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옥씨는 겨우 분을 삭이고 지하철에 올랐다.
모처럼만의 외출이었다.
항상 가족들을 위해 헌신하던 정옥씨. 봄꽃들이 지기 전에 나들이도 다녀오고 청춘을 담았던 광화문의 대형 서점에서 시집들을 훑어볼 요량이었다.
하지만 오늘따라 나가지도 않고 집에서 뒹굴거리며 아침 여덟 시부터 점심 반찬이 뭐냐고 물어보는 남편과, 지가 아무 데나 벗어던져놓은 파란색 티를 내놓으라고 난리를 치는 아들놈이 자신의 발목을 잡았다.
학창 시절 문학소녀였던 정옥씨는 시인이 되는 것이 꿈이었다.
서정주 시인의 이름처럼 서정적인 시인이 되고 싶기도 했고,
이형기 시인처럼 누군가의 가슴속에 평생 박히는 시어들을 조각해서 원고지에 새겨보고 싶었다.
하지만 정옥씨의 아름다운 꿈은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사랑이 웬수였다.
아니, 사랑을 빙자한 웬수들이 문제였다.
남편은 거짓말을 그럴듯하게 하는 재주가 있는 사람이었다.
사실 시이니 문학이니 따위에는 전혀 관심도 없었으면서,
정옥씨가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서는 신춘문예 등단 작가인 양 아는 척을 떠들어대며
자신의 얇은 귀를 흔들었었다.
하필이면 그때 빠져있던 헤르만 헤세를 연상시키는 문투의 구애편지가 결정적이었다.
누구를 원망하랴. 사람을 제대로 판단하지 못한 자신이 문제였을 뿐,
남편은 단지 최선을 다 했을 뿐이다.
그 결과로 정옥씨는 그의 아내가 되지 않았는가.
결혼을 하고 아이들이 생기면서 정옥씨는 날개옷을 잃은 선녀처럼 눈앞의 현실에 충실했다.
언젠가 아이들이 다 자라면 날개옷을 다시 찾아 입을 수 있겠지?
그리고 다시 날개를 달고 나의 꿈을 이룰 수 있겠지?
정옥씨는 그렇게 좋아하던 시 한 줄 읽을 틈도 없어 열심히 살았다.
남편과 함께 꾸려가던 가게. 점점 자라나는 아이들.
원래 꿈이 뭐였는지 기억이 희미해져 갔지만
정옥씨의 마음 한 구석에는 여전히 선녀의 날개옷이 있었고,
보석 같은 시어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아이들이 사춘기가 되고 손이 덜 가기 시작하자 정옥씨의 삶에도 조금씩 여유라는 것이 생겼다.
스마트폰을 하는 시간도 늘어가면서 아마추어 작가들의 작품들도 찾아서 읽게 되고 글쓰기 카페에도 가입하게 되었다. 서툴지만 습작도 한 두 편씩 써보면서 얼굴도 모르는 이들의 따뜻한 댓글에 눈물을 흘리는 때도 있었다.
그러던 중, 글 쓰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브런치라는 곳에 작가신청을 하고 작가로 승인이 되었다.
자신을 ‘작가’라고 불러주는 것도 좋았고, 자신의 글로 인정을 받은 것 같은 기쁨이 너무 컸다.
남편이 장롱 깊은 곳에 꼭꼭 숨겨둔 날개옷을 발견한 것 같은 기쁨이었다.
이를 계기로 정옥씨는 자신을 꿈으로 한 걸음 나아가기로 결심했다.
그 일환으로, 이제 자신의 삶은 어제와는 다르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하며 집을 나선 것이다.
텅 빈 마음의 곳간에 눈부신 시어들을 가득 담아 오리라.
아름다운 꽃들을 닮은 단어들을 채집하고 싱그러운 푸른 잎을 닮은 행간들을 찾아오리라.
그것이 정옥씨의 계획이었다.
자신의 꿈을 필사적으로 방해하며 며칠 굶은 개처럼 귀찮게 구는 남편과 사나운 들개 같은 아들놈을 겨우 떼어내고 밖에 나왔다. 그러나 얄궂게도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어떻게 나왔는데, 겨우 이런 비 때문에 꿈을 꺾을 수 없다. 하지만 생각보다 많이 쏟아지는 비였기에, 정옥씨는 다시 걸음을 돌려 집으로 향했다. 우산만 가지고 나오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길을 나서자.
집으로 돌아가 현관문을 여니, 갑작스러운 빛을 피해 어둠을 찾아 달아나는 바퀴벌레처럼 가족들이 부산했다. 집안에는 이미 라면냄새가 가득 찼고 엄마가 나가는데 코빼기도 안 보이던 딸내미까지 나와서 라면을 우물거리고 있었다. 아침 9시부터 라면이라니 기가 막혔지만 정옥씨는 애써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자신은 오늘 자신의 인생을 살 것이므로.
“엄마, 언제 와?”
“점심 전에는 오지?”
“점심은 우리 뭐 먹어?”
머리끄덩이를 잡아끄는 바퀴벌레들의 질문들을 현관문의 꽝하는 소리로 지워버리고 정옥씨는 힘차게 다시 길을 나섰다. 정옥씨는 오늘 나가서 혼자 저녁까지 먹고 올 셈이었다. 오늘 하루는 온전히 자신을 위해 쓸 것이다. 아니, 앞으로의 삶도 이제는 자신을 위해서만 오롯이 쓸 것이다.
정옥씨는 다짐했다.
지하철역에 도착할 즈음 우산 대신 가방을 두고 온 사실을 깨닫기는 했지만,
정옥씨는 오늘 반드시 자신만을 위한 하루를 보낼 것이다.