. 파파이오아누는 13세기의 페르시아 시인 루미(Rumi)의 글귀에서 영감을 얻었다. “Judge a Moth by the Beauty of Its Candle(촛불의 아름다움으로 나방을 판단하라).”


작품은 검은 무대 대신 흰 벽을 세워 무용수들의 움직임을 실루엣처럼 사용했다. 마치 커다란 캔버스에 점들이 번지고 튀어나가듯, 수트를 입은 무용수들은 한 폭의 그림처럼 장면을 구성한다. 이는 검은 무대 위 조명을 받는 무용수들의 ‘동작’에만 빠져들지 않게끔, 다시 말해 어떤 북유럽 신화나 카라바조(Caravaggio)의 그림처럼 어둠이 주는 신비감에 휩싸이지 않도록, 전체적인 ‘장면’을 볼 수 있도록 한 것이라 짐작된다.



생(生)의 근원을 찾아

파파이오아누의 나방은 어떤 아름다움을 좇을까? 그들의 움직임을 따라가다 보면 사람의 근원은 무엇인가, 하는 신화적 궁금증, 어떠한 심연에 있는 존재의 근본에 대한 상상력을 펼치게 된다.


이번 작품 역시 파파이오아누식 하이브리드 상상 모음집이었다. 검은 수트를 입은 무용수와 나체 무용수들이 결합해 남성과 여성이 복합된 몸의 형태를 만들어내고, 조명과 실루엣이 교차하며, 형광등과 사다리, 검은 침대 프레임과 커다란 돌덩이와 같은 조형이 나타났다 사라지고, 여기에 검은 소와 물이라는 신화적인 모티브가 접목된다.


이러한 모음극을 처음부터 끝까지 관통하는 것은 ‘물’이다. 파파이오아누는 이 작품에 총 3,000리터의 물을 사용했다. 물은 그가 지속적으로 사용해온 요소 중 하나다.


“무대는 실제가 아닙니다. 허구죠. 그래서 저는 완전한 허구를 만드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물은 일상적인 물질이면서도, 동시에 환경을 ‘반사’하는 놀라운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은유 가운데 있다는 것을 끊임없이 상기시킵니다. 또한 물은 깨끗함을 상징하는 동시에 관능을 불러일으킵니다. 플라톤적인 아이디어의 플랫폼이랄까요.”


독일 무용수 슈카 호른의 연기는 순수한 소년적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했다. 그러한 소년이 껍데기를 벗고 점차 내면을 들여다보며 세계를 탐구해나가는 모습 또한 뚜렷이 전달되었다.

무대에 수도꼭지를 설치해 소에게 물을 먹이거나, 특수 제작된 하이드로겔 구슬을 폭포처럼 쏟는 모습, 그 구슬을 맞으며 젖은 다이빙 수트에서 빠져나오려는 인어와 같은 원초적인 움직임, 단 하나뿐인 여성 무용수 브레나 오마라(Breanna O'Mara)가 고대 그리스의 조각 분수가 되어 남성 무용수들에게 주는 활력, 마치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처럼 우뚝 선 그녀가 끈적한 액체를 쏟아내며 낳는 아기, 무용수들이 해체하고 걷어낸 무대 바닥 아래에서 드러나는 바다 등. 피나 바우슈가 ‘봄의 제전’에서 대자연을 흙으로 펼쳐냈듯, 파파이오아누는 바다를 무대 아래 두었다. 이토록 많은 물을 붓고, 뿜고, 드러내며 우리의 원천이 무엇인지 확실히 각인시킨다. 인간의 존재를 가능케 한 태곳적 물질. 생의 근원은 물이며 신화적 상상력은 여기서 시작된다.


현재 탄츠테아터 부퍼탈 멤버로 활동 중인 브레나 오마라가는 독보적이었다. 창백한 무표정의 얼굴에 대비되는 섬세한 동작은 때론 섬뜩하기까지 했다.
작품 마지막에 드러난 바다. 물. 시원(始原).


우리 시대의 미켈란젤로

연출 기법은 ‘잉크’(2020)나 2017년 SPAF에서도 선보였던 ‘위대한 조련사’ 등의 전작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재차 찬사가 쏟아진 건, 단도직입적으로, 미장센이 너무나도 아름답기 때문이었다. 또한 극에 가까운 이 작품이 ‘댄스’ 페스티벌에 가장 중요한 작품으로 초청될 수 있었던 것 또한 몸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드러내고 그 몸을 가장 아름다운 방식으로 움직일 수 있도록 철저히 조직했기 때문이다.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가 눈빛으로부터 어깨와 팔의 라인을 거쳐 손끝에 모든 힘을 실어 모으듯, 검은 소에 올라탄 나체의 형상이 그랬고 다빈치의 인체 비례도처럼 돌아가는 두 남녀 무용수의 복합체가 그랬다. 이러한 이미지들이 지날 때마다, 미켈란젤로가 동시대에 태어났다면 이런 작품을 올렸을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유발 피크의 <욕구의 어휘>. © Sebastien Erome


음악의 선, 움직임의 선

그 외 다른 작품으로 릴리외 라 파프 국립안무센터의 예술감독 유발 피크가 안무한 ‘욕구의 어휘’(Vocabulary of Needs)와 리옹 오페라 발레의 ‘당스 앙코르(Danse Encore)’를 감상했다. 4일 메종 드 라 당스에 오른 ‘욕구의 어휘’는 움직임과 음악의 상관관계를 연구해온 피크가 바흐 바이올린 파르티타 2번 D단조 BWV 1004에 맞추어 몸으로 대위법을 표현한 작품이다. 세 개의 거울이 금빛 조명에 빛나는 무대에서 누드톤의 상의를 입은 무용수들이 2의 배수로 짝을 지어 추는 춤들은 바로크 라 벨 당스의 현대 버전 같은 것이었다.


리옹 오페라 발레의 ‘당스 앙코르’는 2020년 발레단에 부임한 단장 쥘리 기베르(Julie Guibert)의 야심찬 기획으로, (쥘리 기베르는 육아 휴직을 한 여성 무용수의 복귀를 거부해 파문을 일으키며 해임된 전 단장 요르고스 루코스(Yorgos Loukos)의 후임으로 임명됐다.) 발레단의 30명 무용수들을 안무가와 1:1로 연결해 각각을 위한 10분가량의 솔로 작품을 창작하는 프로젝트다. 봉쇄 기간 동안 개인 창작과 연습을 이어갈 수 있도록 한 현명한 아이디어다.


리옹 오페라 발레의 <당스 앙코르>. (좌) 지워진 날들 (우) 셀프 듀엣. © Michel Cavalca

30개 작품 가운데 5개 작품이 6월 5일 손 강변의 레 섭시스탕스(Les Subsistance)에 올랐다. 안무가 라시드 우람단(Rachid Ouramdane)이 무용수 레오아니스 퓌포길리앵(Leoannis Pupo-Guillen)과 만든 '지워진 날들’(Jours effacés)은 어른에서 아이로, 라는 수직적 보살핌을 뒤집어 아이가 어른을 보듬는 이야기로 꾸몄다. 새뮤얼 바버의 ‘아다지오’에 맞춰 남루한 회색 옷차림으로 우울증을 겪는 남성을 연기한 퓌포길리앵은 “무대에 아이가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전해지는 에너지가 엄청났다. 작은 아이가 가진 힘과 가능성이 얼마나 큰 것인지 깨달은 작품.”이라며 소감을 전했다.


슈베르트 가곡 ‘마왕’의 피아노와 성악 멜로디를 한 곡에 담은 에른스트의 바이올린을 위한 ‘마왕’에 맞춘, 명상과 요가에 가까운 몸짓의 셀프 파드되인 노에 술리에(Noé Soulier) 안무의 ‘셀프 듀엣’(Self Duet) 또한 흥미로웠다.


레 섭시스탕스 무대와 테라스 풍경.


* 이 글은 월간객석 2021년 7월호에 실린 기사의 원문입니다.

* 트랜스버스 오리엔테이션의 크레딧은 모두 Julian Mommert, 그 외 크레딧이 없는 사진은 직접 찍은 것입니다.

월간객석 2021년 7월호 본 기사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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