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하기 참 좋은 세상
발리로 떠나기 전날, 빗속에서 모터바이크를 3시간이나 몬 탓에 옷이며 가방이 온통 젖어 있다. 이래서야 비행기나 탈 수 있을까? 그러나 우리에겐 그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있다. ‘찢어진 여권으로 입국할 수 있을까?’
실수로 니콜라스의 여권을 빨아 버린 뒤부터 애써 이 생각을 하지 않으려 노력해 왔지만, 이제는 피할 수 없다. 다행히 우리의 축축하고 가련한 몰골 덕에 쭈글쭈글 찢어진 여권을 비 탓이라 핑계 댈 수는 있겠다.
“짜잔, 나의 아이디Identity card 4종 세트를 보시라!”
니콜라스가 앞으로 메는 작은 바나나 백을 척, 두르더니 앞칸에서 보물이라도 꺼내듯 포즈를 취한다.
“자, 만약 이 여권이 통과가 안 될 때를 대비해 지금부터 저의 계획을 보여드리겠습니다. 태도는 불쌍하게 애원하지만 한편으론 당당할 겁니다. 이게 내 여권임엔 틀림없으니까요. 착, 착, 착, 착. 나의 프랑스 ID입니다, 당연히 안 통하겠죠? 기죽지 말고 더 꺼냅니다. 프랑스 운전면허증입니다, 호주 운전면허증입니다, 국제 운전면허증입니다. 그리고 내 얼굴을 들이밀고 빤히 쳐다볼 거예요. 아임 니콜라스, 아임 디스 가이 니콜라스 엘리 로제 리우Nicolas Elli Roger Riou!(내가 바로 이 사람 니콜라스입니다!)”
쓸데없이 비장한 모습에 푸하핫 웃음을 터뜨려 주곤 “안 될 것 같은데.” 찬물을 끼얹는다. 공항은 동사무소가 아니란 말이야! 그래도 프랑스로 돌아가고 싶다던, 발리 못 갈 거라 비관하던 이전보다 밝은 모습이 훨씬 좋다. 암, 긍정적이어야 니콜라스답지.
푸에르토 프린세사 공항은 작기도 하고, 국내선 위주여서인지 입구에서 여권을 검사하는 게 끝이다. 형식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내린 뒤 건네주는 검사. 달걀귀신같은 사진은 본 건지 잘 모르겠다. 사진 속 남자와 달리 훨씬 머리도 많고 눈썹도 진하고 수염도 길고 코도 입도 다 있는 게 이상하지 않을까? 어쨌든 우리한텐 잘 된 일이다. 작은 공항에 세부 퍼시픽과 필리핀 에어 두 회사가 체크인을 하고 있다. 4대나 되는 셀프 체크인 기계는 모두 먹통. 발권 속도는 너무 느린데 주말 아침이라 그런지 사람이 너무 많다. 팔라완에 도착하고서 본 외국인 수를 합친 것보다도 더. 아니 이 사람들 대체 다 어디서 온 거야? 그러고 보면 우리가 참 마이너 하게 다닌 듯싶다. 카운터에서 비상구석을 요청한다. 젖은 신발에서 풍길 발냄새를 염려하면서. 참으로 적절한 이유가 아닐 수 없다.
점심께 마닐라에 도착한다. 발리행 비행기는 저녁. 두근두근 국제선으로 향한다. 발권을 안 해주면 어쩌지? 동남아 국가들은 여권에 문제가 있을 경우 입출국 심사보다 항공사 발권이 더 까다롭다. 아마 문제 있는 승객에게 왜 발권했는지에 대한 책임을 항공사에 무는 모양이다. 에어아시아 수속 카운터로 향한다. 목이 뻣뻣해지면서 긴장이 된다. 한산한 카운터 옆으로, 눈에 들어오는 셀프 체크인 기계. 일단 시도해 보자. 만약에, 아주 만약에 니콜라스 여권의 전자칩이 살아있다면, 발권이 될 테니 꽤 희망적이다. 긴장해 흘린 땀이 무색하게도 지잉- 달칵, 티켓이 프린트된다. 검색대도 무난히 통과한다.
“우리 진짜 운 좋다. 잘 될 것만 같아.”
“발리에서 받아줘야 말이지. 입국 거부당하면 공항에서 생이별할지도 몰라.”
인터넷에서 찢어진 여권, 물자국이 남은 여권, 낙서된 여권 등 입국 거부 여권에 대해 한껏 겁을 준다. 못 들어갔니, 안 되었니, 안 되겠다. 자꾸 보다 보면 정말 우울해질 것 같아. 벗어나자. 신발을 조금 말리고, 스타벅스에서 피지오를 시켜 문명을 맛본다. 스파클링이 우아하게 터진다마는 엘 니도El Nido 가던 길에 마셨던 20페소(450원) 짜리 스프라이트만 못하다. 발리엔 늦은 시각 도착할 예정이라 인터넷으로 미리 유심을 사고, 니콜라스가 호주에 있을 때부터 예약해 놓은 숙소를 확인한다. 와, 천국이 따로 없다. 어서가서 푹 쉬고 싶어. 단 함께 갈 수만 있다면.
비행기가 이륙한다. 불이 꺼지자 기내가 곧 깜깜해진다. 그가 입을 연다.
“우리 앞으로 어떤 여행이든 함께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윤혜, 앞으로 유럽에서 여행은 어떨 것 같아?”
“노 헤비 레인?”
내 재치에 감탄하며 푸하하 웃어넘기자, 제발 조옴- 나 진지하단 말이야, 하며 말을 잇는다.
“프랑스엔 여행을 가고 싶어, 아니면 나랑 살러 가고 싶어?”
“여행을 가는 거야.”
원래 나는 호주 워킹홀리데이를 끝낸 다음 프랑스로 워킹홀리데이를 갈 예정이었다. 도시는 당연히 파리. 계획이랄 건 없고, 그저 센 강이나 보고 캬르티에 라탱이나 걸으면서 사는 것. 관광객처럼 루브르 찍고 오르세 찍는 건 성격상 하지 못할 것 같아, 가고 싶을 때면 며칠이고 그곳에 머무를 수 있기 위해 살려던 거였다. 어린 시절부터 꿈꾸던 곳이기도 했고. 그러나 호주에서 예기치 못하게 만나게 된 프랑스 사람, 니콜라스의 고향은 파리의 정반대편인 남프랑스 칸이었다. 이따금 그는 내가 마음을 바꿔 칸이나 니스로 왔으면 좋겠단 마음을 넌지시 내비치곤 했다. 그러나 무계획이라도 강렬한 내 목표를 바꾸기는 어려웠다. 그럴까 싶다가도, 아쉽다가도, 결정했다고 믿었다가도 마음속으로 번복해 버리는, 우리의 예민한 소재로 남아 있었다. 어렵게 말문을 연다.
“... 그런데 나도 너랑 같은 생각이야. 앞으로 어떤 여행이든 함께 할 수 있을 것 같아.”
에둘러 대답하고 만다. 알아들었을까?
“그러면 나는 트래블메이트야, 소울메이트야?”
그놈의 소울메이트 타령 또 나왔다. 내가 가끔 소울메이트를 찾고 싶다고 무심결에 얘기했을 때 니콜라스가 참 섭섭했던 모양이다. 우리가 소울메이트라 생각하는 그 때문에 참 예민하게 다투기도 했고. “넌 트래블메이트만은 아니긴 한데...” 파리를 접는 것만큼 내 생각을 접기 어렵다.
“소울풀트래블메이트Soulful-Travel-Mate야. 트래블소울메이트Travel-Soul-Mate든지.”
“알았어, 우린 ... 소울메이트야.”
그는 트래블을 흐려 버리고 소울메이트야, 하고선 어린아이처럼 웃는다. 얼마 전 묵었던 게스트 하우스의 낙서가 또다시 어른거린다. STOP LOOKING FOR SOULMATE. 그의 손을 잡는다. 시시껄렁한 카드 게임을 몇 번 하다 스륵 잠이 든다. 눈을 뜨니 비행기가 고도를 낮추고 있다.
입국심사대가 보인다. 자동 심사 기계가 있길 바랐지만 당연히 없다. 너무 많은 걸 바랐나. 그렇다면 지금부터가 시작. 니콜라스가 떨리는 듯 바나나 백에 손을 꼭 얹는다. 표정이 비장하면서도 어딘가 시무룩하다. 네가 말하던 당당함 다 어디 간 거야? 사진 한 장 남기고 싶어 나도 모르게 카메라를 켰다가 직원에게 바로 저지당한다. 아휴 이게 무슨 망신이야. 심사대에서 사진첩과 휴지통을 보여주며 아무 사진도 없다는 걸 한참 증명한 뒤에야 나온다. 그런데 이건 또 무슨 일이야. 니콜라스가 나보다 먼저 나와 있다. 심지어 킬킬거리면서 “그렇게 겁 줘 놓고 네가 더 늦게 나오냐!”며 놀린다. 한 대 꽁 쥐어박고 싶은 마음도 잠시, 쪼르르 달려가 한참을 안고서 앞으로 좋은 일들만 있을 거라며, 서로 잘했다며 다독인다. 살짝 눈물도 나올 뻔했다. 그리고 진짜 사진을 남긴다. 찰칵.
“아니 근데 어떻게 나왔어?”
“아무것도 안 물어보던데? 여권 찍고, 지문 찍고 나니까 가래. 어차피 컴퓨터에 다 뜨겠지. 여행하기 참 좋은 세상이야.”
그동안 마음 고생한 일들이 스쳐 지난다. 아직 태국 가는 비행기가 남았지만, 한시름 놓이는 게 사실이다. 부딪혀보길 잘했어. 셀프 체크인 기계와 무사히 버텨준 전자칩이 참 고맙다. 출국장을 나오니 주황색 티셔츠를 입은 청년이 유심을 주려고 기다리고 있다. 여행하기 참 좋은 세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