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코로나19로 인해 재개봉된 전쟁영화들
코로나19로 인해 가장 많은 타격을 입은 산업은 영화계가 아닌가 싶다. 극장마다 ‘좌석 띄어 앉기’를 시행했지만, 빈자리들이 많이 채워지지는 않았다. 개봉을 앞둔 영화들이 일정을 미루다가, 결국 넷플릭스로 직행한 경우도 많았다. 최악의 극장가는 고비를 타계하기 위해 신작보다는 지나간 명작에 눈을 돌렸다.
재개봉 영화는 마니아층을 타깃으로 한다. 특정 감독의 팬을 대상으로 (키에슬로프스키 특별전 등), 특정 배우의 팬들을 대상으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특별전 등), 특정 장르의 팬들을 대상으로 (로맨틱 코미디 특별전 등) 기획된다. 이 밖에 계절적 요소도 반영된다. 겨울이나 연말이 되면 찾아오는 <러브 액츄얼리>와 <러브레터>가 대표적이다. 두 영화는 나란히 5회 재개봉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재개봉작으로는 스토리와 드라마가 강한 영화보다 스케일이 큰 영화가 유리하다. tv나 핸드폰을 통해서도 시청이 가능한 영화로는 굳이 극장을 찾지 않는다. 커다란 스크린(IMAX 등)과 웅장한 사운드(돌비 애트모스 등)를 통해 진가가 드러나는 영화들이 우선 고려된다. 그러한 면에서 전쟁을 소재로 한 영화들이 재개봉작으로 인기가 높다. 올 하반기 극장가에서 만난 대표적인 전쟁 영화는 다음과 같다.
내가 한달음에 달리는 이유
평화로운 초원에서 쉬고 있는 영국군 두 병사의 모습으로 영화가 시작된다. 스코필드와 블레이크는 고립된 영국군의 지휘관에게 공격 중지 명령을 전하라는 임무를 부여받는다. 제시간에 명령이 닿지 않으면 부대 전체가 몰살을 당하게 된다. 그 부대 안에는 블레이크의 친형도 포함되어 있다. 이들은 자신에게 부여된 임무를 완수할 수 있을까?
이동하던 중 두 병사는 자신들을 향해 추락하는 독일군 비행기를 만나게 된다. 독일군 비행사를 구해주었지만, 블레이크는 오히려 공격을 당하여 죽음을 맞이한다. 유언으로 형을 만나 어머니께 편지를 전해달라고 한다. 이제 스코필드의 임무는 2가지가 되었다. 공격 중지의 명령을 전달하는 것에 더하여 전우인 블레이크의 유언을 전하는 것.
감독인 샘 멘더스는 <아메리칸 뷰티>(2000)로 미국 중산층의 허위의식을 폭로하여 아카데미와 골든글로브를 석권했다. <007 스카이폴>(2012)은 역대 시리즈에서 최고 흥행작이 되었다. <1917>(2019)로 골든글로브 감독상과 작품상을 받았고, 아카데미 10개 부문 후보에 올라 촬영상, 시각효과상, 음향믹싱상의 3개 부문에서 수상했다. 브로드웨이 연극에서 시작하여 영화로 무대를 옮긴 그는 작품성과 흥행성이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제대로 쫓고 있다.
<1917>은 제1차 세계대전 중인 1917년을 배경으로 한다. 독일군이 힌덴부르크 전선까지 퇴각한 이후, 그 동향을 읽어내지 못 한 영국군이 망설이던 시기를 다뤘다. 체구가 작고 빨랐던 샘 멘데스 감독의 할아버지는 통신병으로 참전했고, 초소를 오가며 메시지를 전했다. 몇몇 장면은 어린 시절 그의 할아버지에게서 들었던 이야기로부터 탄생했다.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원 컨티뉴어스 쇼트’를 적용하여 1인칭 시점으로 표현한 것이다. 실제 촬영을 끊지 않는 ‘원테이크’와 달리, 장면을 나눠 찍은 후 편집기술로 이어 붙였다. 그는 <007 스펙터>(2015)의 오프닝에서 이 기법을 시도한 적이 있다. 카메라는 주인공을 따라 열심히 뛰어다니고, 관객들도 함께 달리는 몰입감을 전달해 주었다. 이를 통해 전쟁은 순간의 ‘하이라이트’가 아니라 ‘연속된 장면’임을 알려준다.
공포의 심연에서 마주한 광기
오랜 전쟁으로 무기력해져 있던 미군 공수부대 윌러드 대위(마틴 쉰)는 커츠 대령(말론 브란도)을 암살하라는 특명을 받는다. 우수한 군인이었던 커츠 대령은 캄보디아에서 독자적인 군대를 거느리고 있었다. 4명의 병사와 철저한 기밀 속 금지구역인 캄보디아를 향해 떠나던 동안, 여러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서로 죽고 죽이는 상황 가운데 이들은 점차 피폐해져 간다. 우여곡절 끝에 결국 윌러드는 커츠 대령의 은신처에 도달한다.
‘대부’ 시리즈로 유명한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대표작 <지옥의 묵시록>이 재개봉했다.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아카데미 촬영상, 골든 글로브 감독상 등을 수상한 바 있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전쟁 영화라고 일컬어지는 영화로, 제작 40주년을 기념하며 UHD 4K로 새롭게 편집한 감독판이다. <지옥의 묵시록>(1979)이 147분, <지옥의 묵시록 – 리덕스>(2001)가 202분이었는데, 이번에 나온 <지옥의 묵시록 – 파이널 컷>(2019)은 그 중간인 182분이다. 넣을 것과 뺄 것이 어느 정도 정돈된 느낌이다.
<지옥의 묵시록>은 군대를 탈영한 엘리트 미군을 암살하기 위하여 또 다른 군인이 나간다는 스토리를 골자로 하며, 전쟁의 참상을 알리고, 반전의 메시지를 전했다. 참전한 군인들은 하나같이 문제가 있었다. 광기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살인과 폭력은 사소하게 치부된다. 아군과 적군, 군인과 민간인이 구분되지 않는 살육전 속에서 전쟁의 명분은 힘을 잃는다.
영화는 광기의 연속이다. 서핑 마니아인 킬 고어 중령은 자신의 부대원이 서핑선수임을 알게 되자, 포탄이 떨어지는 바다에서 서핑을 하도록 명령을 내린다. 바그너의 ‘발퀴레의 기행’을 틀며 마을에 공격에 나선다. 두려움에 총기난사를 하지만 어린 소녀가 바구니에 숨기려고 했던 것은 작은 강아지였다. 미군이 베트남 아이들에게 예방접종을 해주자 팔을 잘라낸 모습을 보기도 한다. 전쟁은 참전 중인 군인들 뿐 아니라, 민간인들에게도 깊은 내상을 준다.
<지옥의 묵시록>은 베트남전을 배경으로 하지만, 실제로는 필리핀에서 촬영되었다. 동남아시아의 유사한 자연환경도 이유겠지만, 필리핀에 있는 군용 무기를 사용하기 위함이 더 컸다. 당시 마르코스 대통령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촬영할 수 있었다. CG로 만들어진 장면이 없고, 특수효과가 직접 재현되었기에 볼거리가 풍성하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십자군 전쟁에 나선 바 있는 대장장이 발리앙(올랜도 블룸)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성전에 함께 나서자고 하는 십자군 기사 고드프리(리암 니슨)를 만난 후, 그의 후계자가 된다. 우여곡절 끝에 예루살렘에 도착했다. 한센병을 앓고 있는 보두앵 4세(에드워드 노튼)가 위태로운 평화를 지탱하고 있는 상황. 발리앙은 그의 누이인 시빌라(에바 그린)와 가까워진다.
<에일리언>(1979), <블레이드 러너>(1982), <델마와 루이스>(1993), <글래디에이터>(2000) 등 오랜 기간 다양한 작품을 만든 리들리 스콧 감독의 역사물. 많은 기대를 받았으나 <킹덤 오브 헤븐>(2005)은 개봉 당시 평가가 좋지 못했다. 최근 전 세계 최초로 개봉한 감독판은 러닝타임이 무려 50분이나 늘어나 총 190분이 되었다. 그간 불친절했던 연결고리가 충분히 설명되어 완성도가 높아졌다. 관객의 이해도를 높여주었고, 영화는 뒤늦게나마 재평가를 받게 되었다.
영화는 1187년, 예루살렘을 둘러싼 십자군 전쟁을 배경으로 삼는다. 기 드 루지앙의 예루살렘 왕국과 이슬람 아유브 왕조 간에 벌어진 ‘하틴 전투’를 가져다 썼다. 살라딘과 항복 협정을 맺고 기독교인은 예루살렘에서 철수하게 되었다. 이후 영국의 리처드 1세가 3차 십자군 원정을 이어 간다. 실제 역사적 사건과 인물들을 가져다가 썼지만, 영화적으로 재구성한 것은 물론이다.
“예루살렘은 무엇인가?”라는 발리앙의 질문에 살라딘은 “아무것도 아닌 것(Nothing)”이며 또한 모든 것(Everything)이라 답한다. 예루살렘은 전부인 듯 보였으나, 사실 핑계에 불과했는지도 모른다. 십자군 전쟁은 종교적 요인으로 시작했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정치적 욕구, 경제적 이득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황제보다 우위를 보여주고 싶었던 교황, 새로운 영토를 원했던 왕과 영주, 부와 명예를 원했던 기사, 시장과 판로를 원했던 상인... 그들은 각자 다른 꿈을 꾸었다. 원래의 목적이 흐트러진 이상 전쟁은 비극으로 마칠 수밖에 없었으리라.
영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전투씬. 살라딘과의 공성전은 웅장한 비주얼과 함께 전략가들의 머리싸움도 보여주었다. 하지만 적들을 죽이고 땅을 얻는 것이 영화의 결론은 아니었다. 발리앙의 싸움은 예루살렘을 넘겨주고 사람들의 생명을 구해 빠져나오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영화의 첫 장면은 무덤가에서 아내의 죽음으로 시작했다. 반면 마지막 장면은 생명을 구하고, 새로운 시작을 예고하며 그 앞을 달려간다.
진정한 승리를 위하여
<덩케르크>(2017)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1940년 5월 26일부터 6월 4일까지 프랑스 북부 덩케르크 해안에 고립된 영국군과 연합군을 구하기 위한 탈출 작전을 그린 영화이다. 흔히 다이나모 작전으로 알려져 있다. 비슷한 시기에 개봉한 <다키스트 아워>(2017)가 덩케르크 작전을 시도하려 고군분투하는 처칠 수상을 그렸다면, <덩케르크>는 전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병사들을 그렸다.
시각적으로 관객을 압도하는 아이맥스 영화들을 주로 탄생시켰던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또한 시간에 대한 인식이 남다르다. <메멘토>(2000)에서는 시간을 조각조각 나누어 거꾸로 진행시켰고, <인셉션>(2010)에서는 꿈과 현실의 시공간을 그렸다. <인터스텔라>(2014)에서는 지구와 우주의 상대적인 시간차를 다뤘고, <테넷>(2010)에서는 시간과 엔트로피의 역행을 묘사했다. <덩케르크>는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최초로 실화 배경으로 만든 작품이었지만, 시간의 마법은 계속되었다.
영화는 육(해변), 해(바다), 공(하늘)으로 나뉘어 진행된다. 해변의 시간은 일주일, 바다의 시간은 하루, 하늘의 시간은 한 시간이다. 세 가지 시공을 오가며, 여러 각도에서 다양한 사람들의 시각으로 덩케르크 작전을 조명한다. 그러다가 결국 한 곳에서 만난다. 이 영화에는 보통의 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들이 생략되어 있다. 극을 이끄는 주인공이 없고, 악당으로 등장하는 독일군이 안 보인다. CG도 없고, 대사도 거의 없다.
육지(덩케르크 해안)에는 40만 명의 연합군이 고립되어 있다. 영국에서 올 배를 기다리지만, 이따금씩 독일군 폭격기가 나타나 포탄을 떨어뜨리고 갈 뿐이다. 배를 타고 탈출하려 하나 쉽지 않다. 기껏 떠난 배들도 적군의 공격에 침몰당하기 일쑤다. 모든 시도가 번번이 실패하지만 지옥에서 탈출하기를 포기하지 않는다.
바다에는 자진하여 출동하는 민간인들의 구조 활동이 시작된다. 아버지인 도슨 선장은 아들과 친구를 데리고 직접 출발한다. 유보트의 어뢰 공격에서 홀로 살아남았으나 패닉에 빠진 군인을 구조한다. 그는 전장을 피해 영국으로 어서 돌아가고자 하나 선장은 거절한다. 군인들을 구조해야 하기 때문이다. 추락한 비행기와 침몰하는 배에서 군인들을 구하여 자신의 배에 태운다.
하늘에서는 연합군의 전투기 3대가 날아간다. 독일 전투기와 교전을 한다. 한 대는 추락하고, 한 대는 바다에 비상 착륙을 한다. 마지막 남은 비행기는 연료가 부족한 상황이지만 돌아가지 않고 끝까지 싸운다. 해안에서 탈출해온 병사들과 영국에서 온 선박을 보호한다. 임무를 마친 뒤 불시착한 비행기에 불을 지르고, 조종사 본인은 포로로 사로잡힌다.
덩케르크의 역사는 승전보를 전하지 않는다. 참혹한 전쟁 장면을 강조하지 않으며, 생사의 갈림길에서 느끼는 불안과 초조함을 숨기지 않는다. 승리보다 값진 철수도 있는 법이다. 생존본능에 따르는 인간군상들이 비루하게 보이지는 않았다. 이를 위해 어려운 상황에서도 스스로 희생하는 이들이 있었다. 결국 모두가 승리자요 작은 영웅들이었다. 전쟁에서 철수는 승리라 할 수 없지만, 철수작전의 성공은 승리였다. 살아 돌아온 것만으로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