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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윤혜 Nov 13. 2022

자연이 경고하기를

에코페미니즘을 접목한 새 오페라 <Like Flesh>


동시대 오페라는 날마다 새로운 교차로를 만들어 나간다. 근래의 화두는 삶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생태계의 문제들이다. 가시화되는 기후 변화와 과도한 플라스틱 폐기물, 동식물 멸종, 생태계 보호와 같은 구호를 매일같이 접하는 지금, 우리는 이를 위해 어떤 실질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가? 오페라계는 어떤 각성을 하고 있는가? 또 이 문제를 어떻게 작품으로 승화시키고 있는가? 


몽펠리에 오페라 ⓒ Yoonhye Jeon


물리적으로, 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은 디지털 작업을 통해 10톤가량의 종이 지출을 줄이고 전구 대체 등으로 탄소배출량을 630톤 이상 줄였다. 리옹 오페라도 소비 전력을 약 40프로 줄였다(모두 2010년 대비). 작품으로선, 거대한 폐플라스틱으로 무대를 채운 오페라 코미크의 ‘달나라 여행’(2021), 식물이 방출하는 실시간 데이터를 소리로 변환해 오페라를 만든 플랜트 오페라 프로젝트(2019) 등 새로운 시도가 이어진다. 파리 8대학 연극과 교수 이자벨 모앙드로를 필두로 한 ‘오페라와 생태학’ 워크숍 또한 몽펠리에 오페라를 비롯해 프랑스 곳곳의 극장에 오르고 있다. 


현재 오페라 시장에 좀 더 드라마틱하게 다가갈 수 있는 소재는 에코페미니즘이 아닐까 싶다. 생태계 문제를 직접 인간 관계에 대입해 풀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1974년 프랑스에서 주창된 에코페미니즘은 전 지구적인 생태 위기를 여성주의 패러다임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운동이다. 인간과 자연, 남성과 여성이라는 지배-피지배 구조를 두고 자연 파괴와 여성 억압의 작동 방식이 같다고 보며, 남성으로 상징되는 경쟁과 이익 추구(자연 착취)로 인해 생긴 문제들은 다른 생명에 대한 공감, 관계와 연대로 해결할 수 있다고 본다. 


폴라이우올로가 그린 ‘아폴론을 피하기 위해 월계수 나무로 변신한 다프네’ ⓒ Simon Gosselin


오늘날의 신화 

올해 에코페미니즘을 다룬 흥미로운 작품이 초연됐다. 이스라엘 출신의 작곡가 시반 엘다르(1985~)의 음악과 영국의 대본가 코렐리아 린의 장시(長詩)를 바탕으로 한 ‘라이크 플래시(Like Flesh)’이다. 이르캄(IRCAM), 릴 오페라, 몽펠리에 오페라가 공동 제작했고 올해 페도라 상을 수상했다. 필자는 2월 13일 몽펠리에 오페라 공연을 보았다. 


‘라이크 플래시’는 고대 로마의 시인 오비디우스의 서사시 ‘변신’ 중 나무로 변한 여인들의 신화에서 영감을 얻었다. 산림관리인과의 불행한 결혼 생활에 갇힌 여자가 숲의 나무로 변해가는 이야기다. 두 사람의 소통 단절은 숲을 대하는 태도에서 드러난다. 황폐해지는 숲을 애도하는 여자와 달리 관리인은 돈을 위해 나무를 벤다. 이때 숲에 온 학생이 그녀가 나무로 변할수 있도록 돕고, 여자는 몸에 잎이 돋아나며 서서히 숲의 일부가 되어간다. 나무가 잎을 떨구고 버섯을 키우며 숲을 재생시키듯 그녀의 삶에는 나눔과 생명이 남는다. 관리인은 그녀를 가치 없는 나무로 보고 베어낸다. 자연은 무섭게 경고한다. 


ⓒ Simon Gosselin


연출은 단출하다. 검은 벽 3면 각 중앙에 이미지가 투영된다. 막이 오르기 전 무대에는 폴라이우올로가 그린 ‘아폴론을 피하기 위해 월계수 나무로 변신한 다프네’가 쏘아져 있다. 아름다운 신화로 미화된 아폴론과 다프네 이야기는 들여다보면 역시 남성성을 위시한 폭력이 내재돼 있다. 극이 시작되면 그림은 일렁이며 비주얼 아트로 변한다. AI가 찾은 수만 개의 숲 이미지들은 여성과 땅, 뿌리, 곰팡이와 같은 이미지들과 합쳐져 새로운 형상을 만든다. 무대를 맡은 실비아 코스타는 “AI는 ‘사람’과 ‘사람이 아닌 것’의 관계를 다시 생각해 보게 만든다”며 “그 상호작용으로 나온 이미지들이 점차 변형되는 모습 역시 시적이다”고 말했다. 


ⓒ Simon Gosselin


오늘날의 목가 

음악적 특이점은 60개가 넘는 스피커가 중첩하는 음향이다. 스피커는 무대 위 아래와 관객석 곳곳에 장치해 관객의 발끝으로 전해진다. 뭉쳐지고 흩어지며 쉼없이 떠다니는 음향은 흡사 고대의 신성한 제의와 같은 느낌 을 준다. 시반은 이런 유니크한 구성에 대해 “공간마다 소리가 더 이상적으 로 들리는 지점(sweet spot)이 있다”며, “음향이 이상적인 지점으로만 몰리지 않도록 아주 많은 포인트를 두어 각 음향들이 유기적으로 연결 되도록 했다. 어느 순간 소리가 앞에서도, 뒤에서도 들리고, 심지어 땅 아래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도록”이라 설명했다.


관객석 바닥 곳곳에 설치된 스피커 ⓒ Yoonhye Jeon


동시대 음악은 인간이 들을 수없는 세계를 상상할 수 있도록 돕는 장치이기도 하다. 막심 파스칼(1985~)은 이 오페라를 “동시대의 목가”라고 말했다. 오케스트라 피트에는 열정적인 막심 파스칼 지휘 아래 피아노와 신시사이저, 베이스 관악기와 각종 타악기의 소규모 기악 주자들이 연주했다. 


코렐리아의 시는 낭송 오페라에 가까울 정도로 아주 또렷한 발음으로 천천히 불렸다. “나무가 원하는 것은 그저 자라는 것, 수백년 간 나무가 진을 쏟아내온 것 만큼 충분히 느리게 살라”는 숲의 이야기처럼 극중 노래도 나무의 흐름에 맞춘 것이다. 


여자 역의 헬레나 래스커와 6인의 숲의 목소리ⓒ Simon Gosselin

동시대 오페라의 사랑받는 알토 헬레나 래스커(여자 역)는 역시 공력이 대단했다. 깊은 중음과 담담한 억양으로 건조한 여성이 나무로 변이하는 과정을 잘 살려 냈다. 학생 역의 소프라노 쥘리에트 알렌은 가볍게 오르는 고음이 돋보였다. 각 음역대의 가수 여섯 명이 폴리포니로 이루는 숲의 목소리는 피트와 무대를 오가며 합창했다. 이들의 목소리는 기악과 전자 음향과 합쳐져 하나의 클러스터를 만들어 떠다녔다. 숲이 살아 있는 듯했다. 


이 작품의 의의를 꼽자면 에코시스템, 나아가 에코페미니즘을 다룬 직접적인 오페라라는 것이다. 이는 우리 시대 오페라의 소재가 다양하게 확장되고 있음을 증명한다. 지난 세기의 고루한 서사와 갈등은 더 이상 새로운 세대의 욕구를 채우지 못한다. 코렐리아가 ‘라이크 플래시’를 “고대 가부장적 신화에서 영감을 받은 정통 오페라에 대한 도전”이라고 말했듯, 이제는 우리가 직면한 문제를 각기 다른 방식으로, 다른 언어와 다른 리듬으로 자유롭게 드러내야 한다. 새로운 이야기와 형태로 상상력을 공유하면서, 생태학적 문제와 여성주의를 연결한 이 작품처럼 말이다. 

ⓒ Simon Gosselin
커튼콜에 오른 작곡가 시반 엘다르 ⓒ Yoonhye Jeon


다만 에코페미니즘을 너무 직접적으로 대입한 탓에 극적 흥미가 반감된 것이 아쉽다. 이미 극의 초반부터 남성과 여성의 강한 대립 구도가 확립돼 전개가 예상 가능하고, 코렐리아의 대본 역시 직접 경고하듯 굉장히 직관적이기 때문이다. 이 부분은 무대를 감싸는 숲의 소리와 음향들이 영성적인 효과를 내며 흩뜨려 중화되기는 했다. 그렇지만 이를 고민해 정교하게 발전시키지 않으면 몇 번의 재연 후에는 그저 단순한 구도의 몽환적인 오페라에 머무르거나 자칫하면 현대판 페어리 테일로 남을 수도 있을 듯하다. 


글 전윤혜(프랑스 통신원) 사진 몽펠리에 오페라 



* 이 글은 월간객석 2022년 3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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