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심자를 위한 지극히 사소하고 개인적인 가이드
“All About Wong Karwai: 왕가위 특별전 시즌2”가 CGV에서 진행 중이다(2021.2.11.~3.3). 같은 시기에 작은 극장들에서도 그의 영화들이 특별기획전과 이벤트 형식으로 상영되고 있다. 명필름 아트센터에서는 “왕가위 4K 리마스터링 특별전”을, 더 숲 아트시네마에서는 “시네아스트 왕가위 특별전”을, KU 시네마테크에서는 “왕가위 감독전”을 열어 관객들을 불러들였다. "씨네큐브 2021 왕가위 특별전"은 1년간 진행하는 장기 상영 프로젝트로, 왕가위 감독의 필모그래피 중 매월 2편씩 선정해 진행할 예정이다.
크고 작은 극장에서 관객들에게 소개되고 있는 왕가위의 작품은 총 11편이다. <열혈남아>(1988), <아비정전>(1990), <중경삼림>(1994), <타락천사>(1995), <해피 투게더>(1997), <부에노스 아이레스 제로 디그리>(1999), <화양연화>(2000), <2046>(2004), <에로스: 왕가위 감독 특별판>(2004), <동사서독 리덕스>(2008), <일대종사>(2013).
다양한 선택지 중에서 무엇부터 보면 좋을까? 기존 왕가위 감독의 팬이라면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영화를 중심으로 보면 될 것이다. 초심자의 경우, 시간 여유가 있는 사람이라면 그가 만든 순서대로 따라가는 것을 추천한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의 영화가 어떻게 변해가는지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 왕가위의 영화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하고, 시간도 많지 않은 사람이라면 어떤 영화부터 보는 것이 좋을까? 물론 정답은 없다. 취향에 따라 다른 법이니까. 그래도 초심자가 그의 작품세계를 이해하기 수월한 길은 있다.
왕가위를 처음 경험해보기 가장 좋은 영화 - <중경삼림>
왕가위라는 이름을 전 세계에 알린 <중경삼림>은 왕가위 감독의 입문작으로 손색이 없다. 고독과 허무가 주를 이루는 그의 작품들이 사실 대부분 어둡고, 우울한데 이 영화는 그중 밝은 분위기를 유지한다. 그의 전매특허라 할 수 있는 핸드헬드, 스텝 프린팅 기법, 인공적이고도 화려한 색감 등을 매력적으로 접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뛰어난 영상미에 반하여 느슨한 스토리라인은 호불호가 갈리지만, 그건 그의 다른 모든 영화들에도 적용될 것이다.
<중경삼림>은 두 가지 이야기가 하나로 구성된 옴니버스 영화이다. 첫 번째 에피소드는 금발의 마약 밀매업자(임청하)와 유통기한이 얼마 안 남은 파인애플 통조림을 모으는 사복 경찰223(금성무, 가네시로 다케시)이 주인공이다. 두 번째 에피소드는 실연한 경찰663(양조위)과 그가 자주 찾는 패스트푸드 식당의 점원(왕페이)이 주인공이다. 이들은 각자 고독하지만, 또한 누군가를 간절히 기다린다는 도시 남녀의 공통점을 지녔다.
<타락천사>는 <중경삼림>의 세 번째 에피소드로 기획된 것인데, 러닝타임이 이미 길어서 별개의 작품으로 개봉되었다. 이 영화에도 두 가지 이야기가 등장한다. 기억상실증에 걸린 킬러(여명)와 그를 사랑하는 에이전트(이가흔)가 첫 번째 에피소드의 주인공이다. 어릴 때 유통기한이 지난 통조림을 먹은 후, 말을 잃은 남자(금성무, 가네시로 다케시)와 실연당한 여인(양채니)이 두 번째 에피소드 주인공이다.
<중경삼림>과 <타락천사>는 개봉 당시 X세대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았다. 당시 수많은 영화, 드라마, cf, 뮤직비디오에서 왕가위식 연출을 모방, 표절, 복제했다. 영화의 배경이 된 홍콩 촬영지는 젊은이들의 관광명소가 되었다. 두 영화는 기본적으로 1997년 홍콩 반환을 앞두고 있는 홍콩인들의 불안한 정서를 담고 있다. 통조림의 유통기한, 항공권의 유효기간, 영국 황실의 경찰 제복 등으로 표현되었다.
조금 더 왕가위를 느끼고 싶다면 - <화양연화>
<아비정전>, <화양연화>, <2046>은 왕가위 트릴로지로 불린다. 1960년대의 홍콩을 배경으로 하고, 주연배우의 스토리가 미약하나마 이어진다. 주제면에서는 나중에 만들어진 <화양연화>와 <2046>이 보다 깊은 관계성을 보여준다. 이 중 <화양연화>는 칸영화제에서 양조위가 남우주연상을 수상했고, 'BBC가 선정한 21세기 가장 위대한 영화' 중 2위를 차지했다. 그의 작품 중 가장 대중성이 높은 영화로 볼 수 있겠다.
첫 번째 영화인 <아비정전>은 매일 3시가 되면 매표소를 찾아가는 바람둥이 아비(장국영)가 주인공이다. 매표소에서 일하는 수리첸(장만옥)을 만나기 위해서다. 결국 수리첸은 아비를 사랑하게 되고, 결혼까지 생각하지만, 아비는 구속당하고 싶지 않다. 수리첸과 헤어진 아비는 댄서인 루루(유가령)를 만나 새로운 사랑을 이어가지만, 그 관계 역시 오래가지 못했다. 사랑을 믿지 못하게 된 그는 깊은 관계를 경계한다. 장국영이 속옷만 입고 홀로 맘보춤을 추는 장면, 발 없는 새를 인용한 대사가 유명하다.
이 영화의 끝에 양조위가 등장한다. 앞의 스토리와는 전혀 상관없이 외출을 준비하는 모습만으로 마지막 3분을 차지한다. 이 생뚱맞은 연출은 속편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하지만 <아비정전>의 흥행실패로 말미암아 속편은커녕 제작사마저 사라져 버렸다. 국내 개봉 당시, 홍콩 누아르 영화 팬들의 환불 소동은 매우 잘 알려진 일화다. 이 영화에서 못다 한 이야기는 10년이 지나 양조위와 장만옥을 통해 이어진다.
두 번째 영화인 <화양연화>는 첸 부인(장만옥)과 차우(양조위)가 주인공이다. 둘은 같은 날, 같은 아파트로 이사를 온다. 이삿짐을 옮기는 과정에서 서로의 짐이 뒤섞이게 된다. 두 사람은 서로의 넥타이와 가방이 배우자의 것과 동일함을 알아차리고, 둘의 관계를 눈치챈다. 그 관계의 시작이 궁금했던 두 사람은 비밀스러운 만남을 이어가진다. 사랑하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서로에게 빠져들기 시작한다.
불륜을 저지른 두 사람은 영화에서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다. 이제 막 비밀을 눈치챈 두 사람의 전전긍긍하는 모습만 지켜볼 수 있다. 불륜을 저지르고 있는 배우자들로 인해 버림받았다는 상처를 공유하지만, 두 사람은 선을 넘지 않는다. 우리는 저들과 다르기에. '화양연화'는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찬란했던 시절을 가리키는 말이다. 예상하지 못한 시기에 찾아온 사랑을 통해 완숙함에 대하여 생각하게 만들었다.
세 번째 영화인 <2046>은 미래를 배경으로 소설을 쓰는 차우(양조위)가 주인공이다. 그는 수리첸(장만옥)과의 기억을 되살리는 2046호에 묵고자 하나, 갑작스러운 사고로 옆방인 2047호에 투숙하게 되었다. 얼마 후 2046호에는 고급 콜걸인 바이 링(장쯔이)이 머물게 된다. 차우는 사랑을 믿지 않으며, 만나는 여성과는 육체적 관계만을 탐닉할 따름이다. 차우는 바이 링도 가볍게 만났지만, 바이 링은 진심으로 차우를 사랑하게 된다.
<2046>는 몇 가지 사랑이야기가 중첩되어 있다. 첫 번째 사랑은 차우를 헌신적으로 사랑하는 바이링(장쯔이)의 이야기다. 두 번째 사랑은 일본인 남자 친구를 둔 왕징웬(왕페이)의 이야기다. 세 번째 사랑은 검은 거미라는 별명을 가진 도박사 수리첸(공리)의 이야기다. <아비정전>과 <화양연화>에 나온 수리첸(장만옥)과 동명이인이다. 그리고 차우가 쓴 소설 속에 등장하는 안드로이드의 잃어버린 사랑이야기가 더해진다.
왕가위의 페르소나를 만나다 - <해피투게더>
홍콩에서 지구 반대쪽에 위치한 부에노스 아이레스. 이과수 폭포를 보기 위해 차로 여행을 하던 아휘(양조위)와 보영(장국영)은 길을 헤맨다. 사소한 다툼 끝에 둘은 이별을 통보하고, 각자의 길을 떠난다. 탱고바에서 중국인 관광객을 상대로 일을 하던 아휘에게 다시 나타난 보영. 둘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기로 결심한다. 이들의 서로 다른 사랑과 이별이 영화의 중심 스토리이다.
칸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은 <해피투게더>는 왕가위의 대표적 페르소나라 할 수 있는 양조위와 장국영이 주연을 맡았다. 왕가위의 인기와 명성에도 불구하고, 국내에서는 동성 간의 성행위를 담은 장면으로 인해 뒤늦게 개봉되었다. 왕가위가 홍콩 반환을 앞두고 만든 마지막 영화로, 아휘와 보영의 관계, 등장하는 소품들 곳곳에 이에 대한 은유가 숨어 있다.
<부에노스 아이레스 제로 디그리>는 <해피투게더>를 찍고 남은 필름으로 만든 다큐멘터리이다. 영화 주인공들의 영화 밖 모습, 영화에 참여한 스텝들의 고생담, 영화 속에 등장하지 않은 두 여성 캐릭터에 관한 이야기 등이 담겨 있다. 제작에 대한 비하인드 스토리를 알게 되면서 영화에 대한 이해가 풍부해지는 장점이 있다. 가능하다면 두 영화를 이어 볼 것을 추천한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즉흥적으로 영화를 만드는 왕가위 특유의 연출 스타일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르헨티나에 도착하고도 한 달 정도 촬영이 시작되지 않았다. 최종본에 선택되지 않은 장면들을 보여주었는데, 스토리의 방향을 바꿀 정도로 격차가 큰 내용도 있었다. 장국영의 분량이 영화 후반부에 가면 줄어들고, 장첸의 분량이 늘어나는데, 이러한 상황에 대해서도 이해가 갔다.
왕가위가 그린 장르의 세계
<동사서독 리덕스>는 김용의 인기 무협소설 <사조영웅전>을 원작으로 한다. 광활한 사막을 배경으로 주막에 은거하는 구양봉(장국영)은 암살을 사주하는 중개인이다. 그의 주막에 다양한 사람들이 찾아오는데, 이들 간의 엇갈린 관계가 주요 스토리다. 비하인드 스토리로 <동사서독>의 제작이 늘어지자 초조해진 유진위가 같은 배우들을 데리고 코미디 영화 <동성서취>(1993)를 만들었다. 의외의 흥행 대박을 이뤄 <동사서독>의 제작에 도움을 준 이야기가 매우 유명하다.
<일대종사>는 '한 시대에 한 번 나올까 말까한 위대한 스승'이라는 뜻이며, 이소룡의 스승으로 알려진 엽문(양조위)을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견자단의 <엽문>과 많이 비교가 되는데, 왕가위는 화려한 액션보다 엽문의 무술 철학에 더 관심을 가졌다. 엽문은 쿵후를 수직과 수평으로 설명했고, 왕가위는 이를 시각화했다. 영화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궁이(장쯔이)는 가상의 인물이며, 송혜교가 엽문의 부인 역으로 출연했다.
<열혈남아>는 왕가위의 첫 영화이다. 홍콩의 조직 폭력배(유덕화)와 그가 아끼는 동생(장학우), 한 집에서 살면서 가까워진 여인(장만옥)이 등장한다. 술집에서의 격투 장면, 공중전화 부스 키스신 등에서 훗날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는 슬로모션, 스텝 프린팅 기법 등의 원형을 찾아볼 수 있다. 홍콩판과 대만판의 결말이 약간 다른 데, 이에 대한 선호도 차이가 있다. 가장 먼저 만들어진 영화이긴 하나 그의 작품 세계를 고려하여 <아비정전>을 실질적인 데뷔작으로 여기는 이들도 많다.
<에로스>는 왕가위, 스티븐 소더버그,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등 3명의 감독이 만든 단편영화 3편을 모은 옴니버스 영화이다. <에로스: 왕가위 감독 특별판>은 40분가량이었던 원작을 1시간으로 늘려 단독으로 개봉한 것이다. 1960년대 홍콩을 배경으로, 수습생이던 샤오장과 고급 콜걸 후아의 첫 만남부터 오랜 인연을 다뤘다. 별다른 노출 없이 손끝의 움직임으로 관능미를 표현해낸다.
왕가위는 처음이라 - <중경삼림>, <화양연화>, <해피투게더>
정리하자면, 왕가위 영화 중에서 가장 뼈대를 이루는 작품은 <중경삼림>, <화양연화>, <해피투게더>라 하겠다. 시간 부족 등 여건상 많은 영화를 보기 어렵다면 이 세 편 중에 하나를 고르면 좋을 것 같다. 세 영화를 경험했다면 결이 조금은 다른 <동사서독 리덕스>를 맛보기로 추천해 본다. 도시의 사랑과 외로움에서 벗어나, 사막과 무협이 주는 색다른 매력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근간이 되는 각각의 영화들에게 연결되는 심화편들이 있다. <중경삼림>이 마음에 들었다면 <타락천사>를 추천한다. <화양연화>가 좋았다면 <아비정전>과 <2046>을 이어 보면 좋을 것이다. <해피투게더>에서 감동을 받았다면 이 영화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다룬 <부에노스 아이레스 제로 디그리>를 보면서 영화에 대한 이해를 넓힐 수 있다. 무협, 누아르 등 장르물이라 할 수 있는 <동사서독 리덕스>, <일대종사>, <열혈남아>, <에로스>는 가급적 뒤로 미뤄 보길 권한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영화 관람에 정답은 없다. 각자의 취향대로 마음 가는 대로, 발길 닿는 대로 영화를 선택하면 된다. 다만, 배경 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조금 낮은 문턱으로 수월하게 접근할 수 있는 길은 있을 것이다. 왕가위 영화를 스크린에서 몰아 접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Have a good ti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