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가 되고 이런저런 활동을 시작하느라 다시 타게 된 지하철에서 저는 습관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그림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한 장 한 장에 이야기를 담아 보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하나씩 모으던 것이 이번으로 30회째. 에피소드가 최대 30개씩 담기는 브런치북에서 한 권을 닫을 때가 온 것이죠.
갑자기 바빠진 탓도 있었지만, 나름 애착을 갖고 연재하던 책을 이제 닫으려는 생각을 하니, 마지막으로 어떤 에피소드를 써야 할지 망설이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 벌써 몇 주가 지나버렸네요.
그리고 오늘 저는 그 고민을 <에필로그>라는 이름으로 끝내려고 합니다.
그림을 오래 그려온 사람으로서, 크로키는 하나의 습관이기도 하고 놀이이기도 합니다.
예전에는 화방에서 새로운 스케치북과 새로운 펜을 발견하면 어서 써보고 싶어서 지하철에 뛰어올랐던 기억이 있습니다. 지금은 그런 낭만은 없어졌지만, 아이패드와 애플펜슬이라는 도구를 이렇게 저렇게 사용하며 나름의 재미를 찾게 되었지요. 그렇게 한 장 한 장 모아 오던 그림들이 아이패드 안에 차곡차곡 쌓여있습니다.
그중 몇몇은 브런치를 통해 각각의 이야기를 담아 생명을 얻게 되었고, 나머지 대부분은 어떤 이야기를 담을지 고민하던 흔적을 간직한 채 잠을 자고 있습니다.
저는 문자와 글, 책에 대한 경외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의 말과 생각, 이야기를 문자라는 형태로 담아놓고, 읽는 사람은 단순히 그 문자를 읽을 뿐이지만, 문자 속에 담겨있던 말과 생각, 이야기가, 읽는 사람의 머릿속에서 펼쳐지며 다양한 이미지와 영상을 만들어 냅니다. 그것들을 담아낸 문자, 그 문자를 조합한 글, 그 글을 담은 책이라는 그릇. 저의 그림들은 그 이야기가 펼쳐지는 것을 돕는 길잡이의 역할로 쓰였으면 했습니다. 글과 그림이 함께 어우러져 지금 우리와 함께 살고 있을 법한 누군가의 짧은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 싶었습니다.
특히, 이렇게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으로서, 저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이야기를 기록하려 했습니다. 소박한 삶의 이야기도 있었고, 오늘날 우리가 사는 대한민국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저의 언어로 기록하기도 했습니다. 우리 공동체가 아파했던 기억, 공분했던 기억, 환호했던 기억. 그런 기억들을 꼭꼭 담아서 나중에 꺼내보고 같은 감정을 회상하고 공유하고 싶었습니다.
때로는 민감하고 아픈 이야기도 있었고, 감사하게도 누군가가 공감해 준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그 이야기들은 제가 쓰기는 했지만 그렇게 감정을 나누어 준 분들의 이야기였습니다. 이곳 브런치에서 감정을 함께 나누어준 모든 분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의례적인 하트일지라도 그 하트와 관심들이 저를 비롯한 많은 ‘쓰는 사람’들에게 작은 동기와 에너지가 되어주니까요.
아직 풀어놓지 못한 그림들이 훨씬 많고 이야기도 무궁무진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30개 에피소드를 채운 김에 여기서 잠시 숨을 고르려 합니다. 아무쪼록 제가 계획했던 한 가지를 이루었다는 성취감에 게으르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다음에 어떤 글을 써야 할지, 이 지하철 크로키 이야기를 다시 이어갈지, 전혀 다른 이야기를 써볼지, 아무 계획도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늘 그랬듯 계속 무언가를 쓸 것이고, 그러다가 기록으로 남기고 싶은 것은 이곳 브런치에 차곡차곡 쌓아볼 것입니다. 여전히 하트와 댓글에 설레면서. 여러분의 글에 웃고 감동하고 배우면서 말이지요.
말 그대로 에필로그인데, 끝까지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우리 함께, 즐겁게 써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