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스국제음악연구소(CIRM) 폐소 위기
프랑스 국립음악창작센터 산하의 니스국제음악연구소(CIRM, Centre National de Création Musicale)가 폐소 위기에 처했다. 이 연구소는 1968년 작곡가 장-에티엔 마리(Jean-Étienne Marie, 1917~1989)가 설립한 현대 음악연구소다. 매년 니스 일원의 오케스트라와 창작단체 및 음악원, 극장, 미술관과 함께 현대 기술을 접목한 음악을 발표해 왔으며, 코트다쥐르 대학의 공식 연구소로도 기능해왔다. 1997년 문화부는 국립음악창작센터를 설립하면서 니스국제음악연구소를 8개 산하 기관 중 하나로 지정했다.
연구소는 매년 5편 내외의 신작을 올리며, 자체 페스티벌 만카(MANCA)를 통해 현대음악 레퍼토리를 소개하고 있다. 올 신작인 장-뤽 에르베의 ‘오트르 나튀르’는 지난 2월 현대음악제인 프레장스 페스티벌 폐막작으로 뽑혔다.
프랑스 문화계 지원 감소의 가시화
니스국제음악연구소는 활발한 작품 생산과 별개로 폐쇄의 위기가 늘 있었다. 코로나로 인한 재정난을 바탕으로, 연구소를 20년간 이끌었던 작곡가 프랑수아 파리가 퇴임(2020)한 뒤 경영진이 부재한 것이 타격이었다. 공백 끝에 지난해 7월 소프라노 도나티엔 미셸 단삭(1965~)이 부임했지만, 그녀는 이곳이 자신이 하고자 하는 프로젝트를 수행할 능력이 없다는 이유로 6개월 만에 사표를 던졌다. 경영진이 없는 연구소는 문화부의 지원 자격에 미달되어 재정 지원이 끊겼고, 니스 시마저 12월 31일부로 연구소와 계약을 끝내며 폐소가 기정사실화됐다. 단 몇 달 만에, 54년 역사의 현대음악연구소가 사라지게 될 형편이다.
니스국제음악연구소의 위기는 창작음악 현장에 큰 파장이다. ‘국립’ 센터의 산하 기관이 ‘경영난’으로 인해 폐소되는 것은 코로나로 인한 국가 재정의 부족, 그로 인한 문화계 지원 감소가 가시화된 첫 사건이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가장 취약할 수밖에 없는 창작음악계는 누구나 다음 차례가 될 수 있다는 불안감이 가득하다.
현대음악의 지역 불균형, 다시 시작될까?
우리는 연구소가 속한 ‘국립음악창작센터’의 설립 취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국립음악창작센터는 1997년 프랑스의 ‘새로운 음악 창작을 장려하고자’ 설립됐다. ‘파리에 집중된 현대음악을 분산 육성하는 것’을 목표로 랭스, 리옹, 마르세유, 코르시카 등 각 지역에 골고루 산하 기관을 지정했다. 소속 예술가들은 지역의 작곡가, 연주자를 비롯해 컴퓨터 음악 프로듀서, 음향기사, 음악학자 등 약 100명가량이다. 니스국제음악연구소 폐소는 지역 불균형이 다시 시작되는 신호로도 여겨진다. 창작음악 생태계는 자본의 투입과 생산이라는 단기적인 메커니즘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이미 코로나로 인해 무호흡 단계에 들어선 지방 창작센터들은 재정 지원이 끊기면 해체될 수밖에 없고, 이들의 해체는 다시 지방 현대음악 산업의 단절로 이어질 확률이 높다.
프랑스 대부분의 창작 음악 단체들은 국립창작음악지원센터의 공공 지원과 예술가 작품 창작 및 배포를 지원하는 사셈(SACEM, 작가, 작곡가, 음악 연구자 협동조합)의 자금, 현대 공연 예술 보급을 지원하는 온다(ONDA, 국립 예술 방송 사무소) 등의 지원을 받고 있다. 지원 단체에 내부적 위기가 발생하면 지원 기관은 단체의 존재에 의문을 제기하기에 앞서 이전의 상태를 회복할 수 있도록 해결책을 함께 찾는 것을 우선으로 해야 한다.
그런데 투자와 결과로 값을 매길 수 없는 영역이 창작음악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지원 기관들이 내부적 위기를 이유로 한꺼번에 지원을 끊음으로써(또는 방관함으로써) 한 단체가 아사에 이른 것은, 작정한 계획이나 포기 둘 중 하나로 해석된다. 어느 것이든 국립연구소를 대하는 국가 기관으로서 책임감은 찾아볼 수 없다. 이러한 창작지원센터와 니스시의 방관을 지적하며 국립음악창작센터연합, 작곡가연합 등 여러 단체에서 공개 서명을 냈다.
100년 전 선언을 되새기며
어렵게 쌓아온 역사가 한순간에 사라질 수도 있는 시대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1910년 미래파 음악이 시작될 때 선언된 가치를 떠올려야 한다. 제1차 세계대전 중에도 멈추지 않았던 루솔로의 소음 탐구가 훗날 존 케이지를 낳은 사실을, 외면받던 슈톡하우젠의 전자음악 실험이 현시대 대중음악의 뿌리가 된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코로나 시대의 새 작품이 100년 후 일가를 이룰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글 전윤혜(프랑스 통신원) 사진 니스국제음악연구소
* 이 글은 월간객석 2022년 4월호에 실린 기사로, 초고 내용을 보충해 수정했음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