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라완 섬 탈라우디용, 낙타본 비치
무작정 바다를 가기로 하고 스쿠터에 탄다. 여긴 섬이니 어딜 가도 해변이 있을 거야. 숙소 동쪽 멀지 않은 곳으로 바다가 있다. 방향을 가늠하고 마을 길을 따라가니 바다가 아닌 군부대가 기다리고 있다. 민간인 통제 구역이란다. 옆으로 난 숲길로 빠져본다. 와, 순간 세상이 연둣빛으로 변한다. 질서 정연하게 선 야자나무들. 플랜테이션 농장이다. 구글맵 위성에서 보이던 이상하리만치 규칙적인 점들이 이 나무들이란 걸 알곤 조금 서늘하다. 이곳에도 바다로 가는 길은 없다.
첫 번째 계획은 실패. 이제는 정보가 필요하다. 늘 하던 대로 네이버와 인스타그램에 팔라완 비치, 팔라완 바다, 푸에르토 프린세사 등 여러 가지 검색어를 넣어 본다. 비슷비슷하게 팔라완 한인 여행사들의 투어, 액티비티 목록이 나오고 또 거기를 간 후기들이 나온다. 한참을 들여다봐도 제자리걸음. 나의 능력이 이 정도뿐이었던가. 보다 못한 니코가 핸드폰을 가져가더니 구글맵을 켜고 쓴다.
Beautiful beach.
멍하다. 한 대 맞은 기분. 그래, 네이버에 검색한 내가 바보지. 단순해지자. 정보는 많을수록 복잡해질 뿐이다. 지도를 보니 푸에르토 프린세사 서쪽 바다에 서너 개의 비치들이 모여 있다. 산과 바다뿐인 곳. 탈라우디용, 북사얀, 낙타본… 고개를 넘을 때마다 비치가 나타나는 모양새다. 아름답다.
“위쪽부터 내려오면서 마음에 들면 가고, 아니면 패스하는 거야.”
스쿠터를 돌려 국도로 향한다. 빵집에 들러 5페소(약 110원)짜리 작은 빵 20개를 산다. 어제 죄책감으로 무겁게 지나쳤던 동네를 오늘은 웃으며 다시 지난다. 시멘트 도로에 흙먼지가 인다. 혼다와 야마하, 스즈키, 국도 입구엔 일제 모터바이크 영업점들이 혼자 환하다. 이따금 짓다 만 건물들이 나타난다. 공사장 가림막엔 푸른 곡선 수영장이 딸린 화사한 리조트 사진들이 붙어 있다. 푸에르토 프린세사는 이제 관광지가 되고 싶다.
팔라완 허리를 가로지른다. 저 멀리 푸른 바다가 보인다. 아무렇게 자란 풀과 나무들 너머 빼꼼. 감격스러운 마음에 스쿠터를 세우고 사진을 찍는다. 언덕을 넘고 커브를 돌 때마다 바다가 보였다 사라졌다 한다. 마지막 언덕을 앞에 두고, 황량한 도로에 덩그러니 놓인 나무 전봇대를 발견한다. 언젠가 전기를 들이려 했던 흔적. 홀로 남겨진 전봇대는 아직도 오지 않을 전기를 아직도 기다린다. 바다를 굽어보는 그 모습이 꼭 십자가 같다.
꼬불꼬불 흙길을 지나 도착한 탈라우디용Talaudyong 비치. 나무 차단기가 스쿠터를 막는다. 프라이빗 비치라 100페소(약 2,300원)를 내야 한다는 젊은 청년의 말에 여기 퍼블릭 비치 아니냐 물었더니, 누군가 비치를 오른쪽, 왼쪽 나눠 소유하고 있단다. 가만 다가오는 청년. 가운데에서 애매하게 수영하면 아무도 물어보지 않을 거란다. 고맙습니다.
우리 여행의 첫 비치. 구름이 조금 낀 날씨에 바다 색은 우리가 기대한 에메랄드 빛과는 달리 칙칙하다. 야쟈수가 늘어선 하얀 모래사장에서 바다를 보고 싶었는데. 정글에 뚝 떨어진 듯 무성한 나무와 평범한 흙. 비치 타월을 깔고 쉰다. 사실 나는 아직도 여권 걱정에 기분이 잘 안 난다. 니콜라스는 결심한 듯 혼자 들어가겠다 한다. 좋으면 알려달란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척척 걸어 들어가 풍덩, 빠지곤 혼자 수영하는 그. 곧 뒤돌아 엄지를 척 내민다. 멀리 보이는 작은 얼굴엔 미소가 한가득.
“쎄 빠하디!(C’est Paradis!, 여기 천국이야!)”
뭐가 저렇게 갑자기 좋을까? 뒤따라 들어가 보고선 알았다. 와, 정말 따뜻해.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난다. 여기서라면 하루 종일 수영할 수 있을 것 같아. 따뜻하단 건 온도가 사람 체온만 하단 뜻이다. 분명 흙탕이던 물도 가까이 보니 참 깨끗하다. 갑자기 니콜라스가 잠수하더니 흙 한 줌을 쥐어 올라온다. 흙이 검어서 물이 뿌옇게 보였던 거야. 따뜻한 물 덕에 많은 생명이 먹고 사느라 더 그렇겠지. 우린 필리핀 아이들과 같이 수영한다. 형과 동생이 물속에서 건진 미역으로 한참을 장난친다. 얕은 물에 구르고 뒹굴며 꺄르르 웃는다. 산에 폭 둘러싸인 따뜻한 바다. 수평선에 선 세 개의 섬이 우리를 지켜본다.
언덕 위론 비가 몰아치는데 신기하게도 고개 너머 이곳은 쨍하다. 뜨거운 태양 아래 수영하고 쉰다. 흙 위에 누워 흙 맛이 나는 빵을 먹는다. 하나에 100원, 씹을수록 달아지는 빵. 오물오물. 드러누워 서로의 얼굴을 본다. 픽 웃음이 터진다. 니콜라스가 지금 이 순간보다 행복한 순간은 없다고 말한다. 나는 모든 일들이 너무 미안하고, 그는 나를 덮어 준다. 핸드폰을 켜고 메모를 남긴다. “24 june 2019. 우리는 서로 사랑한다.” 빵 냄새를 맡고 온 귀여운 개가 얌전히 곁에 앉아 있다. 니콜라스가 건져 올렸던 흙을 주섬주섬 종이에 싼다. 오늘의 따뜻한 바다, 멋진 경치, 모두 담아서.
남쪽의 낙타본Nactabon 비치로 간다. 옅게 깔린 구름 아래 너무 또렷해 외려 흐려진 수평선. 비단 같이 잔잔한 바닷결. 신비로운 물빛. 급경사를 따라 내려가며 푸른 바다가 서서히 펼쳐진다. 아무도 없던 탈라우디용과 달리 노점이 꽤 많다. 휘날리는 깃발 아랜 무언갈 굽는 연기가 자욱하다. 현지인들이 둘러앉아 카드를 놀고 술을 마시고 쉰다. 자릿세가 있는 해변가 나무 테이블에는 아무도 앉지 않는다. 먼지 낀 의자들은 반질반질 빛날 여름만을 기다리겠지. 우리도 맥주만 사서 파도 앞에 앉는다. 잔잔한 파도에 동그마니 매인 배 한 척이 흔들린다. 꼬마들이 줄 아래로 넘나들며 장난을 친다. 양털 같은 구름이 해를 나눠 가진다. 아름다운 풍경과 참으로 따뜻한 바다, 참을 수 없어 뛰어드는 우리. 바다 위로 부서지는 옅은 햇빛에 서로의 얼굴이 보였다 안 보였다 한다. 아주 조금씩 필리핀이 좋아지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