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루노 만토바니/라디오 프랑스 필 ‘붉은 시대:소비에트에 대항한 예술가’
“우리는 무소륵스키를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차이콥스키도, 체호프도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러시아 예술에 대한 보이콧은 문화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정신에 부합하지 않습니다.”
러시아 예술가를 향한 입장 표명 압력과 러시안 레퍼토리 취소가 잇따르던 지난 3월, 프랑스 문화부 장관 로즐린 바슐로가 공식 입장을 밝혔다. 친푸틴 예술가들의 공연은 당연히 취소될 것이나, 극단적으로 러시아 음악을 멈추거나, 침묵하는 예술가를 비난하기보다 “전쟁을 반대한다는 이유로 타격을 입은 예술가들을 돕는 것이 우선”이라는 것이다. 독일 문화부 장관 클라우디아 로스도 역시 15일 “러시아 문화나 우크라이나 문화가 없는 세상을 상상하고 싶지 않다”며 “전쟁을 문화적 이슈로 악용하거나 보이콧하는 사람들에 반대한다”라고 말한 바 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길어지며 예술계 혼란은 점차 사그라들고 있다. 3월 중순 이후 시즌 프로그램들은 레퍼토리 수정이나 연주자 교체 없이 진행됐다. 4월 초 파리 오케스트라도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5번을 연주했다. 내정된 러시아 지휘자 발레리 게르기예프는 얍 판 츠베덴으로 교체되었지만, 레퍼토리는 유지됐다.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5번은 1937년 볼셰비키 혁명 2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작곡된 것으로 아직까지도 사회적 해석이 분분한 작품이다. 다만 베토벤 5번과 묶어 ‘저항의 상징’이라는 주제로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우크라이나 주요 오케스트라 수석들을 초청해 함께 연주했다. 친푸틴계로 논란이 되었던 안나 네트렙코도 5월 말 파리 필하모니에서 리사이틀을 갖는다.
러시아 음악의 이중 정체성
이 가운데 모나코의 몬테카를로 예술의 봄 페스티벌 또한 1930년대 전후 러시아 작품을 모은 3월 31일 연주(브루노 만토바니/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로 눈길을 끌었다. 소련 당국의 검열이 가장 심했던 즈다노프 시기 작품들이다. 공연 전에는 ‘붉은 시대 : 소비에트에 대항한 예술가’라는 주제로 컨퍼런스도 열렸다.
페스티벌의 예술감독 브루노 만토바니는 러시아 문화의 특징을 “두 정체성”(Double Identities)으로 꼽았다. 아시아와 유럽을 끼는 지정학적 정체성과, 러시아 정교로 비롯한 전통문화와 사회주의 체제 아래 정체성의 공존 등이다. 음악적으로는 전쟁이 끊이지 않던 근대의 행진 리듬과 사회주의에 입각한 세태 풍자, 그리고 러시아 정교회 음악으로부터 비롯한 수직적 음형과 종소리 등의 메탈릭한 음감 등을 꼽았다. 이러한 양면성을 두고 고뇌한 러시아 작곡가들의 궤적을 따라가 본다.
각기 다른 소련을 경험한 세 작곡가
공연은 발레 ‘트라페즈’ 모음곡인 프로코피예프의 5중주 Op.39(1924), “영웅적 영감이 가득한” 당시 소련을 묘사한 쇼스타코비치의 피아노 협주곡 1번(1933), 만토바니(1974~)의 타악기 솔로를 위한 신작 ‘알레그로 바르바로’, 가벼운 신고전주의 작품인 스트라빈스키의 ‘카드놀이’(1936)로 구성됐다.
볼셰비키 체제의 영원한 이방인이었던 스트라빈스키와 망명했다 돌아온 프로코피예프, 처음부터 러시아를 떠난 적이 없던 쇼스타코비치까지. 비슷한 시기, 각기 다른 소련을 경험한 세 사람의 음악을 한데 모으니, 정치적 압력이 어떻게 예술가의 삶을 좌우했는지, 그리고 그에 따른 결정이 각자의 음악적 어법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쇼스타코비치 피아노 협주곡 1번은 2007년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우승자인 러시아 피아니스트 안나 비니츠카야(1983~)와 라디오 프랑스 필의 트럼펫 수석 알렉상드르 바티가 협연했다. 전진하는 리듬 아래, 비니츠카야는 거침없는 타건과 꽉 찬 음색으로 3악장 카덴차에서 종결구로 이어지는 최고조의 패시지를 비롯해 곳곳에서 음을 낚아채고 던지는 피아노의 타악기적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같은 작품의 2015년 리코딩(Alpha) 도 호연으로 꼽힌다.] 연주를 마친 그녀는 쇼스타코비치 작품의 해석에 대해 “쇼스타코비치의 실황 녹음에서 매번 새로운 영감을 얻는다.”라고 전했다.
만토바니의 타악 협주곡 ‘알레그로 바르바로’는 쉴 틈 없이 밀어붙이는 타악 패시지로 순수한 리듬이 무엇인지 묻는다. 다수의 우드블럭과 스네어 드럼, 심벌즈, 공과 2미터 철판으로 연주된 이 작품은, 제목으로부터 짐작할 수 있듯 버르토크의 타악 리듬을 바탕으로 크세나키스의 반복적이고도 완고한 리듬, 러시아 풍의 수직적 행진 리듬과 같은 아이디어를 집약적으로 쌓아 올린 작품이었다. (‘알레그로 바르바로’는 피아노를 타악적 효과를 극대화한 버르토크의 대표적인 피아노곡이다.)
여전히 선택을 강요당하는 러시아 예술가들
리드믹한 초연작과 러시아 작품들은 음악적으로 잘 맞물렸다. 프로그램을 기획할 당시에는 이러한 리듬적 합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사이 ‘러시아 전쟁 발발’이라는 사회적 이슈가 터지고 그 맥락 안에서 연주된 프로그램은 ‘음악의 사회성’이라는 또 다른 논제를 던졌다.
거의 100년이 지난 지금도 러시아 예술가들에게 비슷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당시 작곡가들의 이중적 상황과 저항을 살펴보며 우리는 아직도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쇼스타코비치가 자신의 작품을 숨기고 당국이 요구하는 대로 프로파간다적 작곡을 한 것이 지금 이 시대였다면 어떻게 비추어졌을까. 소름 돋게도 100년 전과 같은 상황을 다시 맞이한, 국가로 인해 작품이 평가당하고 선택을 강요당하고 있는 러시아 예술가들에게 유감을 표한다.
러시아 작품을 보이콧하는 것도 의미가 있지만, 한편 들음으로써 그동안 음악 뒤편에 밀려나 있던 작품의 사회적 맥락을 상기하는 것 또한 음악이 주는 의미라 생각된다. 공연 수익 전액은 우크라이나 자선 단체에 기부됐다.
글 전윤혜(프랑스 통신원) 사진 몬테카를로 예술의 봄 페스티벌
* 이 글은 월간객석 2022년 5월호에 실린 기사의 초고 원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