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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윤혜 Aug 28. 2021

오늘날의 고전이란 이런 것

2021 엑상프로방스 페스티벌 중 中 이노센스


올 페스티벌에서 단연 주목받은 작품은 핀란드의 현대작곡가 카리아 사리아호의 신작 오페라 ‘이노센스’다. 무려 10년 전 런던 코번트가든에서 사리아호에게 의뢰한 작품인데, 지난해 코비드로 런던 초연이 미뤄지는 바람에 운 좋게도 올해 엑상프로방스가 초연 기회를 잡았다. 


핀란드 작가 소피 옥사넨(Sofi Oksanen)이 대본을 쓰고, 사리아호가 13명의 가수를 위해 9개의 언어를 엮어 작곡한 이 현대 오페라는 복잡한 언어적 음악적 구성과 더불어 인터미션 없이 5막이 연이어 진행되는 빠른 속도감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작품의 연출 방식을 고민하던 사리아호에게 엑상프로방스 페스티벌의 감독 피에르 오디가 연출가 사이먼 스톤을 소개했다고 한다. 이러한 오디의 혜안을 증명이라도 하듯, 스톤의 영민한 연출 방식은 빠르고, 시니컬하면서도, 충격적인 현대의 비극을 완전히 흡수해 마치 극과 연출 처음부터 하나였던 것 같은 인상을 주었다. 


서곡은 각 악기의 조심스런 솔로로 시작해 이들이 포개지고 교차하며 입체적으로 변할 때까지 몰아가다가 막이 오른다. 젠 스타일로 꾸며진 결혼식 연회장. 이노센스에는 두 개의 서사가 있다. 현재의 결혼식과, 10년 전 한 국제 학교에서 일어난 총기 테러 사건이다. 두 이야기는 완전히 분리된 듯 하지만, 당시 사건으로 딸을 잃은 연회장 웨이트리스가 결혼식 신랑 측이 총기 사건 주범의 가족이라는 것을 알게 되며 연결된다. 


ⓒJean-Louis Fernandez


두 이야기는 갈라지고 엮이다가


두 이야기를 구분하는 것은 음악이다. 결혼식 인물들은 대개 노래를 부르고, 학교 학생들은 내레이션이나 분절된 각자의 언어로 대사를 이어간다. 웨이트리스의 죽은 딸 마르케타만이 독특한 발성으로 핀란드 민속 선율의 노래를 부르며 서사를 오간다. 마르케타 역의 빌마 야(Vilma Jä)는 핀란드의 젊은 싱어송라이터로, 민속 창법을 기반으로 팝과 극을 넘나들며 작업하는 아티스트다. 사리아호와 웨이트리스 역의 막달레나 코제나(Magdalena Kožená) 모두 빌마 야의 개성적인 창법에 많은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성악 발성이 아닌 가수를 중심에 둔 구성은 관객들에게도 신선한 영감을 주었다.


두 이야기를 혼합하는 것은 회전하는 무대다. 육면체의 2층 건물이 천천히 돌아가는데, 한 면에는 층마다 2개씩, 적어도 4개의 공간이 마련된다. 예를 들어 1층은 연회장과 주방, 2층은 레스토랑과 복도로, 옆면은 1층 주방, 창고, 학교 로비, 2층 레스토랑, 화장실, 교실로 구성되는 식이다. 즉 하나의 면을 볼 수밖에 없는 무대의 특성을 회전이라는 운동으로 바꾼 이러한 기법은, 최소 4개의 이야기를 동시에 볼 수 있게 하며, 다음 면과 맞물려 6개, 8개의 이야기로 증식하고 이어진다. 등장인물들이 각자의 공간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끌고 가는 복잡한 구성을 표현할 최적의 장치였다. 



같은 공간을 회전하는 무대에 따라 같은 공간을 여러 방향에서 볼 수 있다. ⓒJean-Louis Fernandez


드러나는 시대의 비극 - 누가 유죄인가?


등장인물들은 각자의 공간에서 저마다 다른 트라우마에 시달린다. 13명이라는 등장인물의 숫자는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에서 영감을 얻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연회가 끝난 뒤 어떤 일이 일어날지 짐작할 수 있다. 비극이 일어날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유죄인가? 13인 각자의 마음속에 자리한 죄책감은 내내 우리의 신경을 불편하게 만든다. 마지막에 이르러 진실이 밝혀진다. 총기 사건의 가해자는 결국 지난날의 피해자였다는 것을. 웨이트리스의 딸인 마르케타는 주범을 괴롭혀온 또 다른 가해자였으며, 급우들 또한 동조했다. 전형적인 현재의 학교 폭력. 피해자와 가해자를 특정할 수 없는 사건. 우리 시대의 철저한 비극. 결국 학폭 가해자(테러 피해자)의 부모는 아이를 잃은 또 다른 피해자고, 신부도 피해자, 모두가 피해자다. 그럼 다시 질문한다. 누가 유죄인가? 사리아호는 “모든 사람은 항상 자신의 방식대로 유죄”라고 말한다. 무대는 여전히 회전한다. 회전은 두 서사뿐 아니라 유죄와 무죄의 개념까지 흩뜨렸다. 



ⓒJean-Louis Fernandez


사이먼 스톤은 페스티벌과의 인터뷰에서 “작품은 모든 상황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세상에서 행복하려고 노력하는 등장인물들의 트라우마적인 기억을 다룬다.”며 “치유를 위해서는 때때로 과거의 상처를 다시 열어야 할 필요가 있다.”라고 말했다. 


사리아호의 음악은 이러한 개인들의 응축된 분노와 아픔을 마치 제각기 다른 크기의 날카로운 못처럼 묘사했지만, 이 날카로움이 결국 둥그런 구체로 모이는 섬세한 완결성이 있었다. 역시 핀란드 출신인 지휘자 수자나 말키(Susanna Mälkki)가 잘 구현했다. 인터미션 없는 1시간 45분짜리 오페라는 짧기에 더 큰 임팩트를 남기고 끝났다. 기립박수가 이어졌다. 사람들은 저마다 작품의 아름다움을 찬양했다. 나도 직감했다. 이 작품은 우리 시대의 고전이 될 것이다. 휠체어를 탄 커튼콜의 사리아호는 그녀의 음악만큼이나 아름다웠다. 



(좌) 지휘자 수잔나 말키와 악수하는 카이야 사리아호. (우) 공연이 끝났음에도 쉽게 자리를 뜨지 못하는 관객들. ⓒYoonhye Jeon


* 함께 관람한 배리 코스키의 '팔스타프', 로테 드 비어의 '피가로의 결혼' 리뷰는 다음 글에서 이어집니다. 전날의 사이먼 래틀 지휘, 사이먼 스톤 연출의 '트리스탄과 이졸데' 리뷰는 앞글에 있습니다.

* 이 글은 월간객석 8월호에 실린 기사 <엑상프로방스 페스티벌 - 화제에 화제를 거듭한 여름밤>의 원문입니다. 축약된 버전은 월간객석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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