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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만난 세계

by 보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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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소씨는 모니터에 열린 그림을 한참 동안 들여다보았다.


얼굴이 보이지 않아서 자신인지 알아볼 수는 없었지만, 야구모자에 롱패딩 모자까지 뒤집어쓰고 방한부츠까지 신은 모양은 영락없는 지난봄의 자신이었다.

이 그림과 함께 온 메일에는 그림을 늦게 보내주어서 미안하다며, 다시 만난 세계에서 안녕하냐는 짧은 안부인사가 적혀 있었다. 미소씨는 그제야 지난겨울 지하철 3호선에서 만난 남자가 생각이 나서 킥 웃음이 나왔다.



아직은 쌀쌀한 지난 봄.

날짜는 이미 봄이 봄이었지만, 세상은 아직 겨울이었다.

아이돌 덕후였던 미소씨는 소중한 응원봉을 챙겨 들고 매주말 광장으로 나섰다.

어느 날은 차디 찬 남태령 고개에서 뜬 밤을 새우기도 했고

또 어느 날은 눈 내리는 한남동 도로 위에서 키세스 초콜릿이 되기도 했다.

아이돌 공연 방청권을 얻기 위해,

선착순 전석 스탠딩 공연에서 앞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추운 길에서 밤을 새우는 것은 이미 익숙한 일이었다.

그때는 최애를 누구보다도 가까이에서 보고야 말겠다는 의지만으로 사방에 적을 둔 채 외로운 싸움을 했다면, 지금은 모두가 한 마음으로 온기를 나누었다. 몸은 고됐지만, 마음은 훨씬 따뜻했다.

그리고 공공의 적을 향한 결의는 어떤 어려움과 추위도 녹이고도 남았다.


미소씨는 혼자가 아니었다.

남태령에서는 핫팩이며 먹을 것이며 하는 것들이 끊임없이 배달되었고, 몸을 녹이라며 히터가 빵빵하게 켜진 버스들이 줄줄이 도착했다. 누가 보냈는지는 모르지만 마음은 같으나 몸은 함께하지 못하는 이들이 미소씨를 지켜보고 응원하고 있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든든했다.


하얀 눈이 내리던 날, 미소씨는 광화문에서 집회를 마치고 많은 사람들과 함께 응원봉을 흔들며 한남동으로 향했다.

평소에는 무섭다고 생각했던 민주노총 조합원들이 한남동에 자리를 잡아놓고 있으니 함께 합류하여 힘을 보태자고 했다.

눈도 점점 많이 오고 정말 더럽게 추웠지만, 버텨낼 수 있었다.

축제처럼 푸드트럭들이 도착하고 핫팩들이 전달됐다.

어디서 왔는지 은박담요들이 속속 도착했다. 나중에 들으니, 시민들이 여기저기서 구입해서 현장으로 보내주었다고 했다.

미소씨는 따뜻한 응원들로 몸을 데우며 남태령에서처럼 버티기만 하면 되는 거였다.


그날 이후 한동안 감기로 고생했다는 친구도 있었고,

10년은 늙은 것 같다며 너스레를 떠는 친구도 있었다.

하지만 미소씨의 마음속에는 그날들 속에서 받은 따뜻함이 선명하게 새겨졌다.


미소씨는 사실 정치에는 관심이 없었다.

하루하루 살아가는 시간들이 버거웠기에, 숨구멍 역할을 해주었던 아이돌 외에는 모든 것이 다 힘들고 귀찮았다.

지금껏 언론은 정치를 혐오하게 만들고 미소씨가 눈앞의 세상에 갇히도록 만들었다.

경쟁심을 부추기고 패배감에 젖게 만들었다.

희망 없는 미래를 향해 비틀비틀 걸어가야만 하는 자신의 모습이 너무 비참하기까지 했다.


그러던 미소씨는 한 정치인을 발견하고 그의 정당을 응원하게 되었다.

미소씨와 함께 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방식으로 의사를 표현하고 지지하고 응원했다.

언론에서는 자신들을 극단적 지지자라며 비하했지만, 팬덤문화와 그에 대한 비난은 익숙한 일이었다. 그리고 미소씨는 확신했다. 정치는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의 삶을 바꾸는 아주 중요한 이야기라고.

우리의 삶을 위해서,

나를 위해서,

정치에 관심을 갖고 정치인과 정당을 지지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고.

그리고 정치인이 잘못할 때엔 시민들이 목소리를 모아 바로잡아야 한다고.

그런 생각들이 그 겨울 미소씨를 광장으로 이끌었다.


그러던 어느 날,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에서 미소씨는 누군가의 집요한 시선을 느꼈다.

하필 오늘 단상에서 자유발언을 한 것이 문제였을까?

경찰이 자신의 신상을 조사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극우집회 쪽 사람이?

미소씨는 얼굴을 가린 모자 틈으로 가만히 눈을 들어 주위를 살폈다. 그리고 멀찍이서 자신을 훔쳐보며 아이패드에 무언가를 기록하는 한 남자를 발견했다. 몰래 조사하는 거라면 저렇게 눈에 띄게 하지는 않을 텐데… 굳이 텅텅 빈자리들을 두고 한쪽 구석에 서서 자신을 훔쳐보는 남자가 아무래도 수상했다.

미소씨는 핸드폰의 녹화버튼을 눌러 한 손에 들고 남자를 향해 조용히 일어나 걸음을 옮겼다. 그냥 자리를 피할까도 싶었지만, 정말 자신을 조사하고 있는 것이라면 공론화를 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마음속에서 뜨거운 것이 끓어올랐다.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재빠르게 남자 앞을 막아 선 미소씨는 단호하고 빠르게 물었다. 핸드폰을 들어 남자를 찍으며 한 손으로 남자의 아이패드를 뺐었다.


“이게 뭐야? 이거 나예요? 나 왜 그려요?”

“아, 그게, 그냥, 죄송합니다!”


남자는 당황해하며 연신 고개를 숙였다.

아이패드 안에는 자신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그려져 있었다. 수사 대상들을 미행해서 몽타주를 그리는 건가? 그러기에는 자신처럼 아예 얼굴이 안 나온 그림도 있었고 뒷모습을 그린 그림도 제법 있었다.


“아, 이게… 제가 그림 그리는 사람이라 그림 연습을 하는 건데…”

“그림 연습을 이렇게 상대방 동의도 없이 하면 안 되는 거 아니에요? 초상권 침해 아닌가요?”

“아… 예전에도 그런 문제가 있었는데, 상대방의 얼굴을 알아볼 수 없다면 초상권 침해는 아니라고 하더라고요. 그럴 정도로 잘 그리지도 못하고요… 실제처럼 예쁘게는 잘 안 그려지더라고요. 그리고… 지하철 탈 때 들고 계시던 응원봉을 보니까 너무 그리고 싶었거든요…”


남자는 싱긋 웃으며 미소씨의 가방을 가리켰다. 미소씨는 어이가 없었지만, 다행히 생각했던 나쁜 일은 아니라는 생각에 안도했다. 그러고 보니 최근에 스스로를 찍은 사진도 한 장 없었는데, 이렇게 집회에 다녀오는 모습이 그림으로 기록된다면 나름 의미 있는 일이겠다고 생각이 들었다.


“그래요? 그러면 이번만 넘어가드릴게요. 그런데 이 그림 어디에 쓰실 건데요?”

“아, 그냥 연습으로 그리는 건데, 불편하시면 지울게요.”

“아니요, 누군지 알아보기도 어려운데, 그냥 두세요. 대신 저한테 보내주실 수 있죠?”

“네? 누군지 알아보기도 어려운데요?”


미소씨는 남자가 웃으며 건넨 펜슬을 받아 들고 그림 옆에 자신의 메일 주소를 적어주었다.

그리고 미소씨는 그런 일이 있었는지조차 잊어버렸다.



시간이 흘러, 봄이 지나 여름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동안 세상은 많은 일이 있었고, 조금씩 변해가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 미소씨가 지지하던 정치인이 대통령이 되는 새로운 세상을 맞이하게 되었다.

미소씨는 개표방송이 끝나는 새벽 3시까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길까 봐, 혹시라도 잘못될까 봐, 뜬 눈을 더 부릅뜨고 개표방송을 시청했다.

그가 대통령으로 당선이 확정되는 순간은 최애 아이돌이 미국 빌보드 챠트에서 1위를 하는 것은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짜릿하고 감동적인 순간이었다. 미소씨는 계속 흐르는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리고 다음 날, 미소씨의 메일함에 이 메일이 도착했다.

그날 미소씨의 그림과 짧은 안부.

남자의 얼굴은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어쩌면 남태령에서, 한남동에서 자신이 받은 따뜻함을 보내준 사람들 중 한명일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싸인이라도 해서 보내지.”


미소씨는 피식 웃으며 카카오톡 프사를 변경했다.

이제 새로운 나라에 어울리는 새로운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하며, 마음 가득 희망을 담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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