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토록 아름다운 나 날 속에서
난 또 도망치고 있었다. 모든 것에서부터 도망치기 위해 선택한 자리였지만 난 다시 그 자리에서 도망치려 하고 있었다. 사실 전에 비해서 달라진 건 하나도 없었다. 매일 같이 그녀의 앞에서 난 정성스레 한 문장씩 책을 읽어 내려갔고 그렇게 지금은 무슨 내용인지도 기억나지 않을 책들이 한 권 두권 늘어갔다. 책들의 주인공이 저마다 자신이 처한 문제들과 싸우면서도 아름답게 자신들의 이야기를 써내려 갈 때쯤에 나의 모든 감각은 오로지 향기에 취해있었나 보다. 그 이름 모를 향으로 난 가득 채워져 가고 있었다. 책의 내용보다 향이 기억나는 걸 보니. 저마다의 계절 꽃이 한가득 피어나던 나의 정원에는 한동안 아무 꽃도 피지 않았다. 그 누구도 나의 정원에 씨앗을 뿌리지 않았고 나 또한 뿌리지 않았으니. 하지만 지금, 무너지는 세계에도 꽃은 피어나고 있었다.
떠나야 할 계절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서울의 바람과 햇빛은 너무 아름답게 부서지는 것만 같았다. 딱 작년 겨울에 이러한 기분을 느낀 적 있다. 당시의 나는 너무 외로웠고, 지쳤지만 단 하나. 떠나고 싶지 않았다. 꿈의 비자를 연장해서 난 이곳에 남아있겠다 다짐하게 만들었던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너무 차가운 겨울날의 서울 하늘이었다. 저 하늘에 잔잔히 흩어져있는 구름들을 보면서 혼자 보기엔 너무 아깝다고 생각하며 담배연기를 뱉었다. 그리고 난 고향의 부모님에게서 꿈의 비자를 연장받았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다시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다.
1년이란 시간이 이토록 짧은 건지 이전엔 알지 못했다. 작년부터 알게 된 거지만 이맘때부터 서울은 너무나도 아름다운 도시가 되어버린다. 이건 떠나갈 때가 되면 느끼는 고유의 정서인 것 같다. 내가 미처 다 누리지 못한 도시에 대한 아쉬움 때문이었나. 아니면 미처 다 꾸지 못한 꿈에 대한 아쉬움이었나. 사실 그 감정이 뭐였는지는 지금은 중요하지 않다. 예전 공사장에서 일하던 때, 고은 <낯선 곳>를 읽고 감명받아 그곳 생활을 청산하고 오산으로 떠났던 적이 있다. 딱히 오산에 뭐가 있어서가 아니라 직업소개소에서 연결해준 게 오산의 한 공장이었다. 나는 공사장에서 일하던 그때, 막연하게 꿈을 꿨다. 그 흙먼지 가득한 건설현장에서 핀 한 송이의 꽃. 그 꽃으로 난 먼지 날리던 공사장이 아름다워지는 마법을 보았다. 내가 미처 다 꾸지 못한 요즘의 서울처럼.
난 지금도 그렇지만 서울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 어떤 막연한 동경심으로 가득 차 홍대를 나의 성지로 생각하고 어떤 기자의 홍대에 대한 글들을 읽으며 서울에 대한 환상으로 가득 채웠던 나날들이 초창기에는 있었지만 서울살이를 시작하고 처음으로 강남에 갔던 날부터 이 도시가 싫어졌다. 빽빽이 들어선 큰 건물들 사이로 그만큼 뚫린 창문들, 그리고 무한히 난 창들 곳곳엔 불이 켜져 있었다. 나를 내려보기라도 하듯. 그 휘황찬란한 전장의 눈동자들은 나를 숨 조르기에 충분했다. 가장 경악스럽던 광경은 건물 외벽에 시계가 있는 것을 본 것이었다. 시계가 왜 저기에 있을까 고민하던 나의 질문에 답해줬던 친구의 대답은, 가끔 지금이 몇 시인지 알 수 있어서 나쁘지 않아 라는 대답이었다. 저 빌딩 속의 수많은 사람들과 이곳의 분위기는 바쁘고 분주했다. 난 어쩌면 전쟁에 처음 참여했던 군인이었다. 모두가 필사적으로 격전하는 꿈의 격전지에서 난 그들의 기세에 눌려버리고 말았다. 어쩌면 난 그날 다시 짐을 챙겨 고향으로 내려갔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운 저 하늘을 혼자서 보는 것은 여전히 아쉽기만 했다. 난 떠나는 그날까지 아무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혹여나 있더라도 잘 참아낼 수 있을까. 이토록 아름다운 나날 속에서 너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어느새 겨울은 찾아오고 있었다. 약간의 바람이라도 막기 위해 옷깃을 세우고 눈살을 찌푸리며 시린 바람을 막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유민과 나는 그때 즈음 같이 퇴근하기 시작했다. 유민은 시간이 흐를수록 취업준비에 열을 냈고 그만큼 작업시간이 늘어났다. 그녀는 자연스레 그저 그런 카페에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했다. 마감은 12시쯤이었는데 다행히도 나의 집을 향해 가는 길에 그들의 집이 있었다. 한 초등학교의 담벼락이 보이던 어느 사거리 시장 골목길. 모든 상점이 문을 닫아 꽤나 으슥했지만 항상 연기 자욱한 어묵들과 각종 분식을 팔던 한 분식집 앞에서 나의 파트너인 한별과 작별인사를 나눈다. 그리고 이어지는 유민과의 길 또한 그리 오래 함께 하진 않는다. 5분여 남짓 가다 인사를 하고 헤어진다. 그리고 이어지는 나의 길 앞에는 무수히 쏟아지는 빛들과 짐승 같은 인파의 정글을 헤치고도 한참을 가다 지쳐갈 때 즈음 도착하는 나의 집이 있었다. 그렇게 길을 가면서도 유민과 카톡을 이어갔다. 잘 들어갔는지. 씻으러 간다는, 아니면 언니와 다투었다는 사소하면서도 그녀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들으며. 그러는 밤이면 이윽고 나의 정원에는 느닷없이 비가 내렸다. 모든 것을 꽃피울만한 생명력이 충만한 비가.
유민은 오전부터 그저 그런 카페에 있었다. 모든 것이 열악한 그저 그런 카페의 겨울은 유독 추웠다.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추운 계절의 흐름에 충실한 친환경 카페였다. 나는 오후가 되어야 책을 읽으러 갔기에 항상 그녀에게 오늘의 날씨를 물어보았다. 그녀는 양말의 개수로 오늘 하루의 추위를 대신 말해주었다. 단위는 최소 몇 개였으며 1개면 따뜻하다였고 2개면 춥다 3개면 나오지 말 것이었다. 사실 2개의 단계부터 바들바들 떨기에 바빴다. 3개로 발령 난적은 없었다. 그래도 그녀의 헌신으로 나의 발은 언제나 동상은 면할 수 있었다. 추위가 시작되고 난 후부터의 우리는 서로 만나면 눈인사 대신 얼굴만 찌푸림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오늘 날씨 정말 추워 미칠 거 같다는 표정을 서로에게 지어보내며 한동안 그 표정으로 멍하니 서로를 응시하다 이내 아무것도 아니란 듯이 다시 서로 할 것들을 했다.
요즘 자주 일찍 온다는 동생들의 말에 난 책이 너무 재미있다고 둘러대곤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받아갔다. 커피를 한잔 정도 들이켜고 한 문단 정도 읽는 순간 유민은 내게 다시 웃음 짓는다. 난 기다렸다는 듯이 카톡으로 보내라 하고 다시 나를 따뜻하게 만들어주는 커피를 음미하며 천천히 그녀가 보낸 카톡들을 읽어 내려간다. 전에 비해 작업시간이 늘었다 보니 그만큼 처리해야 할 '선택'들이 쌓여있었다. 그녀에게 최종 결재 싸인을 내려주는 팀장인 것처럼 이건 어떤 느낌이고 저건 어떤 느낌이라 난 이것이 더 좋다는 느낌들을 메모한다. 그리곤 하나하나 그녀에게 감상문을 남긴다. 대다수는 나의 그럴싸한 말에 웃으며 넘어간 듯 그냥 넘어갔지만 몇몇의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선택들에 대해선 절대 동조할 수 없다는 의견을 내 비쳤다. 결국 그렇게 결정 나지 못한 사항은 더욱더 시간이 지난 뒤 한별이 오고 나서야 해결된다. 한별은 대체로 나의 얼토당토 안 한 의견들에 한심한 눈초리를 보내면서 저 오빠 말 듣지 말라며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필사적으로 싸워도 이길 수 없는 싸움, 한별은 대체로 나의 헛소리들에 콧방귀도 뀌지 않는 로봇과도 같았다. 그렇기에 더 이상의 토는 달지 않고 조용히 멋쩍은 웃음을 지어보내며 아쉬워했다.
나는 책을 읽다 마음에 드는 구절들을 메모하는 습관이 있었다. 언제든지 지금 이 순간의 여운을 느끼기 위해서 찍는 사진처럼 나는 나의 휴대폰에 메모했다. 처음엔 뭐하는 것이냐고 물었는데 그럼 유민은 책에 밑줄을 그으라 했다. 하지만 내 책이 아닌 남의 책에 긋기는 미안했기에 그냥 메모를 한다 했다. 그러다 메모를 하면 유민은 가끔 어느 부분이 좋아서 메모를 했냐 물었다. 그럼 난 숨을 한번 크게 고르고는 그 책의 주인에게 난 이런 부분이 좋았고 이 부분의 이 문장에서 무너지고 말았노라 말했다. 그때마다 그녀는 매우 만족하는 미소로 고개를 끄덕이며 간식들을 주었다.
유민은 곰돌이 모양 젤리를 좋아했다. 군것질을 좋아했던 그녀의 가방에는 항상 먹을 것이 몇 가지 있었다. 나는 그 젤리 말고는 그녀의 간식을 다 좋아했다. 그녀의 앞에 있으면 그녀는 이따금씩 자신의 보물창고를 꺼내보였다. 원래 젤리를 좋아하지 않기에 젤리 말고는 다 넙죽 받아먹었다. 젤리를 한사코 거부할 때면 그녀는 오히려 고맙다면서 자신이 다 먹기에 바빴다. 난 그런 그녀의 그런 호탕한 모습을 특히 좋아했다. 그녀는 아주 가끔 기분이 좋을 때면 발박수를 쳤는데, 웃을 때 박수를 치는 버릇이 있었다. 그러다 자신이 너무 기분이 좋으면 발로도 박수를 쳤는데 난 그 모습이 너무 좋아서 계속 보여달라 했다. 나의 이상형 리스트에는 비빔냉면 곱빼기를 먹는 여자가 있었다. 음식을 잘 먹는 여자를 좋아한다는 의미도 있었지만 내숭 떨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도 사랑할 수 있는 여자의 의미로 두었던 이상형이었다. 유민은 알면 알수록 내가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나는 유민의 향에서 벗어날 수 없었고 그녀에 대한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불안했던 나의 하루는 결국 유민으로 시작해 유민으로 끝났다. 그녀의 성실함은 내게 있어서 배울 점이었고, 결국 그녀는 그저 그런 카페로 가는 길에 내게 모닝콜을 해주기로 했다. 나는 배울 점이 있는 그녀의 도움으로 조금 더 일찍 그녀가 존재하는 세상을 보고 싶었다. 알람에도 잘 깨는 나였지만 무너지는 나에게는 단순한 알람보다 눈을 뜨게 만들 더 큰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저 눈을 감고 모든 것에서 도망치고 싶었기에, 그녀가 없는 모든 시간 속에선 아무것도 모른 채 눈을 감고 싶었다. 그렇기 때문에 오로지 그녀만이 도망치는 나를 잡아 줄 수 있었다 생각했다. 요 근래 매일 같이 지내기도 했고 이런 부탁이 너무 뻔한 수라 나조차도 식상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대로 나의 수가 다 읽혀버린다 해도 나쁘지 않다 생각했다. 뭐가 되었든 난 당신의 좋은 점을 배워가는 것이고 언제나 그랬듯 해피엔딩은 오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혹시나 만약에, 당신과 나의 마음이 맞는 우연에 일치로 나의 마음과 당신의 마음이 같더라도라는 상상은 하지 않았다. 난 혹시라도 있을 그 결정적인 순간엔 도망칠 테니까. 그러니 당신은 그저 지금처럼 내 앞에 아무 말 없이 있어주면 된다. 이 마지막 추위처럼 당신의 곁에 머물다, 계절이 바뀌면 자연스레 잊힐 사람. 이듬해 맞이할 추위에 금세 잊곤 하는 뜨겁던 계절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